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루돌프 헤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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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다음 '나치의 자식들'과 '히틀러의 뜻대로'라는 책을 읽는다면-아니면 반대의 순서라도 괜찮다-나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내면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현준만의 "이야기 세계사 여행"에 소피아 리트빈스카의 '아우슈비츠 가스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나? 병동인 제4동에서 대규모 선발대회가 있었다. 3천명이 넘는 유대인 여자들이 이 선발 대회에서 행진을 해야 했다... 의사들 앞에서 완전히 알몸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어야 했다...몸매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나  너무 마른 사람들, 또는 어떤 이유에서든 그 양반들이 좋아하지 않는 몸을 가진 사람들 역시 번호를 받았다...나도 번호를 받았다...다음날 낮에 18동으로 옮겨졌다. 오후 다섯 시 반쯤 트럭이 왔고 우리는 동물과도 같이 완전히 알몸 상태로 트럭에 태워졌다. 우리가 실려간 곳은 화장터였다...그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가? 그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내가 가스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남편이 폴란드군 장교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루돌프 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부모들은 이 아이가 신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스탈린 처럼 아주 사소한 이유로 신부가 되는 길을 포기하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육체가 허락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부가 되기 위해 그동안 훈련하였던 자신만의 규칙적인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청빈, 순결, 순명"이라는 거룩한 종교적 모토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 가지 모토는 중요한 것이었다.

**스탈린 역시 신학교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인생은 그 당시 익혔던 종교적 금욕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 역시 의미심상하다.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순명,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순결, 가정과 과업만을 생각하는 청빈이라는 비뚤어진 인생관은 결국 그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도 모르는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었다. 종교는 자신의 신념을 필요로 하듯 맹목적인 충성 역시 신념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종교의 순교자가 떠받들임을 받듯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는 체제의 압잡이가 된다. 하지만 종교의 순교자는 피의 희생자이지만 체제의 순종자는 피의 도살자가 될 뿐이다.

루돌프 훼스는 순교자의 길을 택하는 대신 도살자의 길을 택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마비되어 자신이 도살자가 아니라 순교자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희생양이라고 부르던가...

훼스의 고백록은 자신의 변명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 변명이 역으로 체제의 잔혹함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는 인간의 한 성품으로 "측은지심"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편부당한 세계를 꿈꾼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침묵한다면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저항하려고 한다. 저항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은 체제의 옹호자가 될 수밖에 없다.

훼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용기에 따라 방관자가 될수도 아니면 순교자가 될 수도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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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혹은 방송에서 아랍인들의 이름을 들으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런 호기심은 Osama bin Laden의 이름을 들으면서 부쩍 커졌다. Osama란 이름은 아랍어로 Lion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 아랍인들은 이 이름을 들으며 정말로 '이름값을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외로 아랍의 이름은 기독교의 성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많아서 의아했다. Shoaib이란 이름은 구약의 출애급에 나오는 미디안의 예언자 Jethro-제스로 혹은 이드로-와  같은 의미였다.

Enoch-창세기에서 신이 살아있을 때 하늘로 데리고 갔다는 인물-은 Idris,

Noah-방주의 사나이-는 Nuh,

Abraham-유대인의 조상-은 Ibrahim,

Jesus는 Isa,

John-요한으로 알려져있다-은 Yahya,

Jonah-고래 뱃속에서 3일간 있었던 인물-는 Yunus,

Solomon 은Sulayman,

David-다윗-는 Daud,

Aaron-제사장인 아론-은 Harun(이 이름은 하룬 알 라시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알려져있다),

Moses는 Musa,

Job-부조리한 인물(?)인 욥-은 Ayub,

Joseph-요셉-은 Yusuf,

Jacob-야콥 또는 산티아고-는 Yaqub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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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
페터 아렌스 지음, 이재원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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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0년 유틀란트 반도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이후 유럽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될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113년 노레이아에서 로마군 2개군단을 섬멸할 정도로 강력한 집단이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이후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섬멸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런 강력한 인상은 200년 뒤에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란 책을 통해 도나우강과 라인강 이동의 민족들에 관한 기술을 남기게 하였다.

유럽사에 등장하는 게르만의 대이동은 그 명칭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실 게르만이라는 독립된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르만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명칭 속에는 앵글로-색슨족, 고트족, 롬바르드족,프랑크족, 알레마니족과 같이 다양한 부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이라고 할 때 우리들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연상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이 라인강 이동에서 건설되면서 게르만 = 독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은 19세기에 들어와 독일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게르만의 역사를 독일 역사에 편입시키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확고하게 고정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토이토부르그 숲에서 로마군단을 전멸시킨 부족이 케루스키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족을 독일인의 원형으로 확대해석하였던 것이다.

역사에서 볼 때 게르만의 이동은 기원 375년 훈족이 동고트족을 압박하면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훈족이 고트족을 압박하고 고트족은 인근 이웃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런 연쇄적인 압박과정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 게르만의 이동이라고 보고있다. 하지만 게르만의 이동은 훈족의 압박이 있기전 400여년동안 지속적으로 로마의 국경선-리메스-에서 발생하였다. 로마는 게르만을 회유하거나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회유한 게르만을 로마의 용병으로 삼아 다른 게르만을 공격하는 것을 근본정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로마의 정책을 로마가 군사력이 강력한 시기에는 용병들을 통제할 수있기에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로마제국 자체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할 수있었다.

