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하층민
임웅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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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로마의 하층민은 검투사, 매춘부, 도시 빈민, 소작인이다. 저자는 역사의 주체로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계층을 택하였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서 영웅사관적인 서술방식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저자는 대중의 역사적 역할에 대하여, 역사의 주체에 대하여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면서 하층민을 통해 한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대체로 로마의 어두운 면이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역사의 다수이면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검투사, 매춘부, 도시 빈민, 소작인등은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이행하면서 근간을 이루던 평민계급이 세분화되면서 힘을 잃어간다. 대신 귀족계급들은 부와 권력의 집중을 통해 이전보다 더욱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된다. 이런 계층간의 불균형을 로마제국은 현대의 3S 정책(sport, sex, screen)과 유사한 빵과 오락으로 덧칠을 해 버렸다. 제국의 이런 정책은 얼마나 철저했는지 로마의 경우 기근이 엄습해도 굶주림은 없을 정도로 빵의 공급에 최선을 기울였다. 그리고 원형경기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오락은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였다.

 

로마제국의 하층민은 제국의 일원이면서 어느 순간 제국의 열외자로 전락하였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확장이 멈춘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로마제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이들 하층민은 제국의 위정자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들은 제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요긴한 존재들이었다. 역사에서 보듯 하층민은 착취와 억압에 익숙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하층민의 역사적 사실을 읽어가면서 느끼는 점은 역사의 유산을 상속받아 전달하는 것 역시 하층민 또는 대중의 역할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도시 빈민과 소작인의 이야기를 통해 유럽 중세의 원초적인 모습을 본다거나 검투사와 매춘부를 통해 중세의 소외계층을 미리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왕조와 시간은 흘러가지만 대지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들 계층은 역사의 전달자 혹은 보존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의 가장 평범한 편식문제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 편식을 통해 조장되는 왜곡은 역사의 진면목을 파악하는데 계륵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획득한 지식의 질과 양에 상관없이 폐기하기를 주저한다. 이 결과 편식에 의해 고형화 된 역사의 지식을 버릴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처지가 될 때 역사의 왜곡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은 로마의 화려함과 장려함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외형의 장중함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읽으면서 왜 초세기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은 로마를 창녀, 위선자, 바빌론과 같은 혐오스런 이름으로 불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교부들이 볼 때 로마는 인간의 평등성보다는 불평등성이 사랑보다는 허위가 관용보다는 잔인함이 넘치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부들은 이런 인간과 도시의 타락을 종교적 사랑으로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는 일정부분 성공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시의 문제는 지금도 계속 유효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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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 3 : 유대 전쟁사 - 예루살렘 함락사
요세푸스 지음, 김지찬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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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가 살아있을 때 역사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세인의 합의가 공인하는 민간 유포본vulgata'이었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합의에 의해 진실이 승인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들이 냉소적으로 말하는 '승자의 역사'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역사는 '전통이 존재하고 전통은 진실이다'라는 식의 기술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즉 이것은 전통은 항상 권위있는 것이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인 요세푸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가장 칭송할 만한 역사가는 후대에 사용되도록 자기 시대의 이야기를 엮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는 성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그의 유대 전쟁사는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주 인용된다는 것과 엄정한 역사서라는 것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사를 기술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은인이었던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위한 것이면서 자신을 위한 변명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갈릴리 지역의 요타파타란 요새를 방어하는 반란군측의 지도자였다. 그는 요타파타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40여일 이상  막아냈던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런 그가 엘리아스 카네티가 언급한 '살아남는 자'의 대열에 끼기 위하여 비열한 술수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물론 유대 전쟁사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부분의 이야기는 아주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가 되자 곧바로 변신하였다. 그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것이란 예언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역사가 돌아가자 그의 발목에 채워졌던 쇠사슬도 제거되었고, 그는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유대전쟁사 7권을 기록하기 위해 유대인의 역사 20권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사실 요세푸스의 27권에 기록된 유대사의 핵심은 7권으로 이루어진 유대 전쟁사이다. 그는 이 7권을 저술하기 위해 20권(이 방대한 책의 내용은 구약과 거의 일치한다)을 저술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배반이 유대인 사회에서 어떻게 비춰질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과 유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역사서를 저술했지만 유대인 사회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만큼 그의 저술은 어찌보면 속이 보이는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유대 전쟁사 7권은 약간의 진실성 문제를 제외한다면 당시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유대 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수세기 동안 사제 계급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성전 국가였다. 