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장원제 -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 까치글방 197
마르크 블로크 지음, 이기영 옮김 / 까치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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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블로크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 한길사에서 봉건사회라는 책을 출판했을 때였다. 이때 봉건사회보다는 마르크 블로크의 삶이 더 가까이 다가왔었다.

<전통사학에 대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도전한 저자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6월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나 1908년 파리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독일 역사학을 수학함. 1차대전에 종군후 재대. 스트라스브르대학에서 중세사교수로 재직. 1937년에는 소르본대학 경제사 교수로 취임함.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운동의 지도자로 활략 중 게쉬타호에 체포, 처형당함.>

이것이 마르크 블로크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그의 약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는 우리 세대에 용납될 수 있는 학자였고, 투사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었을 때 학자적 양심과 투쟁이 병립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학자적 연구의 길을 걸었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학문의 신성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 블로크를 보면서 학자적 신념이 확고할 수록 사회를 보는 눈 또한 견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양의 봉건제도는 장원제라는 독특한 제도에 의해 형성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장원제라고 할 때 거시적인 면만을 보게된다. 영주의 성이 있고, 그 주변에 드넓은 토지가 3포제로 분할되어 있으며, 냇가에는 방앗간의 수차가 돌고, 성 뒤 편의 산에는 가축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다. 정말 중세 유럽의 장원의 풍경은 이러했을까?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을 읽으면 서양 중세의 장원이 그리 만만치 않았음을 알게된다. 복잡한 신분과 그 신분에 따른 토지의 분할. 그에 따른 재판권의 문제등이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장원제를 분석한 이 책은 서양의 중세를 알기 위해서는 꼭 읽어봐야만 하는 필독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르크 블로크는 이 책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농촌사회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장원의 크기와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신분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상이한 길을 가게된 이유를  설명 혹은 해명하고 있다. 이 책은 부피의 적음에도 불구하고 담고 있는 내용은 중세의 시작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그 방대한 역사적 사실을 저자는 명확하면서도 간략하게 우리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이라는 저자의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중세의 장원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르크 블로크가 말한 '연장된 중세'라는 개념을 생각하게되는데 그것은 중세 유럽이 현대 유럽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 블로크의 '연장된 중세'라는 개념은 프랑스보다는 잉글랜드에 더 적합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3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나타나는 잉글랜드 전원의 풍경은 마르크 블로크가 제시한 연장된 중세의 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경우 중세의 장원이 국왕의 권력이 비대해지면서 축소되어 가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을 만나 완벽하게 붕괴된 반면, 잉글랜드는 그 흔적을 1930년대까지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30년대 작품이 현대적 봉건제도의 유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확대해석한 것일까. 그만큼 유럽의 중세는 시작과 끝의 경계선이 매우 모호하다. 그만큼 유럽세계는 중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중세를 다루고 있지만 마르크 블로크의 지론인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유용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 없이는 과거가 이해될 수 없다"는 논조가 강하게 피력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중세의 봉건제를 자신이 살고 있는 1930년대까지 확장하여 그 의미를 해석하고 속 뜻을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그만큼 과거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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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아시 경의 모험 그리폰 북스 4
랜달 개릿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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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는 추리 소설을 읽으며 더위와 끈끈함을 물리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래서 추리 소설 하나...

신의 은총에 연원한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의 영주,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공작, 앙주의 백작인 존은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백작, 봉신, 재판관, 삼림관, 주장관, 집사, 종복, 그리고 모든 대관 및 충성스러운 인민에게 인사를 드린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존 4세 폐하, 신의 은총에 의해, 잉그랜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뉴 잉글랜드 및 뉴 프랑스의 국왕, 황제, 신앙의 수호자, ... <다아시경의 모험 가운데 두 눈은 보았다 중에서>

위의 두 문장은 잉글랜드의 국왕을 소개하는 통상적인 문구이다. 장황한 수식어 가운데서 느껴지는 그 유사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 소설은 12세기에 창건된 프란타지넷트 왕가가 800년 동안 존속한다는 가정하에서 씌어진 대체 역사추리소설이기 때문이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잉글랜드 왕실에서 존이란 이름은 그리 선호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워드나 윌리엄과 같은 이름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만큼 존 이란 이름은 왕의 외형을 나타내는데 유약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는 존 4세라는 칭호에서 보듯 그 무능의 역사를 극복하려는 어떤 의지가 보이는듯 하다.

