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말로 - 피귀르 미틱 총서 10
파트릭 레날 외 지음, 이규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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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문학은 멜빌에 의해 비로소 미국적인 특성을 띠게 된다. 포우의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발상 조차도 유럽적 감수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멜빌은 광활한 아메리카의 대륙-그 광활함은 바다와 비유될 수 있다-의 비유로 바다를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흰고래는 서부로 뻗어가는 백인들의 탐욕 혹은 진취성-그 다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을 상징한다. 멜빌은 이후 많은 미국의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다양함의 첫번째는 타잔이라 할 수 있다. 정글-이 역시 넓은 대지의 다른 표현이다-에서 백인이 정글의 제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수많은 모험을 경험한다. 이것은 어쩌면 행복의 길을 포기하고 고통의 길을 통해 하늘의 별이 된 헤라클레스의 또 다른 변형인지도 모른다. 이 정글은 말로에 의해 콘크리트의 정글로 바뀐다.  

콘크리트의 정글은 백경의 대양, 타잔의 정글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다, 정글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여기에서 필립 말로는 또 다른 영웅으로 떠오른다. 아합-에이헙-선장이나 타잔에게는 세련됨보다는 원시성 혹은 거친 야만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말로에게는 도시의 세련됨이 강조된다. 그것은 대양과 정글로 상징되는 원시성이 콘크리트의 건물로 대표되는 문명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타잔의 포효나 에이헙의 광포함이 의식 밑으로 가라 앉는다. 대신 무수한 사변적 도시성이 등장한다. 그러지만 필립 말로는 로스엔젤레스라는 신흥 도시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서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원시성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필립 말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아메리카의 신흥도시 로스엔젤레스에서 타잔과 에이헙은 생존할 수 있을까? 필립 말로는 타잔과 에이헙의 또 다른 분신으로 그는 광기와 원시성 대신에 문명의 사변적 유희를 통해 생존한다. 하지만 그의 사변은 상류층의 세련됨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거친면을 대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말로는 도시의 정글 속에 존재하는 타잔이면서 광활한 콘크리트의 바다를 헤메는 에이헙이다.  

필립 말로는 도시의 탐정이지만 그 이전에 등장했던 사색적인 탐정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는 쉬지않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독백 혹은 방백이 필립 말로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탐정들과 구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탐정이면서 탐정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부류이면서 같은 부류가 아닌 인물이다. 즉 정글에 버려진다고 해서 모두 타잔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도시의 외로운 탐정이 모두 필립 말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립 말로는 넋두리의 인간이다.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의 이런 모습은 광기의 에이헙이나 즉응적인 타잔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무엇이 말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넋두리는 홈즈가 와트슨에게 하는 과시적 욕망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키 스필레인이나 더쉴 해미트의 자의식 과잉의 모습도 아니다. 그는 넋두리에서만큼은 여성적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의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재해석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필립 말로는 험프리 보가트로 고정되는 것이다. 혹은 게리 그랜트로도 변모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를 통해 소설 속의 인물이 화면 혹은 우리들의 면전에서 재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적인 인물이 남성적 혹은 마쵸, 젠트리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다. 이렇게 되면서 필립 말로의 본래의 모습은 화면속의 인물로 대치되면서 한편의 도시 신화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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