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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야
엘리 위젤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78년 4월
평점 :
품절
유대인들에게 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 생활의 기준은 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하루는 해가 떨어지는 일몰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둠이 짙어지면 하루의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관념과 반대로 시작되기에 약간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들이 아침 해를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둠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기에 흑야라고 할 때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밤이 본래의 의미대로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것은 정말로 보람있는 하루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흑야는 안식의 밤이 아니라 고통의 밤이었다는데 모순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이유없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해답은 없다. 그러면서 이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새벽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밤의 안락함이 사라진 새벽의 기상시간. 그것은 삶의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흑야는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참상에서 꿈꿔왔던 온전한 하루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작업장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집합장에 세 마리의 까마귀처럼 세워진 교수대를 보았다. 출석 점호가 있고 친위대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기관총이 겨눠진 가운데 판에 박힌 격식이 진행됐다. 쇠사슬에 묶인 세 제물, 그 가운데 하나는 어린 몸종, 바로 슬픈 눈의 천사였다.
...수용소 소장이 판결문을 읽었다. 모든 이의 눈이 그 아이에게 쏠렸다. 아이는 납빛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깨문 채, 대체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교수대의 그림자가 소년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수용소 간수는 사형 집행관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친위대원 3명이 대신 집행했다.
제물 세 사람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의 목은 똑같은 순간에 올감이에 끼워졌다.
"자유 만세!"
어른 두 사람은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어디 있는가?"
내 뒤에서 어느 누가 물음을 던졌다.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있자, 세 의자가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쫙 끼쳤다. 지평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탈모!"
수용소 소장이 고함을 쳤다. 쉰 목소리였다. 우리는 울고 있었다.
"착모!"
그리고 분열 행군이 시작되었다. 두 어른은 이미 살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늘어진 혀는 부어 오른 채, 푸른 색깔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줄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반시간 이상이나 거기에 그대로 두어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렸고, 우리의 눈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서서히 당하면서 죽어 갔다.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했다. 내가 그 앞을 통과했을 때 소년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붉었고 두 눈도 아직 흐려지지 않았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또 물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느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여기 교수대 위에 목이 매달려 있어...">
이들에게 이렇게 하루는 시작되면서 마감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