이 대체 역사 소설을 읽으려면 플란타지넷트 왕가의 근원과 중세시대 그들이 차지했던 영토를 알게 된다면 읽는 재미가 한층 더할 것이다.  중세 시절 잉글랜드는 존 왕의 치세 시절 영토가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토만으로 따진다면 플란타지넷트 왕가는 유럽 최강이었다. 하지만 존 왕이 죽었을 무렵 영토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축소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북아메리카와 캐나다를 차지한 방대한 제국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무의식적인 관념은 이차세계대전을 통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미국의 동맹으로 그 유사한 모습이 드러났었다는 점이다. 그 결합된 제국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위대한 앙쥬제국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저자는 이 소설에서 러시아 대신 폴란드를 앙쥬제국에 대항하는 동쪽의 지배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중세를 통해 폴란드는 위대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왕국은 도이칠란트와 러시아의 협공으로 그 위대성에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위대성이 지속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즉 유럽은 노르만-플란타지넷트 왕가, 아직껏 분열되어 있는 게르만, 동방의 폴란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계는 랜달 게럿이 바라보는 세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앵글로-색슨들이 그랬으면 하는 세계관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묘하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이유는 그 중세적인 현대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연장된 중세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대 속의 중세, 혹은 중세 속의 현대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마술과 문명의 이기가 적당하게 뒤섞인 안개가 자욱하고 습기가 많은 앙쥬제국의 모습은 범죄영화에서 슬쩍 보여주는 검시실의 해부되기 직전의 시신처럼 우리의 호기심을 한껏 부풀린다. 그리고 그 부풀림은...

이 책은 렌 데이튼Len Deighton의 SS-GB:Nazi-Occupied Britain 1941과 함께 대체역사소설의 묘미를 한껏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렌 데이튼이 현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랜달 게럿은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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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통론
육종달 지음, 김근 옮김 / 계명대학교출판부 / 198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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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정말로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문자라 할 수 있다. 인쇄체와 필기체만 있는 여타의 문자에 비해 무려 5가지의 서체가 존재한다. 그 서체 각각은 또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는 하나의 글자에 무려 5가지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자는 그 글자의 회화성으로 인해 그림과도 연결되어 있다. 전각이나 서예를 조금만 관심있게 살펴보면 글자와 그림의 세계가 어떻게 통교할 수 있는지를 알게된다.

이 책은 說文과 解字에 관한 책이다. 설문해자는 여러가지 설에서 하나를 구하는 것由多求一이면서 하나로부터 많은 것을 찾아내는以一御多 전통적인 경학의 정신을 구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저자-역자가 아닌-는 설문해자를 고대 한어와 현대 한어소통하게하는 계단으로 보고있다. 왜냐하면 설문은 중국 언어학사상 字形을 분석하고 字義를 해설하고 聲讀을 가려 놓은 최초의 字典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글과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문명권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사용하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때 문화의 이해는 한층 깊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설문해자를 이해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젠가 한. 중. 일 삼국의 전각을 본 적이 있다. 그 세 나라는 한자라는 공통의 재료를 가지고 각기 다른 의미의 우주를 방촌의 세계에 창조하였다. 그 차이는 민족의 기질만큼이나 판이하게 달랐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중국은 60년대부터 간자화를 행함으로서 스스로 한자의 유려한 매력을 포기하였다. 그 이유는 정자가 배우기 힘들고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간자는 매우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그 간자 자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한문의 草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중국은 해서를 포기하고 초서를 선택하였다는 결론인 셈이다. 그럼에도 해서와 초서 사이에 징검다리는 없다는 점이다. 하나의 같은 글씨가 서체를 지나오면서 별개의 형태로 변해가는 모습은 중국 문명과 역사의 모습처럼 변화무쌍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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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사신화
J. F. 비얼레인 지음, 현준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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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콩쥐 팥쥐>와 <신데렐라>를 읽은 사람들은 한국과 프랑스라는 지리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이렇게 유사한 이야기가 생겨났을까하는 의문을 한번쯤은 가졌을 법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번잡한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공통의 인류라는 유전자의 어떤 작용이 아니었을까하는 객적은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컬럼버스시대에 어떤 질병이 전 세계에 퍼지기 위해서는 대략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24시간 이내에 어떠한 질병이라도 퍼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만큼 세상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저작권 때문인지 이런 사고의 유사성은 옛날만큼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보다 훨씬 제반 조건이 나빴던 고대에 이런 유사 신화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오히려 문화가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고대의 세계는 넓은 공간과 시간의 장벽이 있었음에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의 제한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사고 영역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도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 현대의 세계에서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뚜렷하게 양분된다. 아직고 고대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집단이 있는가하면 최첨단 과학의 세례를 통해서 자연현상이란 하나의 말 그대로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두 집단 간에는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에는 유사신화가 기껏해야 도시의 신화형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의미심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사람들이 공유했던 감정이 유사신화에 반영되는 것이라면 현대의 도시의 신화는 현대인들이 공유하는 어떤 문화적 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의 신화는 자연현상에 대하여 많은 부분이 할애되지만 현대의 도시의 신화는 문명의 이기에 많은 부분이 대입된다. 예를 들어 고대에는 번개, 불, 천둥, 비, 바람, 큰 나무, 돌과 같은 것이라면 현대는 자동차, 고속도로, 빌라, 전자레인지와 같은 것에 사고의 공유가 대입된다.

