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676 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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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24일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방되면서 끊어졌던 중국과 외교가 재개되었다. 중국공산당이 한국과 수교를 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문화부분은 '공자 문묘제'였다. 중공은 외교가 재개되기 전부터 공자 문묘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공은 문화혁명으로 자신들이 가졌던 거의 대부분의 문화재를 스스로 파괴하였다. 중국인들이 중국의 알찬 문화재는 대만에 있고 건물은 중국에 있다고 했지만, 스스로 중국에 존재하던 건물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이 결과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존재감에 대한 큰 의문이 재기되었다. 자신들이 중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유산의 지킴도 큰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킬 유산도 유물도 없었다. 

이 결과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공자에 대한 재해석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문화혁명 말기에 임표를 비판하면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실시하면서 곡부에 있던 공자의 모든 유산을 말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를 복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의 성균관에서 공자 문묘제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이후 중공당국은 한국에 끊임없이 시찰단을 보내 공자 문묘제를 완벽하게 베껴갔다. 그리고 곡부에서 한국에서 배워간 문묘제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진정한 중국의 유산이라고 자랑하였다. 

문화혁명은 한 독재자의 말년에 발동한 추잡한 권력욕이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를 지휘하여 중공을 건국했던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당독재를 완벽하게 건설하였다. 제자백가들에 의해 사상이 만개했던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빨간 표지의 '모어록毛語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완벽하게 개조되었다. 삼강오륜이나 백가쟁명은 반당적인 것이 되었다. 오직 모택동에 대한 충성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일당독재는 다양성의 훼손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상력도 마비시키며 국가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을 통해 공산주의보다 더 완벽하게 개인주의를 완성시켰고 일당독재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이런 혁명이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중국공산당은 영속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는 그 자신의 영속성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무시하였다. 그는 히틀러처럼 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국가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히틀러는 독일을 적들에게 넘겨주기 보다는 완벽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겁장이들은 온전한 조국을 갖을 권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그것은 광기였으며 파괴였다. 모택동 역시 히틀러와 같은 선상에서 중국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그가 죽으면서 중국인들은 원치않게 어버이를 잃은 자식들이 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한 사람의 광기가 12억의 인민들을 미래가 없는 현재만을 추구하는 추잡한 인간들로 만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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