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네 디트리히, 세레나 허...!!!...???

검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무대, 담배연기 자욱한 무대, 조명이 검은 벨벳커튼을 비추면 실크햇에 연미복,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가수가 검은 벨벳커튼을 가르고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릴리 마를렌'을 부른다.  

밝은 무대, 조잡한 커튼, 그 빨강색이란... 조명도 없다. 다만 사회자가 말할 뿐이다. '전직 에로 배우 세레나 허...'빨간 커튼이 갈라지고-성적인 의미일까-베티붑처럼 차린 타이트한 가수가 나온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로 '어린 송아지가..'를 부른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윈치 않아도 하나의 '섹스'로 다가왔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환상이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이 원한다해도 결코 '섹스'의 이미지는 갖지 못할 것이다. 세레나 허의 신음 소리는 섹스라는 단어 대신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단어 하나 하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섹스'가 된다.   

마리네 디트리히와 세레나 허를 가르는 경계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또 하나의 절대적인 문구가 읊어진다. '두려움!!!!'.  

릴리 마를렌은 다양한 형식으로 불리워졌다. 애닮은 곡조, 군가의 행진곡, 폴카, 왈츠... 등등등. 이렇게 다양하게 릴리 마를렌이 불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 다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두려움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상징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하나로 왜곡 혹은 착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두려움은 하나의 상징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와중에서 병사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섹스'였을까? 그래서 마를렌 디트리히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것일까? 그것밖에 없을까?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세원의 밤의 플렛트 폼'이란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늦은 밤 김세원씨의 목소리는 우리 군바리들에게는 하나의 '수줍은 섹스'였다. 무엇 때문에... 여성의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레나 허의 목소리는 디트리히와 유사하지만 듣는 사람을 파괴시킬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개그화함으로서 '섹스' 혹은 '어머니'의 상상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는 '섹스'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그 자체를 무화시키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 혹은 남성의 영원한 우상인 '구원의 여인'을 구현하고 있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치않았지만 릴리 마를렌을 통해서 하나의 아이돌로 해석된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돈나이고, 창녀이며 어머니이고 여동생이며 애인인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 허는 우리의 확대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세레나 허는 자신을 비우지 않고 특정한 상상으로 왜곡해서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레나 허를 보면서 왜곡의 잔상을 읽고 그것 때문에 웃는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을 무화함으로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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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비극의 시작은 항상 인간의 의지 때문이다. 신의 손길로 그 인간의 운명이 결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피해보려는-혹은 이겨보려는  인간의 의지는 결국 비극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자. 천상의 신탁은 '라이오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고 한다. 라이오스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아이를 죽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시종은 '측은지심'에 아이를 죽이는 대신 뒤꿈치를 꾀뚫어 묶은 다음 버린다. 신탁의 운명은 이 아이가 짐승의 밥이 되는 대신 목동부부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길러진다. 오이디푸스가 성장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듣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그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목동부부를 떠난다.  

오이디푸스에게 이 떠남의 결행은 신탁의 거부라는 명백한 의사표시이며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거부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간 의지의 표현이 바로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교만'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나 시비가 붙었고, 죽이고 만다. 그 노인이 바로 자신의 부친인 라이오스였다. 이 시대는 이렇게 사소함으로 살인이 저질러지는 시대였다.  그리고 스핑크스와의 대결에 승리한 다음 테베로 들어가 영웅이 되어 미망인이된 요카스타와 결혼한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의지와 용기가 신의 신탁을 완벽하게 이루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확실하게 시종이 오이디푸스를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번 양보하여 목동부부가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너는 우리의 아들이 아니라 주워온 아이이다. 비극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어짜피 비극은 카타르시스라고 했던가? 우리가 금기시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장르속에 녹아들어 대리 만족을 이루는 것일까?  금기에 대한 배설이 어쩌면 비극의 심층 저 밑바닥에 있는 것이 아닌지... 

이끼의 천용덕은 이런 의미에서 그 뿌리가 그리스 비극에 접목되어 있다. '두려움이 너를 구원하리라'라는 그 단어는 이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세계에서 모든 영웅들은 두려움을 거부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야만스러우며, 욕정적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나약함의 표시일 뿐이다. 헤라클레스는 독이 묻은 옷을 입고 뜨거움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허약한 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오히려 하인에게 장작을 쌓으라고 명령한 다음 스스로 그 장작위에 누워 불을 당긴다. 그에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라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 이다. 그에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는 두 눈을 뽑고 딸에 의지한 채 길을 떠난다. 그 떠남은 순례의 혹은 참회의 떠남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떠남을 통해 도시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그 떠남 역시 영웅적 행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용덕은 류목형이 죽은 다음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 순간 그는 영웅이 되려한다. 그 소소한 고집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그동안의 모든 행위에 대한 과거가 드러난다. 천용덕은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물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영웅의 행위가 아니라 보조자의 행위이다. 영웅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제압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끼에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류목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된 '댓가'라는 단어 이다.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부탁을 통해 '철의 시대'에는 진정한 영웅이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와 유사한 사람은 있지만 그 자체는 없다는 사실... 