사제들과 이들을 도와주는 토라를 훈련받은 서기관들이 유대 공동체에 율법과 헌법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게다가 이들이 유대 사회의 유일한 지식층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은 방어적이면서 타협적이었지만 반대편의 민중들은 급진적이면서 공격적이었다. 당시 기층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아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즉 민중들은 자신들을 고통으로 부터 구해줄 메시아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반면 지배 계급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를 무시하였다. 설사 메시아 사상을 지배층이 용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민중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혁명적인 모습이었던데 반해 지배층의 메시아는 자신들이 만든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개혁의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유대 전쟁사는 유대인과 로마와의 전쟁이었지만 유대인끼리의 투쟁이 더 치열했다는 특징이 있다. 사제계급, 열심당인 젤로트, 급진적인 집단과 결합한 민중세력 들간의 투쟁은 마치 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분열양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간의 다툼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와중에도 성 안에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파벌들간의 대립과 살상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요세푸스는 이들 반란자들을 일괄해서 도적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로마의 질서 속에 자신을 의탁하는 순간부터 짊어져야했던 약점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로마와의 전쟁을 3년여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민중들이 '혁명적 변화'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혁명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유대인들의 추방이었다. 그리고 유대지방으로 불리우던 이 지역은 팔레스티나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로마가 자신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한 민족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징벌이었다. 그러면서 로마는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것을 남겨 놓았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자가 조국과 민족을 변호하기 위해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러니는 당시에 진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하는 한에 있어 그 역사는 진실이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다수이고, 앞으로도 수백년간 진실로 통할 거대한 제국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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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산책 한길 히스토리아 9
아베 긴야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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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아베긴야阿部謹也는 유럽중세를 산책하면서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명제이다. 자연과 물질에 의해 규정되는 대우주와 이성과 감정에 의해 구성된 소우주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아베긴야는 중세유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세 유럽을 조사하다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프랑스적인 중세, 잉글랜드적인 중세, 그리고 독일적인 중세가 그것이다. 이들 세 종류(?)의 중세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아주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인, 독일인, 잉글랜드인의 민족성에 대한 농담처럼 간격이 큼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유럽의 중세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절대왕권을 추구한 프랑스의 시각으로 바라본 유럽의 중세, 의회정치로 나아간 잉글랜드의 시점으로 바라본 중세 유럽,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가공의 제국을 통치한 독일의 눈으로 바라본 중세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베긴야가 우리를 인도하는 산책로는 독일의 길이란 점이다. 앙드레 모로아는 독일의 역사를 '한번도 확정된 국경이나 고정된 중심지를 가진 적이 없고, 떠돌이 부족들이 경계가 불확실한 주변 지역을 유랑하였고, 어떤 때는 이탈리아 지역이 광대한 신성로마제국에 포함되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 및 스위스와 나란히 독일 지도에 오르기도 하였다. 스페인이 상당 기간 게르만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를 그들의 국왕으로 섬기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만큼 독일의 역사는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영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제국,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역사는 각각의 상이한 길을 걸어오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독일역사와 섞인다는 점이다. 그만큼 독일의 역사는 복잡한 얼개 속에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독일을 통해 중세 유럽을 산책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체 유럽을 조망하는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중세의 산책로를 통해 바라보는 중세는 주마간산식의 조급한 산책이 될수도 있고, 느긋한 마음으로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걸어가는 산책이 될 수도 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독일을 중심으로 서술한 산책 안내책이라면 중세의 신비주의-피오레의 요아킴, 빙겐의 힐데가르트,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등등-에 대해서도 할애를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중세 유럽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베긴야의 산책로는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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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3부작
아이자크 도이처 지음, 김종철 옮김 / 필맥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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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도이처는 트로츠키에 관한 저서를 세 권 썼다. 첫번째가 '트로츠키, 무장한 예언자(1954)' . 두번째가 ' 트로츠키, 비무장의 예언자(1959)' 그리고 세번째가 '트로츠키, 추방당한 예언자(1962)'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가 본 번역서이다.

