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역사 - 일월교양문제 29
수잔 브라운 밀러 / 일월서각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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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머리에서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 "당신은 난행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매우 불쾌하고 노골적인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대답은 "아니오"였지만. 그런데 저자는 이 질문의 의중에 생각이 미치자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 사람들이 저자에게 이렇게 질문한 것은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뒤틀린 논리가 배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폭력에 대한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과거의 어두운 기역이 있을 것이란 논리가 질문자들의 의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뒤틀린 논리가 바로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점을 저자는 책의 앞머리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이라는 주제에는 프로이트적인 근사한 논리를 통해 접근하지만 성폭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대상이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기에 그렇다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맑스와 엥겔스 역시 인간의 수탈에 대해서 장황한 이론을 펼쳤지만 성폭력 그 자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역시 성폭행을 그의 경제적인 이론에 끼워맞출 수 없기에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침묵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성폭력은 '남성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성폭력에 대해 사회의 주류인 남성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은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남성의 성기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남자들의 발견을 불의 발견과 조잡한 석기와 함께 선사시대 3대 발명품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성폭력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의 상태에 있게하기 위한 위협의 의식화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선사시대, 중세, 일차세계대전, 이차세계대전, 방글라데시, 베트남, 미국의 노예제도와 인종문제를 통해 증명해 나간다. 저자는 이런 성폭행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성폭행이 어떻게 현대에 와서 범죄로 규정될 수 있었는가하는 문제도 심도있게 고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범죄로 낙인 찍히는 성범죄가 다른 한편에서는 합법적으로 조장되고 정당화되어 가는 가를 고발하고 있다. 이런 성폭행의 합법화는 전쟁을 통해 확산되는데 저자는 60년대의 베트남 전쟁과 70년대의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발생했던 성폭행의 사례를 들어가며 성폭행이 군인-남성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어떤 목적에서 자행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구약의 <욥기>가 떠오른다. 욥이란 사람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시험에 빠지게 된다. 욥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믿었던 친구들은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욥을 찾아와 그가 신의 벌을 받은 것은 어떤 알지 못하는 죄 때문이라는 점을 각인 시키려 한다. 그러면서 그 친구들은 욥에게 신에게 용서를 빌으라고 추궁한다. 하지만 욥은 한사코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결국 신이 개입하여 욥의 무죄함이 드러나게 된다. 성폭력이란 이렇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재앙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편견-욥의 친구들-이 문제인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이 되어 버린 다는 점이다. 이런 고답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성폭력은 그 어떤 해답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시각은 성폭력의 피해자만을 양산할 뿐 가해자는 없다는 점이다. 과연 그럴까하는 마음이 있지만 90년대에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에서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사용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폭력이었다. 성폭력을 당한 보스니아의 여성들은 공동체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보스니아의 회교도 공동체를 확실하게 붕괴시키는 힘을 발휘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성폭행의 피해자인 회교도 여성들은 바로 이런 고답적인 성폭력의 시각때문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무죄한 피해자라는 사실보다는 더럽혀진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될 때 성폭력은 더욱더 공포스런 무기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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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강 레테 - 역사와 문학을 통해 본 망각의 문화사
하랄트 바인리히 지음, 백설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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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같이 생각했던 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치올코프스키의 <성자에서 민중으로-예수의 소설적 변형>이란 책이다. 제목에서처럼 예수라는 인물이 성자의 모습을 벗고 어떻게 민중 속으로 다가오는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속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사회주의자' '광인' '민중의 동지' 등 여러 변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변형들은 우리들에게 그 시대의 고뇌와 아픔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 인간적인 연약함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인간적 약점을 통해 발산되는 예수의 의미는 어쩌면 기적을 행하고 부활한 예수의 이미지보다 더 인간에게 가깝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이 망각에 관한 책 역시 그러하다. 망각이란 어찌보면 가장 무서운 재앙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재앙의 반대편에는 평화스러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망각을 시연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 '군대 이야기'는 거의 망각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군대에서의 망각은 아주 단순하면서 하찮은 것이다. 계급적 질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꺽여야만 했던 자존심은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말살해 버린다. 그리고 망각의 토대위에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반복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경험으로 기억시킨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신 신화와 문학의 망각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화와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바에는 언제나 그 시대의 환경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신화와 문학의 어떤 귀절은 그 시대를 자각하게하는 통렬한 아픔이 내재되어 있다. 결국 바인리히는 신화와 문학을 통해 우리들의 편협한 망각과 기억을 은근히 조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적으로 망각을 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이런 조소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망각은 어찌보면 아주 편리한 것이다. 이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나 부켄발트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하얀 재灰의 눈'이 마을에 내리는 것을 경험하였다. 주민들은 그 하얀 재가 수용소의 인간들을 화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무시하였다. 개인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망각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던 기억도 함께 망각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의 새로운 기억만을 기억할 것이다.