결국 천용덕은 류목형의 사소한 댓가를 받아들인 그 순간 영웅이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 원초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그는 류목형이 한 말을 그대로 자신의 수하들에게 사용한다. '두려움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그것은 신의 주먹 혹은 섭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용덕은 해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을을 감시하고 지배한다. 그의 집 담장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을 보라. 마치 거대한 탑 , 아니 거대한 감옥의 감시탑 같지 않은가? 천용덕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왕국에 구현할 수 있었다. 류목형이란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류목형이 죽은 순간 그는 그렇게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았던 신-류목형-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을 짖눌러왔던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감히 그는 그림속의 용에게 눈을 그려 넣어 하늘로 올려보내려 한다. 그 사소함이 그를 밑바닥으로 내리친다. 악마가 아니라 신은 바로 천용덕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탐욕을 버리고 어쩌면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시종이 자신의 인간적 잣대로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처럼, 천용덕 역시 사악함 그 자체로 남았다면, 그것은 완벽한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그만 틈으로 인해 '이끼'는 비극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악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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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 고딕 대성당으로 보는 유럽의 문화사
사카이 다케시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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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불멸의 아름다움은 좀 약오른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의 중세학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고딕 건축물은 그동안 설계도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앙리 포시옹의 "로마네스크와 고딕"이란 책은 그 부피만으로도 고딕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의 기를 꺽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은 고딕을 유럽의 시원인 '숲'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유럽의 숲'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숲은 생명의 이미지이면서 창조의 장소이고 불멸이 재생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숲이 중세 유럽에 들어서면서 인구가 팽창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파괴된다. 이것은 유럽의 탄생에 중요한 역활을 한 숲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고딕이 등장하였다고 하면서, 고딕과 숲을 연결시킨다. 그 기발함은 고딕의 외양에서 느꼈던 기묘함의 의문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그 숲의 역사는 중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지속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셀로나의 그 유명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은 중세인들의 숲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과 사랑을 현재에 구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가우디의 건축에서 느껴지던 그 기괴함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를 느끼게 한다.  

고딕은 일견 복잡하게 느껴진다. 뽀쪽한 첨탑이 무수히 배치된 고딕의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또 다른 바벨탑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불경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신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동경을 표현한 것으로도 이해한다. 이렇게 고딕은 신성함과 불경함을 느끼게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이 모순점을 저자는 거룩한 성스러움과 잔인한 성스러움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있다. 즉 우리들이 여성의 상징으로 성모 마리아를 거론할 때 신을 낳으신 거룩한 여인으로 이해한다. 반면 힌두교의 칼리 여신은 수 많은 인간 제물을 통해 새로운 창조-파괴를 통한 창조-를 이룩한다. 즉 창조라는 같은 주제를 한쪽은 밝은 면으로 다른 쪽은 어두운 면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고딕의 다양한 모습이 이와 같다는 점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증명하고 주장한다.  

사실 중세는 세상의 다양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빛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단일한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교차한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통해 중세를 규정하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고딕에도 그래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깊은 숲, 그곳은 어둠과 온화함이 있는가 하면 히미한 한 줄기 빛과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숲은 끊임없이 생명을 재생해 낸다. 씨앗이 떨어지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떨어져 썩고, 다시 싹이 나고...하는 무한 창조의 반복이 일어난다. 고딕 성당안에서도 매일 숲의 이런 생명창조가 반복된다. 미사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반복된다.  

