영국 민중사
J.F.C.해리슨 / 소나무 / 1989년 12월
평점 :
품절


역사는 언제나 소수의 영웅들에 의해 창조된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역사의 주도권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소수의 손에 의해 전단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민중들은 언제나 권력의 끝자락까지 접근했다가 소수의 기득권 집단에 의해 밀려나곤 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앙시앙 레짐으로 복귀하면서 혁명의 순수함을 상실하였고, 러시아 혁명 역시 노동자의 천국 일보 직전에서 스탈린 주의자들에 의해 인너서클의 통치로 변색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민중이 주도권을 가진 역사는 기존의 역사책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은 이런 우리의 선입견을 타파해주는 아주 의미 깊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영국이라는 지리적으로 한정된 부분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중의 역사에서 각국의 민중들이 어떤 연대관계를 유지하였는지를 파악하기는 힘이들다. 하지만 영국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줄기 속에서 민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하고 좌절하였는가를 볼 수 있다. 사실 기존의 영웅역사론의 주 무대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사적인 장소라면 민중의 역사가 이루어진 장소는 도시의 뒷 골목, 공장, 그리고 야학과 같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역사를 기념할 기념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마이너리티의 역사에 등장하는 역사적 용어들이다. 이들 용어들은 민중의 삶과 삶의 진보에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 책은 봉건적 농민이 어떻게 근로 민중으로 그리고 노동계급으로 변화하면서 종국에는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태어날 수 있었는가를 시대적으로 자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각각의 주제를 3장으로 구성하여 모두 12장으로 구성된 이 민중의 역사는 선동성이나 가르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봉건농민이 민중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읽어간다는 것은 인내를 필요로한다. 그리고 민중들은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는 민중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읽기와 쓰기 가운데 하나는 할 줄 몰랐다. 이들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할 줄 아는 집다는 전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지배계층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기록은 순전히 지배자의 기록에만 단편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설혹 민중의 기록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불완전한 철자법과 속어의 남발로 인해 해석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런 민중의 모습이 시종 냉철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은 민중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넷 터너, 말콤 엑스와 같은 민중적 인물의 이야기도 기존의 역사적 서술에서는 영웅적 방식으로 변경됨으로서 그들의 진짜 의도를 왜곡시킬 여지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민중사는 민중의 역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좀더 엄격하게 교정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우리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민중은 변질을 겪지만, 기본적으로는 변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사는 꿈의 순서와 흡사하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과거 혹은 미래의 외부에 서 있고, 항상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 시간은 그들과 관계되지 않는다> 이 말은 지상에서의 유한한 삶 속에서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메르 신화 1
조철수 지음 / 서해문집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기원전 3200년경에 두 강 사이-메소포타미아-에서 설형문자를 사용한 문명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수메르 문명이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진흙 덩어리에 첨필로 눌러 찍는 방식으로 문자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변형시키지 못하도록 불에 굽거나 말려 보관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손실될 뻔했던 수많은 기록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자를 해독함으로서 지금으로부터 5천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들을 우리들은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수메르문명의 기록인 점토판들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 시대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록은 구약성서였다. 하지만 성서는 역사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종교의 기록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는데는 많은 부차적인 자료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수메르의 점토판이 발견됨으로서 오히려 구약의 빈약한 기록의 많은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수메르 점토판에서 발견된 30여편의 신화와 15편의 영웅전, 그리고 5백여편에 달하는 찬양시와 수십편의 잠언집, 30여편의 우화 등은 그 시대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그 지역과 주변지역의 문화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수메르 문명의 영향은 당대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를 거쳐 이들이 점령한 힛타이트, 우가리트, 히브리와 고대 그리스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대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이 지역이 당시에 곧 세계였다-에 수메르의 신화가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의 신화는 다신교적인 색채가 아주 강하였다. 이들의 신화에 보면 신이란 <신들>로 표현될 만큼 자연의 고유한 특성이 각각의 신들에게 인격으로 부여됨으로서 자연스럽게 다신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이후 수메르 제국을 이어받는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서도 불변하는 것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은 정복자의 토착신이 차지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의 신으로 혼합되어 부족의 신에서 지역의 신으로 그리고 제국의 신으로 발전하게 된다.