망각과 기억의 근본은 망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테의 강은 건너는 사람의 모든 전생을 지워버린다. 그 강을 건넌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기쁨 아니면 고통 뿐이다. 망각은 잊어버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잊어버림을 감싸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약이 있다면 감옥은 정말로 말 그대로 지옥일 것이다. 인간이 철창 안에서 밖을 생각하는 것은 철창안을 잊고-망각-과거의 밖을 생각-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잊고 과거를 재생하는 사람과 과거를 잊고 현실을 재생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망각이다.

망각이란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체계는 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인지도 모른다. 이런 개인주의적 망각은 역사에서 정치. 문화 등등 모든 곳에 번져있다. 하지만 망각이 이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본 이데아의 세계를 출생하면서 잊어버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잃어버린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망각된 이데아를 기억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망각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으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문화란 (...) 죄다 잊어버린 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어떤 것이다." -하랄트 바인리히, <망각의 강 레테),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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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1 - 탄생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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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길 가 양 옆으로 노란 해바라기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는 감미롭고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인다. 노란 해바라기들은 하늘의 태양을 따라 선생님에게 지명받으려는 학생들처럼 고개를 길게 내밀며 돌고 있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인다. 이때 저 길 끝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망나니 총각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재미삼아 해바라기를 칼로 쳐서 베어 버린다.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린다. 그들이 지나고 난 뒤에 길 양편은 쓰러진 해바라기들로 어지럽다. 평화로웠던 공기는 해바라기들이 썩어가며 풍기는 냄새로 고약하다. 노란 색의 화사한 해바라기들은 태양빛에 의해 서서히 말라간다. 노란 꽃잎은 갈색으로 그리고 흙색으로 변해 마침내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꽃잎을 빼앗긴 줄기들은 바짝 말라가다 결국 지나가던 농부들의 노새 등에 실려가서 부엌의 아궁이 속으로 던져진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해바라기는 한줌의 연기로 화해 대기중으로 흩어진다. 해바라기가 쓰러졌던 길 양편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원래 주인이 차지하고 있던 장소를 빌려 새 생명을 피워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왼통 이름모를 꽃이며 풀들이다.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제 해바라기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이름모른 꽃과 풀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름을 붙여줄 뿐이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은 '아주 슬픈 책'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슬픔을 곡哭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더욱더 슬픔을 배가 시킨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역사도 함께 죽였다. 그들의 기억과 전통 또한 사라지게 하였다. 이 결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얼굴을 형상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북 아메리카의 지명은 온통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 웨일즈, 독일, 프랑스, 북구와 동구의 지명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지명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지명으로 도배되어 있다. 달라진 지명은 신화의 의미도 변색시킨다는 점이다. 신화가 변색된다는 것은 민족의 혼이 변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2년 스페인과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다. 신대륙 발견 5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스페인에서는 올림픽과 엑스포를 개최하였고, 미국에서도 백인들만의 잔치가 벌어졌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 행사에 일절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문명 파괴 5백주년 기념식'이라고 비아냥 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들의 조롱을 웃어 넘겼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런 승자의 여유가 패자들을 더욱 위축되게 하고 씁쓸하게 하였으리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신대륙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 땅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생성되었을 때부터 있어온 땅이 왜 새로운 땅이란 말인가. 원주민들은 이 단어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적 발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들에 의해 언제나 발견된 것으로 형상화된다. 즉 그곳에 원래부터 존재해있던 존재는 발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미생물 혹은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오로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은 발견한 자의 것이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이런 흔적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복자들은 상륙한 다음 원주민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이 땅은 스페인 국왕의 영토가 되었고 당신들은 신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낭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기는 그 옆에서 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들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자신들이 차지한 땅에 대한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무도함이 5백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는 그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제 1권은 그 경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갈레아노는 백인들이 침략하기 이전의 시기는 신화의 세계로 정리해 놓았다. 연대가 적혀있지 않은 그 시기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멀리 느껴지는 역사 아닌 역사이며 신화 아닌 신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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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2 - 얼굴과 가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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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에 사용된 mascaras란 스페인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마스카라라는 이 단어는 우리들에게 여성의 화장에 사용되는 용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단어 역시 persona가 심리학의 용어로 전용되었듯이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mascaras는 누구의 얼굴에 덮씌워진 것일까? 가혹한 착취자일까, 아니면 핍박받는 원주민들일까. 정복자는 종교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철저하게 원주민을 탄압하고 착취한다. 반면 원주민들은 순응이라는 가면 속에 저항이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속풀이라고 할 수 있다.

