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 역사 2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지음, 강운자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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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생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우리들은 그 엄숙함과 정적의 세계를 우선 떠올린다. 왜 수도원은 이런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었을까? 특히 수도생활하면 우리들의 시선은 중세에 머물게 된다. 그만큼 중세는 수도원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수도원과 수도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세의 수도생활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앙의 근거지이면서 기독교 문명의 전파에 가장 앞에선 최전방의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확장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확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수도원이 게르만 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해가면서 게르만족의 개종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은 당시 가장 개화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수도사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쓸 줄 알았다. 그것은 이들이 매일 바쳐야만 하는 기도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읽고 해독할 줄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수도원은 중세 시대 전 기간을 통해 권력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조직이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왕이나 귀족들의 자문이 되어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반적인 모습이 중세의 수도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다가 아니었다. 이들은 중세 시대를 통해 가장 적극적인 개척집단의 하나였다. 수도원은 중세 장원의 체제와 비슷한 자급자족의 체제를 갖춘 구조였다. 그러므로 한 지역에 수도원이 설립되면 수도사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의 거주지와 자급자족의 체계를 갖추어야만 했다. 이 결과 수도사들은 변경 지역의 미 개발지역을 개발하는 주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경제적 자급자족의 체계를 갖추고 정착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 수도원 주변에 이주민 집단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었다. 우선은 신앙적인 문제였다. 이들에게 종교적 전례행위를 베풀 수 있는 곳은 수도원이었다. 그러므로 성직자가 있는 곳에 이주민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의 문제는 방어적인 문제였다. 수도원은 그 자체로 변경지역의 요새였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은 유사시에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원 옆에 정착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도원은 변경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이주민들은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수도원 주변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 집단들이 성장하여 결국에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 수도사들은 가장 개화된 집단으로서 모든 면에서 가장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발명자이면서 수리자였고, 개척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이들은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든지간에 자신들의 주된 임무가 신에 대한 찬양Opus Dei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은 아주 엄격한 규율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엄격한 종교적 질서 속에서 이들은 신에 대한 소명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 하찮은 것이었지만 중세를 지탱한 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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