만약 인간이 이기심이란 유전자를 완벽하게 제어한다고 가정하여 앞으로 몇 만년을 더 살게된다면 아마도 지금의 도시의 신화는 그 몇 만년 후에 하나의 신화로 연구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런 넋두리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완벽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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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 - 지도에 없는 나라로 떠나는 여행 안내서
산토 실로로 지음, 전지나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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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문화라는 것이 경제적인 척도로 이야기되는 것이라면 특히 그렇다. 이 책은 경제적인 면에서 이런 점을 완벽하게 말하고 있다. 사실 미국적인 삶은 이 세계의 어떤 나라도 따라갈 수는 없다. 광대한 땅과 높은 경제력은 그들의 삶을 그 어떤 국가들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곳곳에는 글쓴이들의 미국적 풍요로움이 여유롭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런 풍요로움은 텔레비전에서 일상적으로 천박하게 묘사되는 어떤 장면을 연상시킨다. 동남아시아 혹은 아프리카 문화탐방이라는 미명하에 문화적 밑바탕없이 무작정 달려가 문화는 탐방하지 않고 문화비하를 일삼는 그런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몰바니아라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어 그 가상의 나라를 통해 자신들이 바라보는 제3세계의 모습을 혹은 동구제국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심각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곧잘 부메랑이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무심코 웃고 즐기는 가운데  Chikoja(중국+한국+일본을 혼합한 가상의 나라)라는 나라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때 우리들은 이런 종류의 책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을까. 아마도 대답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실 웃자고 만든 책에 대해서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했지만 책의 쪽수를 넘기면 넘길 수록 웃음이 사라지고 지루한 생각이 들었다면 새 책에 대한 실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각의 불변이 너무나 거스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래 전에 김승옥 선생의 <霧津紀行>과 황석영 씨의 <三浦로 가는 길>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두 지명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었다. 하지만 이 지명은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지명이었다. 그래서 해남과 강진 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꼭 그 중간 어딘 가에 霧津이라는 지명이 나타날것만 같아 빠르게 지나치는 표지판을 뒤돌아보며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삼포 역시 그런 지명이었다. 무작정 경부선을 타고 한없이 내려가다 보면 그 열차역의 끝 언저리쯤에 한적한 그러나 한창 개발중인 마을이 나타나면 그곳이 삼포처럼 느껴지는 그런 지명이다. 그래서 나는 三浦와 霧津이 실제한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하지만 몰바니아란 지명에는 그런 느낌보다는 가상의 냄새만이 진하게 풍길 뿐이다. 몰바니아의 전체 지도를 보면 마치 해체되기 전의 러시아를 축소해 놓은듯하고, 이야기를 읽다보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와 터어키, 약간의 아랍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런 가상의 국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실감보다는 비하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라는 제목처럼 우리들은 몰바니아로 갈 수 있을까?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몰바니아는 재치만 있을 뿐 <霧津>과 <三浦>처럼 인간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재미가 이 책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배부른 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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