사실 트로츠키만큼 많이 언급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혁명가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스탈린은 승리자, 트로츠키는 패배자라는 등식이 주는 무의식적 반응인지도 모른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인민의 적', '배신자'라는 공식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러시아의 공산당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었다. 즉 레닌의 사후  후계자로 각광을 받던 그가 스탈린의 기습에 의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그의 모든 공적은 러시아 공산당 역사에서 삭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승리자인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여기에는 당시 찍혔던 사진과 그림의 왜곡도 포함된다-함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이후 공산당에서 트로츠키주의자란 인민의 적이며 배반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의 역할을 차지하고서라도 트로츠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러시아 혁명의 많은 부분을 알 수 없게 된다. 트로츠키가 숙청당한 이후 트로츠키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스탈린이 위치하게되면서 스탈린이 혁명의 구세주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트로츠키가 赤軍으로 불리우는 소비에트 군대를 조직하는데 성공함으로서 러시아혁명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권력의 힘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트로츠키의 이런 시도가 좌절되었거나 실패하였다면 러시아혁명의 역사는 처음부터 다시 기술되어야 할지 모른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반대하여 '영구혁명론'을 주장하였다. 즉 전세계의 모든 프로레타리아들이 결속하여 전세계 프로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적어도 결정적 생산력을 집중할 때까지 혁명을 영속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의 이런 논리는 일국사회주의혁명론을 주장한 스탈린과 대립하게 된다. 물론 그의 영구혁명론에도 비판의 근거는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혁명을 공산당에 의한 단독정권 확보와 중앙집권적 국유화, 계획경제의 수립 수준이 아니라 가족관계와 도덕 및 습관혁명으로까지 심화시키려한 과정은 의미있게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사실 초기 러시아 혁명이 서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회주의혁명의 미래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 서구의 지식인들이 스탈린 일당독재가 확립된 이후 러시아를 방문한 뒤에 혁명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트로츠키의 이런 미래적인 이론은 이후 빛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소련 공산당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로마 가톨릭이 이단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자기 쇄신을 거듭함으로서 종교로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라 하겠다.

사실 트로츠키를 사회주의자, 혹은 실패한 좌파로 본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가 실현하려고 한 사회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약간의 고민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는 혁명의 완결로 착취와 억압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꾼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의 이런 이상은 스탈린을 필두로한 현실적 권력주의자들의 눈에는 웃기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이상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미래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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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 피와 광기의 세계사
콜린 윌슨 지음, 황종호 옮김 / 하서출판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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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homini lupus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의미인데 이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잔혹함에도 그대로 들어맞을듯한 경구라 하겠다.

수천년 동안 인간은 악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정확한 답변을 얻어내려 노력하였다. 악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이 원래 악하기 때문인지 혹은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오염되는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정당함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콜린 윌슨은 이러한 인간의 대립에 자신만의 답을 제시하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그래서 콜린 윌슨은 '아이에게 권력을 맡기면 그 아이는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의 폭력에 접근하고 있다. 그에게 폭력이란 본성이나 사회적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 이외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생각을 하지 못하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몰입하는 완전한 주관주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콜린 윌슨은 '아이와 같은 어른'의 모습에서 범죄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콜린 윌슨은 이와는 다른 형태의 범죄와 폭력인 종교적 분쟁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평형감각의 상실'이라는 화두로 접근하고 있다. 즉 독선적인 대의명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은 종교적 실상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콜린 윌슨은 인간의 파괴본능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범죄 유형이 어떻게 변해오는가도 함께 고찰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폭력이나 범죄는 생계형 폭력 혹은 범죄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이런 인간의 기본욕구를 채워주는 범죄에서 부조리한 범죄로 이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른반 동기없는 범죄가 그것인데 이 범죄나 폭력의 특징은 극히 잔인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얼마전에 이라크의 아브그라이브에서 벌어진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잔학행위를 기억하고 있다. 옷을 벗겨 성적수치심을 유발시키고, 개를 이용하여 수용자를 겁에 질리게하는 범죄의 현장에 등장하는 조연들의 표정을 보았는가? 거기에는 항상 웃음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어느새 범죄를 죄의식을 느끼는 단계를 지나 즐기는 단계로 진화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며칠전 신문에서 사북사태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사북사태를 웅변적으로 전해주는 한 장의 사진을 담고 있었다. 한 여인이 전기줄에 묶여 기둥에 묶여있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둘러 싸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묶여있는 여인의 오른쪽에 한 여인이 묶여있는 여자의 벗겨진 바지를 추스려주는 모습이 잡혀있다. 이 모습은 집단의 폭력성과 한 여인의 무기력함에 대한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서 조차  인간의 치부를 한치만이라도 가려주려 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있는한 인간은 인간에 대한 폭력에 얼마든지 대항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오래 전에 읽었던 폭력을 기억하며 이 사진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로 다가올 수 있다면 천사로도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단순한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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