170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기록된 2권은 슬픔과 분노의 기록이다. 실패한 자는 배반한 자의 가면에 속고, 성공한 자는 가면 때문에 민중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 곳곳에 스며있는 슬픔과 배반의 역사는 라틴 아메리카가 자신들의 맨 얼굴을 찾기 위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맨 얼굴은 언제나 가면을 쓴 자들의 발 밑에 존재할 뿐이다.

이런 불평등은 부와 권력의 편중에서 비롯된 것이다. 갈레아노는 부와 권력이란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땅 속에 스며들어 온 대지를 흠뻑 적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부와 권력이 한 곳에 고이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

라틴 아메리카처럼 모순과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곳도 드물다. 맨 처음 이 땅에는 주인이었던 원주민들만이 존재했다. 어느날 백인이 들어와 졸지에 원주민은 백인들의 노예가 되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곧 멸망할 것으로 믿었다. 백인들은 '어째서?'라고 물었고, 원주민들은 '너희들은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백인들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 여자를 능욕하여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이 너희를 지배하게 하겠다.' 이 모순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백인, 혼혈, 원주민으로 내려가는 오르도의 세계는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는 현대가 아니라 중세처럼 느껴지게 한다.

원주민들은 가면에 너무 익숙해져 자신들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혼란 스럽다. 가끔 선각자들이 일어나 가면을 벗어 던지라고 외치지만 그 목소리는 광야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설혹 그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식민주의자들은 권력과 부에 몸이 단 배반자들을 이용해 벗겨진 가면을 원주민들의 얼굴에 씌운다. 점점 가면은 얼굴과 하나로 변해간다. 이제 가면을 벗어 던지는 것이 고통이다. 그래도 그 가면을 벗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복자들은 반항자들을 야생마처럼 도살한다. 아무리 하찮은 자유일 망정 전염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들의 정복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떠들어 댄다. 그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에게만 입술을 허용하는 장미빛 베일을 쓴 귀부인과 같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의 역사는 동물의 역사이며 존재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매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가면을 벗어 던져야만 한다.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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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기억 3 - 바람의 세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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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3권을 먼저 읽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현대사의 지명과 인명이 애잔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 단편적인 모음이 일회성의 반짝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작은 사건들이 날줄과 씨줄의 역할을 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현대사를 극명하게 조명하고 있다.

