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물지 - 서양 중세의 동물 상징
작가미상, 주나미 옮김 / 오롯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세의 박물학자 알드로반디Ulisse Aldrovandi는 '뱀과 용의 역사'를 썼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뱀은 그렇다치고 용에 대해 썼다는 것은 현대의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용에 대해 알고 썼던 것일까?  이 책에서 용을 기술한 내용을 보면 당시에 용이 실재했다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는 중세의 알드로반디 보다 뱀과 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은 이들이 우리에게 주입했던 데자뷰가 아닌지.

중세의 동물지는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중세인들이 생각했던 주변의 동물들이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주변의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결코 부족한 것은 아니다. 

중세인들은 동물을 볼 때 생물학적인 모습을 본것이 아니다. 그 형상 이면에 새겨진 상징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우리들이 생물을 볼 때 보는 시각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동물의 구분을 과학적인 체계 속에서 이해한다. 종, 속, 강, 아, 목같은 분류단계뿐 아니라 해부학적인 동물의 특성과 몸의 형태에 나타난 기능을 통해 그 동물의 과학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동물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생물을 바라볼 때의 관점은 이중적이다. 해부학적으로 볼 때 기능을 이해는 하지만 그 행동의 본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동물을 소개하면서 중세의 가장 중심적인 해석인 어원론을 가지고 해석한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까치pice는 시인poetice와 연관시켜 해설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방식은 현대의 과학적 방식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조용히 관조하며 바라보면 또 다른 동물의 모습을 보게된다. 

동물을 통해 중세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혹은 상징을 우리도 공유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동물이 있지만 우리가 접하는 동물은 일생을 통해 몇 종류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주 많은 동물의 이름과 형태를 알고 있다. 왜?

우리는 인간을 동물과 자주 비유한다. 개, 여우, 늑대, 뱀, 곰 등등. 왜 우리는 이렇게 동물과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근동 문화 - B.C 3,000년경~ B.C 323년 CLC 고대 역사 시리즈
알프레드 J.허트 외 2인 편집, 신득일.김백석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동近東이라는 단어는 모호함을 가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단어가 중동中東이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면서 아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중동이라고 할 때는 왠지모르게 혼란을 떠올린다. 폭탄과 테러, 혼미한 정치와 같은 그런것... 하지만 근동이라고 할때면 극동極東을 떠올리게 된다. 극동이야 서양의 대척점이기에 이해가 되지만 근동은 동양과 어느정도 가까운 것일까? 오히려 근동은 서양에 가까운 그런 용어가 아닐까?

이 책은 매우 그리스도교적인 책이다. 여기서 취급하는 주제는 모두 성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이 지역의 민족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메르인으로 시작하여 이집트인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의 내용은 신학적이면서 고고학적이고 그러면서 인문학적이다. 

특히 여기서 암몬, 모압, 에돔과 같은 성경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종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를 담은 내용은 정말로 귀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트란스 요르단이다. 특히 트란스 요르단의 경우는 재미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아주 희귀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근동이나 중동이라고 하면 언제나 중심에 이스라엘을 놓고 주변을 바라본다. 하지만 역사에서 이스라엘도 이 지역의 주변인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 신화 속에서 이스라엘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동등한 소유자인 다른 민족들을 소흘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란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냉정하면서 한계를 지니는 해석과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역사의 패배자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졌던 민족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내어 가장 오래된 문헌이 구약성경 속의 내용과 고고학적 내용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중심의 성경의 역사가 이 주변 지역의 역사를 얼마나 오염(?) 시켰는지 알게된다. 사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였다. 그럼에도 종교적 역사관인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지역의 승리자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편협된 시각을 이 책은 어느 정도 해소시켜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676 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2년 8월 24일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방되면서 끊어졌던 중국과 외교가 재개되었다. 중국공산당이 한국과 수교를 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문화부분은 '공자 문묘제'였다. 중공은 외교가 재개되기 전부터 공자 문묘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공은 문화혁명으로 자신들이 가졌던 거의 대부분의 문화재를 스스로 파괴하였다. 중국인들이 중국의 알찬 문화재는 대만에 있고 건물은 중국에 있다고 했지만, 스스로 중국에 존재하던 건물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이 결과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존재감에 대한 큰 의문이 재기되었다. 자신들이 중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유산의 지킴도 큰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킬 유산도 유물도 없었다. 

이 결과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공자에 대한 재해석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문화혁명 말기에 임표를 비판하면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실시하면서 곡부에 있던 공자의 모든 유산을 말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를 복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의 성균관에서 공자 문묘제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이후 중공당국은 한국에 끊임없이 시찰단을 보내 공자 문묘제를 완벽하게 베껴갔다. 그리고 곡부에서 한국에서 배워간 문묘제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진정한 중국의 유산이라고 자랑하였다. 

