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디트 - 의적의 역사
에릭 홉스봄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의적義賊이란 단어는 아주 애매모호한 의미를 풍긴다. 옳을 의와 도적 적이 결합되었는데 이것은  아주 기분나쁘게 들린다. 어떻게 옳음과 도적이 같이 결합되어 있을 수 있는가? 마치 거룩한 창녀, 타락한 성녀와 같은 언어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의 조합은 철학적으로는 불가당이겠지만 종교적 혹은 현실적으로는 용인된다는 점에서 아주 불편하다. 우리들은 오래 전에 '영웅본색'이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착각에 당혹해 했었다. 분명 영화 속의 한편을 선택해야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본질은 범죄집단이란 사실이었다. 즉 우리들은 영화 속에서 주윤발을 선택함으로서 좋은 악당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반대의 의미 역시 같다. 우리들은 영웅본색을 통해서 느낀 감정이 현실 속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러할까?

바로 이 접점에 밴디트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법과 무질서의 접점에 의적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나 이들의 본 모습보다는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기술한다는 것이다. 기득권층에게는 잔인하고 사악하며 무자비한 도적이지만, 소외계층에게 이들은 구세주이고 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의적인 것이다. 판초비야가 미국인들에게는 콜롬버스 마을의 학살자이지만 멕시코인들에게는 그링고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 영웅인 것이다. 사람들은 판초비야 때문에 미국이 대대적으로 멕시코에 침입하여 자신들의 국가권력을 훼손하고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수호지의 양산박 호걸들은 민중의 편에 선 의적으로 추앙받지만 이들 역시 당시 세계관의 한계를 결코 뛰어 넘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도적들은 결코 법과 무질서 가운데 어느 한쪽을 확실하게 선택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이들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법을 지키면 그들은 범법자가 된다. 그래서 무법을 선택한다면 그저 단순한 도적이 될 뿐이다. 그들은 이런 딜레마를 잘 알고 있을까? 시칠리아의 도적이었던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이런 딜레마를 언론을 통해 희석 시켰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나 총을 들고 서 있는 그럴 듯한 모습을 통해 자신이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퍼붓고 범죄자의 하수인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줄리아노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잡지의 겉표지에 드러난 모습을 통해 기억한다. 의적이란 어쩌면 이렇게 왜곡되고 회화화된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적의 이런 모습이 하나의 전형적인 모델로 굳어지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과 그들의 규율은 중국 민중들에게 의적의 표본으로 회자되었다. 반면 국민당군대는 그들이 익숙한 탐관오리의 주구로 비하되었다. 대중이 공산당과 국민당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가에 따라 국공내전의 승패는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의적은 민중이란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모택동이 자신의 전략에서 아주 그럴듯하게 써먹지 않았던가? 의적과 도적의 중간지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권력을 알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르강튀아와 팡파크뤼엘의 세계는 풍자의 세계이며 엽기의 세계이다. 이런 풍자와 엽기의 세계는 무엇을 겨눈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 당시 타락하여던 종교라는 거대한 하나의 실체를 겨냥한 것이 었다고 생각된다.  종교의 세속화는 어쩌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른다. 천상의 눈높이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직자의 세속화는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종교의 세속화라고 하지 성직자의 세속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종교만큼 종교 자신과 성직자가 하나로 이해되는 곳도 없으리라. 그러기에 종교의 세속화는 종교의 본질을 말하는 것보다는 종교의 뜻을 실행하는 성직자에 대한 세속화를 질타하는 것으로 많이 쓰인다. 왜냐하면 성스런 종교를 수행하는 것은 축성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직자는 신의 도구일 뿐이지 신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성직자 만능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에 비극일 수밖에 없다.

중세의 종교세계는 이러한 성직자 만능주의의 과신이 빚어낸 하나의 비극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르강튀아는 이러한 과신의 세계에 대한 하나의 풍자인 것이다. 이 세상이 종교적인 것으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적인 것의 과신 역시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가르강튀아의 행동 하나 하나는 신적인 창조질서에 대항하는 인간의 질서인 것이다. 그것이 황당하다면 왜 신적 질서의 세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이런 인간적 과신은 이미 소수의 성직자들에 의해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의 과신이 용인된다면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과신 역시 용인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민중들은 인간적 과신이 아니라 신적 겸손에 몰입하는 성직자를 더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중성은 중세 기간 내내 성직자와 민중 간의 이질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런 결과 민중들은 자신들과 다를바 없는 성직자를 존중하지 않았고, 성직자 또한 성사적 요소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르강튀아의 세계는 이런 세계이다. 문득 문득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주변에 그런 세계가 실재한다면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즉 가르강튀아는 허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 인 것이다.

사실 중세는 모순이 종교와 혼합되어 신비주의로 가공된 세계인지도 모른다. 이런 가공의 세계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 르네상스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실의 쓰라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가공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강튀아는 상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세계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간 정신의 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강튀아에서는 바로 이 근대성을 보는 것이다.

