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기억 1 - 탄생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커다란 길 가 양 옆으로 노란 해바라기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는 감미롭고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인다. 노란 해바라기들은 하늘의 태양을 따라 선생님에게 지명받으려는 학생들처럼 고개를 길게 내밀며 돌고 있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인다. 이때 저 길 끝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망나니 총각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재미삼아 해바라기를 칼로 쳐서 베어 버린다.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린다. 그들이 지나고 난 뒤에 길 양편은 쓰러진 해바라기들로 어지럽다. 평화로웠던 공기는 해바라기들이 썩어가며 풍기는 냄새로 고약하다. 노란 색의 화사한 해바라기들은 태양빛에 의해 서서히 말라간다. 노란 꽃잎은 갈색으로 그리고 흙색으로 변해 마침내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꽃잎을 빼앗긴 줄기들은 바짝 말라가다 결국 지나가던 농부들의 노새 등에 실려가서 부엌의 아궁이 속으로 던져진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해바라기는 한줌의 연기로 화해 대기중으로 흩어진다. 해바라기가 쓰러졌던 길 양편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원래 주인이 차지하고 있던 장소를 빌려 새 생명을 피워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왼통 이름모를 꽃이며 풀들이다.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제 해바라기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이름모른 꽃과 풀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름을 붙여줄 뿐이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은 '아주 슬픈 책'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슬픔을 곡哭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더욱더 슬픔을 배가 시킨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역사도 함께 죽였다. 그들의 기억과 전통 또한 사라지게 하였다. 이 결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얼굴을 형상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북 아메리카의 지명은 온통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 웨일즈, 독일, 프랑스, 북구와 동구의 지명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지명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지명으로 도배되어 있다. 달라진 지명은 신화의 의미도 변색시킨다는 점이다. 신화가 변색된다는 것은 민족의 혼이 변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2년 스페인과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다. 신대륙 발견 5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스페인에서는 올림픽과 엑스포를 개최하였고, 미국에서도 백인들만의 잔치가 벌어졌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 행사에 일절 참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문명 파괴 5백주년 기념식'이라고 비아냥 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들의 조롱을 웃어 넘겼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런 승자의 여유가 패자들을 더욱 위축되게 하고 씁쓸하게 하였으리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신대륙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 땅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생성되었을 때부터 있어온 땅이 왜 새로운 땅이란 말인가. 원주민들은 이 단어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적 발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들에 의해 언제나 발견된 것으로 형상화된다. 즉 그곳에 원래부터 존재해있던 존재는 발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미생물 혹은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오로지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은 발견한 자의 것이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이런 흔적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복자들은 상륙한 다음 원주민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이 땅은 스페인 국왕의 영토가 되었고 당신들은 신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낭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기는 그 옆에서 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들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자신들이 차지한 땅에 대한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무도함이 5백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는 그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제 1권은 그 경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갈레아노는 백인들이 침략하기 이전의 시기는 신화의 세계로 정리해 놓았다. 연대가 적혀있지 않은 그 시기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멀리 느껴지는 역사 아닌 역사이며 신화 아닌 신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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