문화혁명은 한 독재자의 말년에 발동한 추잡한 권력욕이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를 지휘하여 중공을 건국했던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당독재를 완벽하게 건설하였다. 제자백가들에 의해 사상이 만개했던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빨간 표지의 '모어록毛語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완벽하게 개조되었다. 삼강오륜이나 백가쟁명은 반당적인 것이 되었다. 오직 모택동에 대한 충성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일당독재는 다양성의 훼손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상력도 마비시키며 국가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을 통해 공산주의보다 더 완벽하게 개인주의를 완성시켰고 일당독재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런 혁명이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중국공산당은 영속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는 그 자신의 영속성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무시하였다. 그는 히틀러처럼 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국가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히틀러는 독일을 적들에게 넘겨주기 보다는 완벽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겁장이들은 온전한 조국을 갖을 권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그것은 광기였으며 파괴였다. 모택동 역시 히틀러와 같은 선상에서 중국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그가 죽으면서 중국인들은 원치않게 어버이를 잃은 자식들이 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한 사람의 광기가 12억의 인민들을 미래가 없는 현재만을 추구하는 추잡한 인간들로 만든 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인의 아편 삼육교양총서 3
레이몽 아롱 지음, 안병욱 옮김 / 삼육출판사 / 198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인 레이몽 아롱은 프랑스 현대사에 대표적인 우파 논객이며 좌파의 대표적 논객인 사르트르와의 이념 논쟁은 논쟁의 격이라는 것을 생각하게하는 격조 높은 것이었다. 같은 고등사범학교 동기이며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두 사람은 1950년 한국의 6.25를 계기로 등을 돌리게 된다. 사르트르는 6.25가 북침이었다는 프랑스 공산당의 논조-이는 소련의 주장이었다-를 여과없이 받아들여 주장했는데, 레이몽 아롱은 직접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하여 전쟁의 실상을 보고 르 피가로지에 한국전쟁은 명백한 '남침'이라고 북한을 규탄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사르트르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알제리 사태 이후 프랑스 사회는 좌파로 경도되기 시작했고 19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으로 우파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우파는 미국의 앞잡이 정도로 치부되고 좌파는 정의의 선두에 선 선구자와 같은 의미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레이몽 아롱은 장 폴 사르트르의 좌파적 시각을 비판하였다. 

레이몽 아롱은 좌파에 대한 비판을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정확한 사상과 철학을 기반으로 사회의 흐름을 읽으며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왜 좌파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위선적인지도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그의 이런 논조는 좌경화된 프랑스 사회-언론과 정치-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80년 장 폴 사르트르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 언론은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내고 그와 동거를 한 시몬 드 보브와르를 인터뷰하는 등 좌파 영웅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다. 

반면 1983년 레이몽 아롱이 사망했을 때 프랑스 언론은 차분한 가운데 그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레이몽 아롱이 진정한 우파의 지식인인 것은 그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침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부터 시작하여 1968년 5월의 학생혁명에 이르는 길과 그 이후 프랑소와 미테랑 정권이 집권하여 좌파 영광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에 까지 많은 우파의 지식인들은 '아롱과 함께 옳은 것보다는 샤르트르와 함께 실수하는 것이 낫다'는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이다. 

이 책은 1955년 출간하고 1962년 개정증보판을 냈는데 이 책 출간 이후 아롱과 사르트르는 서로 사상적 결별을 하였던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지금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좌파의 모든 것을 거론하고 있다. 부르조아 좌파, 내로남불과 같은 좌파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의했다면 레이몽 아롱은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정의했고 그 내용의 세부적인 내용을 이 책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의 양쪽 날개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보기드물게 체계적으로 기술된 우파의 주장인 이 책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사족: 2020년 10월 17일 사르트르가 창간한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은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 슬프도다!”라고 1면 머리 특호활자로 크게 보도함으로써 사르트르 진보사상의 패배를 선언했다. 이는 21세기 프랑스가 좌우사상투쟁을 종결하고 아롱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통합됨을 뜻한다. 이것이 마크롱이 좌우중도의 대통합 정당으로 2017년 5월 대선에서 승리한 배경이다.