*팡타그뤼엘은 나중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유럽의 도시 - 새론서원 613
앙리 피렌느 / 신서원 / 1997년 1월
평점 :
품절


앙리 피렌느는 중세의 도시를 언급하면서 키비타스Civitas와 부르구스Burgus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키비타는 로마 시대 부터 존재했던 도시로서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의 주교좌로 존속하면서 도시로 존재한 것을 뜻한다. 반면 부르구스는 바이킹이라든가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교통로상에 세워졌던 요새가 후일 도시로 성장한 것을 뜻한다. 이렇게 앙리 피렌느는 도시의 종류를 두 가지로 대별하여 설명함으로서 중세의 도시가 생겨난 원인 또한 두개의 커다란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앙리 피렌느는 로마의 특성을 도시로 보고 있다. 그는 로마는 결코 도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즉 로마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지만 그것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점과 점의 연결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현대의 역사에서 월남전을 생각하게 한다. 월남전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만을 확고하게 지배했을 뿐 그 이외의 지역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세력으로 넘겨주었다. 물론 로마가 이렇게 까지 허약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문명의 특성은 도시와 도시의 연결 혹은 존재로 앙리 피렌느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로마의 도시-앙리 피렌느는 키비타스로 명명하고 있다-는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 도시에는 기독교의 주교가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도시는 이후에 종교적 특성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주교좌의 도시로 성장한다는 것은 상업발달에 큰 약점으로 작요하게 된다. 앙리 피렌느는 기독교적 특성상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적대감이 어울어져 키비타스에서는 상업의 발달이 미약했다고 정의한다.

반면 부르구스는 키비타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났다. 즉 부르구스는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난 성채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조그만 성으로 시작된 부르구스는 이후에 점차 자신의 몸집을 불려가면서 도시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결과 부르구스에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구시가지는 봉건적 특성이 강한 반면 신시가지는 근대시민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중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아드리앙 베르윌스트의 논문은 하나의 혼란을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중세에 대한 하나의 기초가 성립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도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전을 통해 중세의 도시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성립된다면 그 반론 조차도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중세 유럽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도시의 정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치통감 9 - 진(晉)시대 1 자치통감 9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의 역사에서 진晉은 참 특이한 왕조라 할 수 있다. 오래 전 삼국지를 읽다가 느낀 점이 있다. 위魏,오吳,촉蜀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이들 나라 가운데 은근히 유비를 응원하면서 제갈량의 도움으로 촉이 삼국을 통일하기를 바랬는데, 갑자기 사마씨가 등장하면서 삼국의 영웅들과 재사들이 맥없이 사마씨에게 복종하고, 삼국이 아니라 사마씨의 진-西晉-이 통일한다. 삼국지의 4/5동안 등장하지도 않았던 인물이 갑자기 부상하여 모든 영웅들을 제압하는 이 후반부에 책을 몇번이나 덮다 읽다를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감정이었는지 서진과 동진의 역사는 사기꾼들이 갈취한 왕조의 별볼일 없는 역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청담淸談과 죽림칠현, 그리고 세설신어라는 책을 읽으며 그곳에 나와있는 대다수의 이야기가 삼국지시대와 그 이후의 왕조인 서진과 동진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유학에 얽매이지 않고 노장사상과 불교가 어울어진 청담과 세설신어의 세계는 이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왜 이 시대는 전대인 한漢과는 달리 유교에 바탕을 둔 의리와 신의의 정치질서가 아니라 노장에 바탕을 둔 허무와 재치의 정치가 대세를 이루었을까? 

아마도 이런 허무사상과 청담에로의 경도됨은 진 왕조 탄생 시초에 이미 뿌려진 것이 아니었을까-이에 대해서는 이나미 리츠코 교수의 배신자들의 중국사를 참조함것-생각 해 본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을 믿을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공자의 글자와 정신은 어쩌면 의미없는 인쇄물이었는지 모른다. 오늘을 살아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친구도 적도 없는 회색의 세계가 되어야만 했다. 필경 이 세계는 푸른 아편 연기에 찌든 아편굴과 같은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까, 서진의 제왕들은 사치스럽고 음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형제들끼리 나라를 절단낼 내란-八王의 亂-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결과 서진은 장강 이남으로 물러나고 장강 이북은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부른 유목민들이 차지하는 이른바 5호16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실 왕조의 건설이 하늘의 뜻天命이라 한다면 서진의 창건은 사마광에게 있어 역사의 흐름이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황하의 문명이 장강을 넘어 남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이 이전시대에도 남쪽을 공략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침략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진이 장강을 넘어 동진을 건설하면서 침략이 아니라 정주와 지배의 의미가 첨가되었다는 점이다. 이 결과 남만으로 총칭되던 장강 이남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면서 한화漢化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회수 이북의 유목민에 대해 만리장성을 구축하여 자신들과 이민족을 구분하던 중국의 입장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중국이 강력한 유목세력과의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자신들의 능력에 버겁지 않은 약소 민족을 확장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강 이남으로 천도한 진은 얼마후 손님의 입장에서 벗어나 주인행사를 하게되는데-이것은 박한제 교수의 胡漢,僑舊이론을 참조할 것-이것이 바로 중국의 본질인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中國이었다. 즉 자신은 中이고 다른 곳은 國이었던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진 시대인 것이다.

