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서 비극의 시작은 항상 인간의 의지 때문이다. 신의 손길로 그 인간의 운명이 결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피해보려는-혹은 이겨보려는 인간의 의지는 결국 비극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자. 천상의 신탁은 '라이오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고 한다. 라이오스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시종은 '측은지심'에 아이를 죽이는 대신 뒤꿈치를 꾀뚫어 묶은 다음 버린다. 신탁의 운명은 이 아이가 짐승의 밥이 되는 대신 목동부부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길러진다. 오이디푸스가 성장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듣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그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목동부부를 떠난다.
오이디푸스에게 이 떠남의 결행은 신탁의 거부라는 명백한 의사표시이며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거부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간 의지의 표현이 바로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교만'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나 시비가 붙었고, 죽이고 만다. 그 노인이 바로 자신의 부친인 라이오스였다. 이 시대는 이렇게 사소함으로 살인이 저질러지는 시대였다. 그리고 스핑크스와의 대결에 승리한 다음 테베로 들어가 영웅이 되어 미망인이된 요카스타와 결혼한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의지와 용기가 신의 신탁을 완벽하게 이루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확실하게 시종이 오이디푸스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번 양보하여 목동부부가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너는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주워온 아이이다. 비극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어짜피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고 했던가? 우리가 금기시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장르속에 녹아들어 대리 만족을 이루는 것일까? 금기에 대한 배설이 어쩌면 비극의 심층 저 밑바닥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이끼의 천용덕은 이런 의미에서 그 뿌리가 그리스 비극에 접목되어 있다. '두려움이 너를 구원하리라'라는 그 단어는 이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세계에서 모든 영웅들은 두려움을 거부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야만스러우며, 욕정적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나약함의 표시일 뿐이다. 헤라클레스는 독이 묻은 옷을 입고 뜨거움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허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하인에게 장작을 쌓으라고 명령한 다음 스스로 그 장작위에 누워 불을 당긴다. 그에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에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는 두 눈을 뽑고 딸에 의지한 채 길을 떠난다. 그 떠남은 순례의 혹은 참회의 떠남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떠남을 통해 도시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그 떠남 역시 영웅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용덕은 류목형이 죽은 다음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순간 그는 영웅이 되려한다. 그 소소한 고집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그동안의 모든 행위에 대한 과거가 드러난다. 천용덕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영웅의 행위가 아니라 보조자의 행위이다. 영웅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제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끼에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류목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된 '댓가'라는 단어 이다.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부탁을 통해 '철의 시대'에는 진정한 영웅이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와 유사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는 없다는 사실...
결국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댓가를 받아들인 그 순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 원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그는 류목형이 한 말을 그대로 자신의 수하들에게 사용한다. '두려움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것은 신의 주먹 혹은 섭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용덕은 해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을을 감시하고 지배한다. 그의 집 담장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을 보라. 마치 거대한 탑 , 아니 거대한 감옥의 감시탑 같지 않은가? 천용덕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왕국에 구현할 수 있었다. 류목형이란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류목형이 죽은 순간 그는 그렇게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신-류목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을 짖눌러왔던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감히 그는 그림속의 용에게 눈을 그려 넣어 하늘로 올려보내려 한다. 그 사소함이 그를 밑바닥으로 내리친다. 악마가 아니라 신은 바로 천용덕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탐욕을 버리고 어쩌면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시종이 자신의 인간적 잣대로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처럼, 천용덕 역시 사악함 그 자체로 남았다면, 그것은 완벽한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그만 틈으로 인해 '이끼'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악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