실제로 기원 378년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로마의 군사력이 강력하지 않을 것으로 드러나자 로마제국의 국경선은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붕괴되고 말았다. 이제 게르만의 로마제국 영토로의 유입은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유럽을 무대로 자유로운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이동은 800년 샤를마뉴가 프랑크왕국으로 통합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게르만족이 남긴 흔적은 엄청나다는 점이다. 프랑크족은 기원275년 갈리아에 침입하여 로마화된 상태로 민족 대이동기를 맞이하였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 그곳에 유럽 최초의 민족국가를 세웠고, 이들의 왕국은 이슬람의 침공으로 붕괴되었지만 이후 기독교 왕국의 왕들은 자신들이 서고트왕국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경력에 잊지않고 덧붙였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하여 커다란 흔적을 남겼고, 앵글족과 색슨족으로 구성된 용병들은 브리튼 섬으로 들어가 확고하게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알레마니족, 부르군디족, 니벨룽족은 가장 유명한 전설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절대적인 생명력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이들 게르만 일파들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역사를 창조하였다.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게르만의 대이동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이란 용어 자체도 그렇지만 이동의 기간 또한 그렇다. 게르만의 대이동이 근 900여년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흉노족의 압박에 의한 급격한 이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르만이란 단어를 독일이라는 좁은 범위에 고착시킴으로해서 게르만 대이동이 유럽의 틀을 형성한 근본적인 사건이라는 점 또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르만의 본질을 잘 이해한다면 로마 문명이 붕괴되고 중세는 암흑속에서 시작되었다는 일반적인 가정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게르만들은 로마의 문명을 수백년 동안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했으며 민족 대이동시기에도 그것을 나름대로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로마는 게르만에 의해 몰락한 것도 아니고, 게르만 또한 로마의 문명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은 로마를 스승으로 삼아 서서히 자신들의 야만성을 교화하였고, 이 결과 476년 서로마제국을 접수할 수 있었고, 800년에는 동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현실적인 실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은 "로마의 전통과 게르만적 현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완벽하게 종합을 이루게 된"사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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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6-08-22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마제국쇠망사나 메로빙거 세계같은 책에서 약간씩 얻은 게르만족에 관한 지식을 한데모아서 보니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의 요점이 머리속에 정리가 잘 되는 것 같네요.

* 밑에서 3번째 줄에 467년은 오타인 것 같습니다^^;;

dohyosae 2006-08-2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메트리오스님, 반갑습니다. 더위가 나를 내가 아니게 합니다.
 

상징의 극대화.

역사상 가장 의미있으면서 영향력이 있는 상징체계를 고안한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

그는 빵panis과 포도주vinum라는 일상적인 주제를 살Corpus과 피Sanguinis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로 변형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Accipite et manducate ex hoc omnes: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Hoc est enim corpus meum.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빵이 몸이 되고, 그 몸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이 주제는 매우 심오한 신학과 철학의 주제를 담고 있다.  육신은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materia이다. 이것을 먹는 다는 것은 힘을 공유하는 것, 혹은 몸을 내어준 사람과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ccipite et bibite omnes: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Hic est enim calix sanguinis mei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Novi et aeterni testamenti. 

피는 생명을 뜻한다. 피는 영혼이다. 피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형상forma인 것이다. 신은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입김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었다. 그것은 입김을 불어 넣는 순간 생명과 영혼이 들어 온 것을 말한다. 온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생명인 피. 이 피의 주제는 드라큘라라는 소설을 통해 어떻게 변형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지만 본질적인 개념, 피=생명의 주제는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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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정복사
JURI SEMJIONOW / 경북대학교출판부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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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영구동토대에서는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토의 땅에 짧은 여름이 오면 지표가 2미터 깊이까지 녹기  때문에 고층건물처럼 덩치가 큰 건물을 지으려면 커다란 콘크리트기둥을 수없이 박아 놓고 1년을 기다렸다가 그 위에 건물을 올린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얼고 녹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가라앉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얼음과 추위만이 가득차있는 시베리아는 무한한 자원으로 인해 일찍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풍부한 모피로 그다음에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이 땅은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자연의 거칠음 때문에 개발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삶의 조건이 가혹한 땅으로 이주를 결심하는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이 동토의 땅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른바 '정치범'이라고 불리운 죄수 집단들이 이 혹한의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범들이 시베리아 개발에 투입되면서 이 지역은 과외의 소득을 얻게 되는데 당시의 가장 급진적이며 반항적인 사상이 이 동토지대에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럽인들의 문명생활-상대적인 것이지만-이 따라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런 연유로 시베리아는 가장 추운 지대이면서 사상적으로는 가장 뜨거운 지대였고 문화적으로는 부드러운 곳이었다.

 시베리아의 개발은 러시아가 처한 정치적상황의 산물이었다. 일찍부터 러시아는 대양으로 진출하기위한 부동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위해 부단한 남진정책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발트해와 흑해라는 한정된 지역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들 바다는 손쉽게 봉쇄당할 수 있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결과 서쪽과 남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들에게 남은 곳은 동쪽이었다. 이 험난한 부동항을 얻기 위한 개척의 역사가 바로 시베리아 개발사인 것이다. 그러기에 시베리아 개발에는 낭만적인 개척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자비함과 눈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도착하여 얼지 않은 항구를 발견하였을 때 그들은 이곳을 동방의 정복자-블라디보스톡-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땅이란 사실이다. 면적만도 미 대륙과 맞먹는 이 땅덩어리에 고작 2천5백만의 인구가 있을 뿐이다.  시베리아는 개발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을 한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책은 시베리아 개발의 주역인 코사크와 정치범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시베리아의 원주민은 아메리카의 인디안과같은 조연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책을 읽어가면 시베리아가 단순히 '자원의 보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베리아는 절대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단지 자신의 일부를 허용-이를 개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할 뿐이란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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