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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단 - 이슬람의 암살 전통
버나드 루이스 지음, 주민아 옮김, 이희수 감수 / 살림 / 2007년 11월
평점 :
암살暗殺. 굉장히 은밀하고 어두워 보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스마일파의 암살은 솔직히 명살明殺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암살자는 은밀하게 움직이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스마일파의 암살자는 이런 공식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은밀하게 다가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철저하게 드러내며 임무를 수행한다. 이스마일파의 자객은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은 이들 이스마일파가 단순한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라 신념에 기인한 당파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스마일파의 암살자들은 권력을 가진 지배 상류층만을 자신들의 목표로 설정했다. 게다가 이들은 단검만을 사용함으로서 목표물 이외의 대상이 피해를 입는 것을 최소화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이스마일파에 대한 신화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암살을 이렇게 특정 목표에 집중하면서 철저하게 광고효과를 노린 것은 소수파로서의 생존전략과 종교적 열성이 혼합된 결과였다. 하지만 서구의 사고방식에 의해 걸러진 이스마일파의 행위는 철저하게 왜곡되었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무시된채 암살이라는 그 자체에만 집착하므로서 이스마일파는 물론이고 이슬람 그 자체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주입시켰다는 점이다.
정말로 이스마일파는 그러하였을까? 사실 시아파의 분파로 갈라진 이스마일파는 그 종교적 심성에 의한다면 염세적일 수 있다는 점 부인할 수 없다. 알리 이후 꺽여진 정치적 주도권은 시아파를 금욕적이며 고행적이며 신비적인 종파로 변모하게 하였다. 이것은 다수 순니의 느슨한 종교적 감성에 자극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이유로 시아는 순니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소수 시아파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종파주의 혹은 분파주의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인도에서 시크교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순혈주의로 나아간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마일파가 암살집단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소수 종파로서 생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은 러시아 혁명에서 볼세비키가 살아남기 위해 행했던 행동과 맥을 같이한다. 이스마일파 역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고수하고 생존하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암살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 암살은 단순하면서도 철저한 방식을 채택함으로서 아랍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었다. 사실 이슬람은 자살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슬람의 자살에 대한 관점은 가톨릭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 자살자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혀있고, 그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스마일파의 이런 자살공격이 용인된 것은 다수의 폭력에 대한 소수의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아파 그리고 시아파 속에서의 이스마일파가 소수 중의 소수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시아와 이스마일파의 역사는 순니라는 이슬람의 주류에 대한 끊임없는 이의제기의 역사였다. 항상 이들 소수는 다수에게 왜라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그 왜라는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받았다면 수긍하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하였다.
이러한 이스마일파의 모습은 현재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테러에 대한 면죄부처럼 인용되지만 실제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시아뿐 아니라 순니의 대부분 신학자들은 이슬람의 테러에 반대하고 있다. 지하드라는 입장에서 테러를 보는 입장에서도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왜냐하면 살인은 원칙적으로 종교적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의 암살단을 다루고 있지만 실상은 현재의 이슬람과격주의자에 의해 행해지는 테러를 분석하는 시금석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이다-이 책의 초판이 70년대에 출판되었다. 1948년 1차 아랍전쟁의 부산물로 파생된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70년대 테러의 전주곡이었다. 난민캠프에서 젊은 시기를 보낸 20대의 젊은이들이 70년대에 들어와 세계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 대화보다는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테러 혹은 폭력 아니면 지하드는 아랍세계에서는 긍정적인 면으로 수용되었지만 서구유럽에서는 단순한 폭력으로 폄하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대응방식은 폭력의 질적 양적 확장을 불러 일으켰다.
현대의 테러가 이스마일파의 여정과 유사한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반복이라는 경구로 설명될 수 없다. 사실 종교는 실천적이지만 교리는 철저히 관념적이며 이론적이다. 삶의 행위라는 실천 속에 관념과 이론이 혼합된 세계는 모순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평화를 갈구하는 종교가 폭력을 사주하는 원인이 되면서 폭력을 옹호하는 이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혹은 자신들의 생존을 갈구했던 이스마일파의 현재는 소멸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스마일파는 소수의 종파로서 살아있지만 예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이스마일파의 암살 행위는 현대의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왜곡에 일조하였다. 이것은 한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못지않게 윤리적이며 평화적이다. 우리는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보여주었던 기사도적 정신을 잘 알고 있다. 살라딘의 행위는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설교한 그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런 살라딘의 행위는 이슬람 과격파의 테러행위에 의해 빛이 바랬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스마일파의 암살이 보르헤스가 어디선가 썼듯이, 예수를 찌른 창촉이 시대를 반복하며 결국은 케네디를 죽인 총알이 되었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반복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현재 아랍의 지하드 역시 역사 속의 이스마일파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암살단을 통해 현재의 지하드를 음미해 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