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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
페터 아렌스 지음, 이재원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기원전 120년 유틀란트 반도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이후 유럽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될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113년 노레이아에서 로마군 2개군단을 섬멸할 정도로 강력한 집단이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이후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섬멸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런 강력한 인상은 200년 뒤에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란 책을 통해 도나우강과 라인강 이동의 민족들에 관한 기술을 남기게 하였다.
유럽사에 등장하는 게르만의 대이동은 그 명칭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사실 게르만이라는 독립된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르만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명칭 속에는 앵글로-색슨족, 고트족, 롬바르드족,프랑크족, 알레마니족과 같이 다양한 부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이라고 할 때 우리들은 독일이라는 나라를 연상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이 라인강 이동에서 건설되면서 게르만 = 독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은 19세기에 들어와 독일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게르만의 역사를 독일 역사에 편입시키고자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확고하게 고정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토이토부르그 숲에서 로마군단을 전멸시킨 부족이 케루스키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족을 독일인의 원형으로 확대해석하였던 것이다.
역사에서 볼 때 게르만의 이동은 기원 375년 훈족이 동고트족을 압박하면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훈족이 고트족을 압박하고 고트족은 인근 이웃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런 연쇄적인 압박과정이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 게르만의 이동이라고 보고있다. 하지만 게르만의 이동은 훈족의 압박이 있기전 400여년동안 지속적으로 로마의 국경선-리메스-에서 발생하였다. 로마는 게르만을 회유하거나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회유한 게르만을 로마의 용병으로 삼아 다른 게르만을 공격하는 것을 근본정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로마의 정책을 로마가 군사력이 강력한 시기에는 용병들을 통제할 수있기에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로마제국 자체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할 수있었다.
실제로 기원 378년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로마의 군사력이 강력하지 않을 것으로 드러나자 로마제국의 국경선은 그 절대성을 상실하고 붕괴되고 말았다. 이제 게르만의 로마제국 영토로의 유입은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유럽을 무대로 자유로운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이동은 800년 샤를마뉴가 프랑크왕국으로 통합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게르만족이 남긴 흔적은 엄청나다는 점이다. 프랑크족은 기원275년 갈리아에 침입하여 로마화된 상태로 민족 대이동기를 맞이하였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 그곳에 유럽 최초의 민족국가를 세웠고, 이들의 왕국은 이슬람의 침공으로 붕괴되었지만 이후 기독교 왕국의 왕들은 자신들이 서고트왕국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경력에 잊지않고 덧붙였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하여 커다란 흔적을 남겼고, 앵글족과 색슨족으로 구성된 용병들은 브리튼 섬으로 들어가 확고하게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알레마니족, 부르군디족, 니벨룽족은 가장 유명한 전설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절대적인 생명력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이들 게르만 일파들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역사를 창조하였다.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게르만의 대이동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이란 용어 자체도 그렇지만 이동의 기간 또한 그렇다. 게르만의 대이동이 근 900여년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흉노족의 압박에 의한 급격한 이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르만이란 단어를 독일이라는 좁은 범위에 고착시킴으로해서 게르만 대이동이 유럽의 틀을 형성한 근본적인 사건이라는 점 또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르만의 본질을 잘 이해한다면 로마 문명이 붕괴되고 중세는 암흑속에서 시작되었다는 일반적인 가정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게르만들은 로마의 문명을 수백년 동안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했으며 민족 대이동시기에도 그것을 나름대로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로마는 게르만에 의해 몰락한 것도 아니고, 게르만 또한 로마의 문명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은 로마를 스승으로 삼아 서서히 자신들의 야만성을 교화하였고, 이 결과 476년 서로마제국을 접수할 수 있었고, 800년에는 동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현실적인 실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은 "로마의 전통과 게르만적 현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완벽하게 종합을 이루게 된"사건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