수메르적인 신의 성격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민족은 그리스였다. 이들은 수메르적인 신의 세계를 그대로 올림포스라는 곳에서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 역시 수메르의 신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다신교적인 영향에서 오직 히브리 민족만이 비껴나갔다. 히브리 민족은 다신교 대신 일신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신의 문제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사실 구약 성서의 앞부분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주변 세계의 신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이를 어떻게 자신들의 성격에 맞는 일신교적 유일신으로 변형시켰는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신과의 직접적인 계약을 통해 선택된 민족으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결과 수메르적인 다신교는 히브리인들에게 유일신적 일신교로 바뀌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이런 변형은 당시의 세계에서는 아주 희귀한 예였을 뿐이다.

그리고 수메르 문명으로 시작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명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들의 언어라는 점이다. 우리들은 이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번역된 것을 영어나 다른 언어를 통해 중역한 것을 읽어왔던 것이 그간의 실정이었다. 이런 중역의 문제는 메소포타미아적인 사고와 그리스적인 사고가 아주 상이하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들의 동사는 언제나 움직임이나 작용을 표현한다. 우리에게 <들에 나무가 서있다>라는 표현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하지만 서있는 것이 일어섬이나 혹은 자리를 취한 종료나 끝 또는 그 결과라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들에게 고정된 존재는 언제나 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서있다라는 동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의 혹은 정지상태로 넘어가는 동작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여러가지 고정점의 변화로 인해 수메르 신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신화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세심한 고찰이 있어야만 한다. 즉 단어 하나 하나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해의 폭보다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설명의 폭이 굉장히 넓게 포진되는 것이다.

수메르 신화를 읽어가면서 단순히 이들 신화가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라는 단순한 이해보다 이들의 사고방식이 이후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메르 신화는 읽어볼 만 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야
엘리 위젤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78년 4월
평점 :
품절


유대인들에게 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 생활의 기준은 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하루는 해가 떨어지는 일몰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둠이 짙어지면 하루의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관념과 반대로 시작되기에 약간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들이 아침 해를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둠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기에 흑야라고 할 때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밤이 본래의 의미대로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것은 정말로 보람있는 하루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흑야는 안식의 밤이 아니라 고통의 밤이었다는데 모순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이유없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해답은 없다. 그러면서 이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새벽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밤의 안락함이 사라진 새벽의 기상시간. 그것은 삶의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흑야는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참상에서 꿈꿔왔던 온전한 하루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작업장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집합장에 세 마리의 까마귀처럼 세워진 교수대를 보았다. 출석 점호가 있고 친위대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기관총이 겨눠진 가운데 판에 박힌 격식이 진행됐다. 쇠사슬에 묶인 세 제물, 그 가운데 하나는 어린 몸종, 바로 슬픈 눈의 천사였다.

...수용소 소장이 판결문을 읽었다. 모든 이의 눈이 그 아이에게 쏠렸다. 아이는 납빛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깨문 채, 대체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교수대의 그림자가 소년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수용소 간수는 사형 집행관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친위대원 3명이 대신 집행했다.

제물 세 사람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의 목은 똑같은 순간에 올감이에 끼워졌다.

"자유 만세!"

어른 두 사람은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어디 있는가?"

내 뒤에서 어느 누가 물음을 던졌다.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있자, 세 의자가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끼쳤다. 지평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탈모!"

수용소 소장이 고함을 쳤다. 쉰 목소리였다. 우리는 울고 있었다.

"착모!"