 *초수대읍楚囚對泣:서진이 장강 이남으로 천도한 뒤에 서진의 전직관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재상인 왕도가 이들을 꾸짖으며 한 말이라고 한다. 즉 서진의 관료들이 칠칠치 못하게 초나라의 죄인이 된양 눈물만 질질 짜고 있다는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바리안의 유럽 침략
존 배그넬 베리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존 베리교수의 "바바리안의 유럽침략"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중국의 위진남북조사를 연구하는 박한제교수의 이론이었다. 박한제교수는 장강 이북과 장강 이남의 중국화를 "호한체제론"과 "교구체제론"으로 설명한다. 원래 한족의 중심지가 장강과 황하의 사이인 중원이고, 황하 이북은 유목민족이 장강 이남은 남만의 거주지였다. 그런데 중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황하 이북에서는 중국인과 오랑캐-순전히 중국의 관점-와 융합되었다는 것이고, 장강 이남에서는 오호에 의해 서진이 남진하면서 그곳의 토박이-舊-와 이주한족-僑-사이에 교류를 통해 중국화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 이론의 장점은 중화문명의 전파가 한족 주도의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고, 남방의 고유한 문화와 북방의 한족문화와 중원문화의 이질적인 요소를 설명하는데도 아주 적합한 이론이라 하겠다. 

존 베리 교수 이 책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제격이라 하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호한/교구체제의 성립시기와 로마의 바바리안에 의한 잠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 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들은 가끔 역사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예를들면 중세시기를 450년경부터 1300년까지로 잡는다고 할때 430년경과 1310년경은 중세가 아니고 어떤 시대일까하는 의문에 접한다. 이런 오류가 게르만족의 이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들은 아시아에서 한족에 의한 흉노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4세기에 시작되어 근 9세기까지 진행된 역사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이라고 할 때 독일이라는 이미지와 너무 근접하게 연상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광대함을 쉽게 망각한다. 현재의 우크라이나지역에서 시작된 게르만족의 이동은 고트족-동고트와 서고트가 있다-이 움직이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이들이 로마의 변경을 침략하면서 로마와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고트족은 훈족이 이들을 압박하기 이전부터 로마의 변경에서 로마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로마에로의 침입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이런 침략과 격퇴의 반복과정이 침략으로 돌변한 것은 앞에서 말한 훈족의 침입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입과 그 여파에 따른 수많은 부족들의 이동에 의해 국경선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 결과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를 서고트족은 에스파냐를 롬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를 프랑크족은 갈리아를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앵글색슨족은 브리타니아를 각각 점유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점유과정에서 로마는 완전히 퇴패하여 물러갔으라?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 정복자들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필요로 했고 행정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이 과연 로마의 문명까지 필요로 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 과정에서 로마인들과 바바리안들은 필요에 의해 이원적인 체제를 구성하면서 공존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로마법을 바바리안들은 자신들의 법-역사의 기록에는 살리족의 법전이 자주 언급된다-을 적용하면서 분리하되 융합되어 있는 체제를 구성한다.

바바리안 정복자들은 여전히 동쪽 로마제국인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의 임명장을 원했고, 동쪽의 황제는 자신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이들 바바리안들에게 직위를 수여하였다. 이런 기묘한 동거관계는 자연스럽게 서로마제국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들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에 접수된 사실을 로마제죽의 멸망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실제로 동쪽의 로마는 1천년 가량 더 지속된다. 서로마의 멸망은 로마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서쪽에 대한 통제권의 약화라는 점일 뿐이다. 서쪽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에게는 자신들 영토의 일부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명멸하던 수많은 군소왕국들은 여전히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견제를 받거나 혹은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게르만족의 이동에 의해 서쪽지역은 야만화가 촉진되면서 로마문명이 소멸되었다는 급진적인 이론은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서쪽 로마의 게르만화과정은 야만인들의 학습효과에 의해 그들은 문명을 배워가는 과정이었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본질이 게르만의 본질과 뒤섞이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로마의 게르만화 과정은 이탈리아 지역의 가톨릭 수도자들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들 수도사들에 의해 북쪽의 야만인들이 그리스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로마적 요소-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게르만적 요소와 타협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게르만적인 요소는 로마적인 것을 받아들이거나 흡수되었던 것이다. 존 베리 교수는 이런 과정을 로마와 게르만의 "연방구성체"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느 한쪽이 지배의 핵심이 아니라 로마와 게르만이 느슨하게 연합하여 이원적인 법체계 속에서 공존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중세의 봉건제도는 이런 "연방구성체"의 과정에서 생겨난 혼혈아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