갈레아노는 "미국 이남의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통상조약을 맺었지만, 그 가운데 이웃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 라틴 아메리카는 분열을 위해 모여 있고, 서로 증오하는 데 길든 어리석은 국가들로 이루어진 군도"라는 글로 시작한다. 이 글을 통해 드러나는 라틴 아메리카의 치부는 읽어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갈레아노는 그것을 조금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라틴 아메리카의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그러면서 갈레아노는 멕시코의 지도자인 카르데나스의 두 가지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카르데나스는 귀를 활짝 열고 통치한다. 이 마을에서 저 마울로 돌아다니면서 끝없는 인내로 불평에 귀기울이고, 가능한 것 이상은 결코 약속하지 않는다. 약속이 곧 실천인 그의 입은 바위처럼 무겁다." 1910년에 시작된 멕시코 혁명의 종결자인 라사스 카르데나스는 분명 자신이 혁명의 선각자들이었던 사파타의 이상을 완결시켰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년 후인 1968년 멕시코의 야키 원주민 대표 8명이 라사스 카르데나스를 면담하고 그가 실행했던 모든 것이 원점으로 회귀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쿠바와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와 같은 국가에서 벌어지는 조그만 혁명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쿠바와 니카라과의 혁명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이 얻은 자신감은 분명 새로운 미래의 한 이정표로 작동할 것임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사의 연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짤막한 단편 속에 그 시대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인명과 지명을 찾아보며 읽어간다면 더 많은 라틴 아메리카 현대사의 속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단편은 많은 것을 응축하고 있다. 그 응축된 사건은 우리가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사실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만큼 보일 뿐이다. 이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아가려면 과거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 분별력은 과거에 대한 정확한 판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 갈레아노는 우리에게 무수한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 단편의 뒤편에 가려진 또 하나의 진실을 찾아 보라고 말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였다. 1804년 아이티로부터 시작된 독립의 역사는 이 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의 독립을 알리는 역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페인을 대신한 새로운 지배자의 착취가 시작되는 역사였다. 이 착취의 고리를 끊어버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가톨릭 사제의 몸으로 고민하다 결국 게릴라에 합류한 뒤 정부군에게 사살된 카밀로 토레즈의 절규, "우리는 굶주림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영혼이 불멸인가를 놓고 다투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의미있는가?"라는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갈레아노는 "미국 국무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인권 유린에 관한 자체 보고서에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살인' 대신에 '생명의 불법적 또는 자의적 박탈'이라고 써야 한다. 또 CIA는 테러 교범에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뺐다. 대신에 적을 죽이거나 죽이게 할 때 '무력화'한다고 씌어 있다"라는 글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는 분명 변화를 갈망하고, 변화되고 있지만 그것은 단어의 치환에 의한 착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무기력, "모르기 때문에 할 수도 없다"라는 식민시대의 관습이 위에서부터 타파되지 않는다면 그 미래 역시 없을 것이다. 그 선봉에 라틴 아메리카의 관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들의 실수의 소산이다. 그들은 피가 없는 목재 인간으로서 용기도 절망도 모른다. 반향은 하지만 목소리는 갖고 있지 않고, 질서를 전파할 줄은 알지만 이념을 전파할 줄은 모른다. 그리고 모든 의문을 이단으로, 모든 반대를 반역으로 간주하며 단일성과 합일성을 분간하지 못한다. 또 민중을 자신들이 귀를 잡고 인도해야만 하는 영원한 어린애로 생각한다"는 갈레아노의 예리한 관찰은 지금도 변함없는 관료의 속성으로 남아있다. 즉 관료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걸고 하는 모험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와 평등의 앞날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과테말라의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높은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 화산, 어머니 땅, 아버지 태양, 할머니 달과 그밖의 강한 모든 조상들에게 아이를 보여주며 탯줄을 묻고, 아이를 위험과 잘못에서 보호해달라고 간청한다고 한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조상들의 일부인 새 아이를 새로운 동반자로 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아이는 무럭 무럭 자라 새로운 세대를 이루고 이 세대는 또 자신의 아이를 심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자유를 향한 민중의 도전은 세대가 지속되는 한 지속됨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219,221,223,225,253쪽에 나오는 앨런 둘스와 존 포스터 둘스는 아마도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와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형제간이다. 특히 존 덜레스의 경우 덜레스 라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44쪽의 필렌더 크녹스Philander C. Knox는 필렌더 녹스 미 국무장관을 말하고 있다면 녹스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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