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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18년 11월11일 11시11분 서부전선의 총성은 멈췄다. 4년여에 걸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유럽인들이 한 달이면 끝날 것일고 믿었던 전쟁이 무려 사 년을 끌었던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전쟁이 끝났을 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승전국이라고 자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 지긋한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패전국이라고 언급된 독일은 아쉬움이 팽배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귀국하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영국과 독일은 기쁨의 나눔이었지만 독일은 승전국처럼 당당한 분위기였다.
패전국 독일군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 문을 통해 귀국하였다. 이 문은 승리의 문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 독일은 자국의 병사들에게 이 문을 통해 귀국하게 함으로서 자신들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독일은 귀국하는 병사들에게 '우리 독일은 전세계를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귀국하는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전사자 추모식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조국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고귀한 죽음이라고 칭송하였다. 많은 독일인들은 전쟁이 자신의 땅에서가 아닌 이국에서 치뤄진 것에 대해 안도하였고, 자신의 조국이 적들에게 짖밟히지 않았음을 감사하였다.
당당한 독일은 연합국들에 의해 주도된 회담에서 동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교전국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가장 큰 피해국인 프랑스의 고집으로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이 베르사이유 조약 혹은 체제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이 결과 베르사이유 체제에 의해 독일에 강제로 이식된 모든 것-바이마르공화국으로 대표되는 민주적인 모든것-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배신자요 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20년 후에 나치가 득세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은 과연 필연적인 전쟁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떠올랐던 물음이었다. 어쩌면 독일이라는 가공의 실체에 대한 근거없는 두려움이 일차세계대전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독일의 허구적인 강대함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프러시아로 대표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헝가리로 대표되는 대독일주의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격돌이라고 책임을 미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지도자들은 실체를 붙잡기 보다는 허상을 부여잡음으로서 비극은 잉태되었다. 근거없는 낙관론과 보불전쟁의 패전에 따른 치욕에 대한 복수는 일차세계대전의 희극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들 유럽의 군사지도자들은 1905년의 러일전쟁과 1910년의 멕시코혁명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러일전쟁과 멕시코혁명은 근대적인 전투가 현대적인 전투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다.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참호와 수류탄으로 대표되는 이 전쟁과 내란은 고전적인 전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된 고지를 소총병들만으로 돌격하게 하여 대량살상을 방조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군부와 기관총으로 무장된 참호를 기병대로 돌파하려다 패배한 멕시코에서의 산쵸 비야의 예는 앞으로의 전쟁이 대량살상과 장기전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을 간과하였다. 오직 고전적인 전투 방식-돌격에 의해 적을 돌파한 뒤 적군의 수도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구 시대의 발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유럽의 지도자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은 보병이 아니라 기동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그나마 이런 현대적인 전투기술에 대한 이해에서 조금 나았던 독일이 전쟁 초반에 적국 영토로 진격하여 4년 내내 자국이 아닌 타국에 전쟁의 무대를 설치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 어리석은 전쟁의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차세계대전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영국과 독일과 러시아의 제왕들은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으로 이어진 사촌간이었다. 하지만 사촌간의 배아픈 경쟁이 유럽을 불안한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대륙의 어느 국가도 홀로 강하게 되는 것에 반대하는 영국의 고립주의적 간섭정책은 독일을 불편하게 하였고, 독일의 팽창정책은 러시아를 신경쓰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독일은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뒤늦은 해외식민지에 대한 도전은 식민지 제국인 영국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모든 요소가 폭발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실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실제로 영국은 자국이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지역-의 중립화만 보장된다면 대륙의 전쟁에 무관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전격전을 위해 이 지역의 침공이 불가피했고 영국은 이 지역이 침공되면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이 지역에 돌입했을 때 영국은 독일이 물러날 시간을 주었다. 반면 독일은 영국의 이러한 태도가 자국의 행동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독일의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침입의 명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각국의 오판과 우유부단함은 수 백만명의 유럽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었고, 그 넓은 플랑드르의 들판을 붉은 양귀비꽃으로 뒤덮이게 하였던 것이다. 8월의 한 달은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어리석음의 시작이었으며 대량살상의 문을 연 무더운 바람이었던 것이다.
*오래 전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소설 "1914년 8월"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탄넨베르그 전투의 비극을 재구성한 소설이었다. 질린스키 대공, 삼소노프와 렌넨캄프와 같이 발음이 멋있었던 러시아 장군들의 이름이 히미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비극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