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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6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 지음, 박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 세대에게 소련 수상 니키타 흐루시쵸프의 이름을 듣고 연상되는 것은 U-2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이 U-2기를 이용하여 이란과 터어키에서 소련 영공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정찰활동을 하다 소련의 대공미사일에 U-2기가 격추되어 국제사건으로 비화되었다-U-2기 조종사 프란시스 게리 파워즈와 소련 스파이의 교환은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인 그루니케 다리를 양념으로 하여 60년대 스파이소설의 열광적인 소재가 되었다. 후르시쵸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오만함과 비도덕성을 유엔에서 강하게 성토하면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두드리는 해프닝을 벌였다. 서구인들의 눈에 흐루시쵸프의 이런 행위는 그들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선입관, 러시아의 후진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
흐루르시쵸프의 이런 몰염치는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곤한다. 당시 러시아는 떠오르는 강대국이었다. 라이카라는 개를 우주선에 태워 우주로 날려보내고-이는 소련의 공격용 미사일능력이 지구상 어느 지점으로도 날려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은근한 과시였다-중공업과 기초공업의 향상으로 조만간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나는 기대감에 부픈 시기이기도 했다. 유엔에서 후르시쵸프의 이런 해프닝은 소련의 이런 자신감에 바탕을 둔 의도적인 과시행위였다.
이런 흐루시쵸프가 소련이라는 거대 제국의 붕괴를 촉발시킨 첫걸음을 떼어 놓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56년 20차 전당대회에서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소련뿐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국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이란 그림자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 충격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유배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스탈린에게 독소전쟁은 큰 위기였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스탈린은 당이란 권력의 이름보다 러시아라는 감성에 호소함으로서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전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스탈린 사후에도 이런 신화를 깨부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런덴 흐루시쵸프는 스탈린 사후 3년이 채 되지않은 시점에서 스탈린 비판을 감행하였다.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은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스탈린의 개인 독재에 의해 당의 민주적 집단주의가 어떻게 붕괴되었으며, 그 결과 대조국전쟁에서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한 것을 흐루시쵸프는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흐루시쵸프의 이런 용기에도 불구하고 이 연설은 당의 이름이 아니라 흐루시쵸프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점인데, 당이 흐루시쵸프의 연설을 추인하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 흐루시쵸프 개인에 의해 스탈린 격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과 개인의 차이는 아주 명백한 것이다. 이 결과 흐루시쵸프는 61년 쿠바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 격하운동 역시 중단되고 다시 소련은 브레즈네프에 의해 새로운 개인숭배시대로 회귀한다.
하지만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세대들에 의해 소련은 80년대와 90년대에 커다란 변혁을 격게된다. 일시적인 사상의 자유를 통해 호흡한 자유의 공기는 그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 세대가 스탈린의 억압과 공포 속에서 전쟁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반면 스탈린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흐루시쵸프의 연설문을 통해 그 시대를 판단하고 앞으로의 시대를 가늠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고의 변혁으로 소련은 90년대에 공산주의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현 시점에서 이 연설문은 어쩌면 허공에 뜬 구름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연설문을 통해 개인의 독재와 우상화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를 가늠하게한다. 발전과 승리라는 표면적 이유로 인해 탄압과 학살, 그리고 강제수용소가 과소평가되었던 그 시대를 우리는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