“...분열의 원인은 하나다. 소련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친구나 동지, 형제간에도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부정하지 않았다. 카뮈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프랑코의 악을 공격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최후의 단계에서 카뮈는 서방진영을 선택하고, 사르트르는 공산진영을 선택한 사실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돼지에게 살해된 왕 - 프랑스 상징의 기원이 된 불명예스러운 죽음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세기 유럽에서는 중요한 일이 2가지 발생하였다. 하나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영국 점령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 운동이었다. 이것에 가려져 앞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계급이 프랑스에서 나타나는 것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계급은 성벽bourg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이란 뜻의 부르조아bourgeois이다.

몸이 뚱뚱해서 비만왕이라 불린 루이 6세는 호색과 식도락에 탐닉한 왕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먹는 것 때문에 죽을 것'이란 비아냥대로 56세의 나이에 비만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27세의 나이에 부왕 필리프 1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9년간의 제위에 있으면서 루이 6세는 대수도원장 쉬제의 도움을 받아 국왕 직할 도시와 주교 관할 도시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고 왕권이 지방 권력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노력하였다.

루이 6세의 이런 노력은 프랑스 왕국을 안정되게 하였으며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또한 순탄하였다. 게다가 두 번의 결혼으로 3명의 딸과 7명의 아들을 얻어 왕국의 후사 또한 걱정이 없었다. 루이 6세는 장남인 필리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 왕국을 통치하게 하려 하였다. 카페 왕가 초기에는 왕권이 취약하여 부친이 왕이 되면 후계자를 왕으로 임명하여 공동통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관습은 거의 2백 년 가까이 계승되다 필리프 2세 때 사라졌다. 루이 6세 또한 이런 관례에 따라 장남 필리프를 4살의 나이에 '예정된 왕'으로 삼고 9년 뒤에 랭스에서 정식으로 대관을 함으로써 젊은 왕 필리프로 알려지게 된다.

젊은 왕 필리프의 이름은 루이 6세의 부친 필리프 1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젊은 왕 필리프의 할아버지인 필리프 1세는 모친이 키에프 공국의 안나였다. 키에프의 안나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필리프라고 지었는데 이는 사도 필립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필리포스 2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런 동방식 이름은 카페 왕가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그 전까지는 로베르, 앙리, 외드, 위그, 라울과 같은 이름이 주를 이루었다. 

루이6세는 이렇게 동방의 영웅의 이름을 가진 자신의 부친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다. 수도원장이자 왕의 고문이었던 쉬제 역시 새로운 젊은 왕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왕 필리프는 15살이 되던 해에 사냥터에서 돌아오다 불의의 사고-민가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돼지 때문에 말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필리프가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예정된 왕위후보자의 죽음은 루이 6세와 쉬제가 공들여 왔던 왕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젊은 왕 필리프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동생인 루이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대기에 보면 젊은 왕 필리프의 동생인 루이-후일 루이7-는 부친과 쉬제의 도움으로 성직에 입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성직자의 재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루이는 수도원에서 성직자의 길을 걷다가 형인 젊은 왕 필리프가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수도승 지망생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고 하자 프랑스 백성들과 귀족들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왕위 계승자가 된 루이는 부친의 뜻에 따라 아퀴텐의 알리에노르와 결혼을 하여 프랑스의 영토를 배로 늘리는데 기여하지만 수도자같은 루이의 성향은 여장부였던 알리에노르와 맞지 않았다. 결국 루이와 알리에노르의 이혼은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에 큰 분쟁의 씨앗을 남겨놓게 된다.

문제는 왕위 계승이 아니라 필리프의 죽음이었다. 백성들은 필리프가 하찮은 돼지에 의해 죽었다는 점을 불길하게 생각하였다. 젊은 왕의 죽음은 귀족의 가치에 맞지 않은 불명예스런 죽음이었던 것이다. 전쟁도 아니고 사냥터도 아닌 백주에 길가에서 뛰쳐나온 돼지에게 죽었다는 것은 신의 징벌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백성들의 심적 동요는 왕조의 미래에도 불길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프랑스의 역사는 불행한 일이 계속 발생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프랑스는 강력한 상징과 화려한 대관식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하였다. 불운하게 죽은 필리프가 신의 징벌이었다면 그것을 상쇄할 새로운 종교적 상징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였다. 테오토코스-하느님의 모친-인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 왕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왕실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흰 백합을 차용하여 왕실 문장을 만들고, 천상의 색이면서 성모님의 상징색인 파란색을 자신들의 왕실색으로 삼았다. 이런 왕국의 노력은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로 구현되고 프랑스 왕국은 성모에게 봉헌되어 교회의 맏딸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중앙집권 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아마도 프랑스는 역사적 위기를 상징을 통해 극복한 예일 것이다. 이런 역사의 반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나치의 침공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부정했던 교회와 성자들과 대지의 어머니 러시아라는 공식을 통해 극복한 것의 선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