고딕 성당에서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이미지는 교회의 두 가지 표상이다. 부활의 기쁨이 앞에 오느냐, 수난의 고통이 앞에 오느냐에 따라 교회의 모습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숲이 생명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드루이드교의 의식을 보라-을 간직한것과 무엇이 다른가. 숲은 인간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줄 때 생명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숲이 깊은 심연의 공포로 다가올 때 고통이 되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의 이야기에서 숲의 이미지는 밝음이 아니라 검은 색이다. 이런 이중적 모습이 고딕의 성당 안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히미한 빛은 죄인에게는 두려움의 어둠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삶의 혹은 재생의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의 자유로움-로빈 훗에서 나타나는 자유-은 고딕에 의해 규격화되면서 통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딕은 제도속으로 들어가면서 권위로 변질된다.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고딕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고딕에는 삶의 약동이 아니라 제도의 견고함만이 남게된다. 이렇게 고딕에 대한 자유로움이 규격화되는 과정에서 중세 유럽은 숲을 경외의 대상에서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세유럽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희생하고 단일성과 규격화를 달성한다. 이러한 반발은 루터의 반발로 이어지지만 숲에 대한 중세적 사고는 고딕에 의해 그대로 보전된다. 즉 중세 유럽인들은 고딕을 통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 세상을 인간의 삶에 맞게 개발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유럽인들의 생각은 결국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고딕,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어찌보면 유럽인들만의 시각인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이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피와 땀이 그 거대한 고딕의 숲에 스며들었을까? 그 불멸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검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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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앉아서 세계를 발견한 남자 -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
귄터 베셀 지음, 배진아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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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세상을 관철하였다. 그는 이성,감성,오성으로 이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파악하였다. 반면에 이 책의 주인공인 제바스티안 뮨스터는 바젤에서 이 지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이 세상을 철환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이 세상을 묘사하고 그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불확실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견문록과 지도 그리고 그림이 가득찬 그의 지리 백과사전은 헛된 공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가 이 작업에 일생을 바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바스티안 뮨스터가 살아간 세계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였다. 그동안 사람들이 믿어왔던 진리가 새로운 발견으로 수정되어야만 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탱해 왔던 종교마저도 분열을 하여 사람들에게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끔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런 시기에 제바스티안 뮨스터는 모든 기록을 모으고 그것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방대한 작업은 그 시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물론 그 속에 기록된 것들의 진실성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제바스티안 뮨스터의 작업이 현재의 우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으로 발견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지막지한 호기심이다. 자신들 이외의 땅에 사는 기묘한 종족들에 대한 현대의 시각이 냉소적인 것처럼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외계인에 대한 영화나 기록을 몇 백년 후에 본다면 지금의 우리처럼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 시대를 평가할지 모른다. 우리는 중세의 시대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기록을 보는 순간 무지와 몽매라는 단어를 앞에 내세우게 된다. "어떻게 그 시대는 이런 터무니없는 사실을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이런 우리의 질문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몇백년 혹은 몇천년 후에 우주인과 조우한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묘사된 우주인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기록 혹은 모습을 믿을 수 있었을까?"라는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바스티안 뮨스터의 시대가 보여준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두 바퀴의 추진체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지금의 모습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거인을 잘 이용한 난쟁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의 이 상태로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호기심과 탐구심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고 좀더 멀리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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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 피귀르 미틱 총서 10
파트릭 레날 외 지음, 이규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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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문학은 멜빌에 의해 비로소 미국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포우의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발상 조차도 유럽적 감수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멜빌은 광활한 아메리카의 대륙-그 광활함은 바다와 비유될 수 있다-의 비유로 바다를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흰고래는 서부로 뻗어가는 백인들의 탐욕 혹은 진취성-그 다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을 상징한다. 멜빌은 이후 많은 미국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다양함의 첫번째는 타잔이라 할 수 있다. 정글-이 역시 넓은 대지의 다른 표현이다-에서 백인이 정글의 제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수많은 모험을 경험한다. 이것은 어쩌면 행복의 길을 포기하고 고통의 길을 통해 하늘의 별이 된 헤라클레스의 또 다른 변형인지도 모른다. 이 정글은 말로에 의해 콘크리트의 정글로 바뀐다.  

콘크리트의 정글은 백경의 대양, 타잔의 정글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다, 정글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여기에서 필립 말로는 또 다른 영웅으로 떠오른다. 아합-에이헙-선장이나 타잔에게는 세련됨보다는 원시성 혹은 거친 야만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말로에게는 도시의 세련됨이 강조된다. 그것은 대양과 정글로 상징되는 원시성이 콘크리트의 건물로 대표되는 문명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타잔의 포효나 에이헙의 광포함이 의식 밑으로 가라 앉는다. 대신 무수한 사변적 도시성이 등장한다. 그러지만 필립 말로는 로스엔젤레스라는 신흥 도시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서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원시성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필립 말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아메리카의 신흥도시 로스엔젤레스에서 타잔과 에이헙은 생존할 수 있을까? 필립 말로는 타잔과 에이헙의 또 다른 분신으로 그는 광기와 원시성 대신에 문명의 사변적 유희를 통해 생존한다. 하지만 그의 사변은 상류층의 세련됨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거친면을 대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말로는 도시의 정글 속에 존재하는 타잔이면서 광활한 콘크리트의 바다를 헤메는 에이헙이다.  

필립 말로는 도시의 탐정이지만 그 이전에 등장했던 사색적인 탐정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는 쉬지않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독백 혹은 방백이 필립 말로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탐정들과 구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탐정이면서 탐정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부류이면서 같은 부류가 아닌 인물이다. 즉 정글에 버려진다고 해서 모두 타잔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도시의 외로운 탐정이 모두 필립 말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립 말로는 넋두리의 인간이다.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의 이런 모습은 광기의 에이헙이나 즉응적인 타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무엇이 말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넋두리는 홈즈가 와트슨에게 하는 과시적 욕망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키 스필레인이나 더쉴 해미트의 자의식 과잉의 모습도 아니다. 그는 넋두리에서만큼은 여성적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의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재해석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필립 말로는 험프리 보가트로 고정되는 것이다. 혹은 게리 그랜트로도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를 통해 소설 속의 인물이 화면 혹은 우리들의 면전에서 재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적인 인물이 남성적 혹은 마쵸, 젠트리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다. 이렇게 되면서 필립 말로의 본래의 모습은 화면속의 인물로 대치되면서 한편의 도시 신화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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