그리고 분열 행군이 시작되었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 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반시간 이상이나 거기에 그대로 두어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렸고, 우리의 눈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서서히 당하면서 죽어 갔다.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했다. 내가 그 앞을 통과했을 때 소년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흐려지지 않았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또 물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여기 교수대 위에 목이 매달려 있어...">

이들에게 이렇게 하루는 시작되면서 마감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도생활 역사 2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지음, 강운자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수도생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우리들은 그 엄숙함과 정적의 세계를 우선 떠올린다. 왜 수도원은 이런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었을까? 특히 수도생활하면 우리들의 시선은 중세에 머물게 된다. 그만큼 중세는 수도원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수도원과 수도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세의 수도생활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앙의 근거지이면서 기독교 문명의 전파에 가장 앞에선 최전방의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확장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확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수도원이 게르만 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해가면서 게르만족의 개종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은 당시 가장 개화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수도사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쓸 줄 알았다. 그것은 이들이 매일 바쳐야만 하는 기도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읽고 해독할 줄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수도원은 중세 시대 전 기간을 통해 권력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조직이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왕이나 귀족들의 자문이 되어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반적인 모습이 중세의 수도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다가 아니었다. 이들은 중세 시대를 통해 가장 적극적인 개척집단의 하나였다. 수도원은 중세 장원의 체제와 비슷한 자급자족의 체제를 갖춘 구조였다. 그러므로 한 지역에 수도원이 설립되면 수도사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의 거주지와 자급자족의 체계를 갖추어야만 했다. 이 결과 수도사들은 변경 지역의 미 개발지역을 개발하는 주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경제적 자급자족의 체계를 갖추고 정착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 수도원 주변에 이주민 집단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었다. 우선은 신앙적인 문제였다. 이들에게 종교적 전례행위를 베풀 수 있는 곳은 수도원이었다. 그러므로 성직자가 있는 곳에 이주민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의 문제는 방어적인 문제였다. 수도원은 그 자체로 변경지역의 요새였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은 유사시에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원 옆에 정착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도원은 변경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은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수도원 주변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 집단들이 성장하여 결국에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 수도사들은 가장 개화된 집단으로서 모든 면에서 가장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발명자이면서 수리자였고, 개척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든지간에 자신들의 주된 임무가 신에 대한 찬양Opus Dei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은 아주 엄격한 규율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엄격한 종교적 질서 속에서 이들은 신에 대한 소명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 하찮은 것이었지만 중세를 지탱한 힘이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파피루스
C.P.티데 / 청림출판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이야기하려면 지루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신약성경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이 대답에 대한 정석적인 이야기는 예수의 사후 시간이 흘러 인간 기억의 고착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마르코, 마태오, 루가의 복음서는 읽어보면 서로 동일한 이야기가 중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중복되어 있는 성서의 기사는 일찍부터 학자들이 이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이들 세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참조한 어떤 텍스트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정의 문서를 Q문서로 불렀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음성서에 관한 일반론이었다.

일견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런 가설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게 된 이유가 옥스포드 대학의 한 도서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 3개 때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기만 하다. 저자의 주장은 복음서가 예수가 죽은 뒤 한참 시간이 흘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 당대에 이미 기록되고 있었다고 본다. 그 증거들의 기록이 이 책의 핵심인 것이다.

복음서의 연대 문제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독일이었다. 그래서 복음서의 연대에 관해서는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사용되고 있는 Q문서란 단어도 독일어의 원천을 뜻하는 Quelle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의 주장은 지금까지 통용되어 왔고 획기적인 새로운 발견이 나오지 않는한 앞으로도 그렇게 통용될 것이다.  세계의 복음서 연구는 독일의 아성에 영미권이 도전하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 두 세력의 경쟁이 복음서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책은 이런 독일적인 사고에 도전장을 내민 영국의 반격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예수 당대에 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파피루스 조각 3개로 추론 한다는 것은 어쩌면 독일적 사고에서 볼 때 만용이라고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사고가 고정관념에 의해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반작용으로 이런 반론이 나온다는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이나 영미권의 성서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가장 최상층에 서로 부정하지 않는 하나의 원칙, <실존했던 예수>라는 것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상이한 주장은 예수의 실존에 관한 유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은 불가에서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는 <돈오>와 <점수>의 토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의 세계에서 해탈을 하기 위해 계속적인 수행인가, 아니면 즉각적인 깨달음인가의 논쟁은 방법론상의 문제일뿐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기사가 예수 당대부터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사후 시간이 흘러 기록되었는가의 문제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물론 독일과 영미권의 성서에 관한 주도권 다툼도 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