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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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뜨거워 하얀 태양, 버석거리다 못해 조그만 충격에도 부서질 것만 같은 뜨거운 대지. 이 세계는 멜빌의 바다나 포크너의 요크나파타파와는 또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세계들에서 인간은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악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악은 우리를 번민하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악에 물들게한다. 원죄 이전의 악이기에 죄의식이 없는 것이니까.. 

머리가죽사냥꾼의 세계는 힘의 세계이다. 그 힘은 에이헙이나 콤프슨 가문이 지배하는 영역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절대적이며 숭고하기까지한 그 힘은 사악하기조차 하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일까? 과연 죽음만이 그 사악함 혹은 거대한 힘을 잠재울 수 있을까. 판사로 대표되는 집단에서는 개인은 없다. 오직 판사로 대표되는 집단의 우두머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집단에는 긴장도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없다. 오직 원시적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배고픈 짐승이 먹이감을 사냥하듯 돈을 위해 머리가죽을 수집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이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는 집단에게 있어 우연이란 없다. 에이헙의 배가 흰고래를 쫒듯 판사의 집단은 머리가죽을 쫒는다, 

집단은 독수리의 눈을 가지고 표범을 발을 가진 지도자를 원한다. 집단은 멀리보고 빨리 달리는 용맹함을 추종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벌거벗고 춤을 추는 의식은 집단최면의 또 다른 상징이다. 무아경 속에서 자신을 잊고 몽환속에 빠져들어가는 이들의 정신세계는 구원을 기다리는 절실함이 담겨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소년은 원시적 본능이 충실한 세계 속에서 성장한다. 그가 본 세계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태어난 세계와 그리 멀지 않다. 항상 폭력이 존재했고, 죽음이 가까이 있는 곳. 바로 사막이 그 접점이다. 사막은 문명과 원초적 본능을 갈라주는 경계선이다. 사막은 소년이 진정한 서부인(?)으로 자라기 위한 시험장이며 단련장이다. 소년은 네미 호수의 사제처럼 상대를 죽여야만 혹은 상대에게 죽어야만 진정한 자유인으로 태어날 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을까? 아마도 판사는 벌거벗고 가죽장화만 신은 모습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믿는 자에게 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핏빛 자오선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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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림원 이삭줍기 4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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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산 카나파니의 원죄는 "1948년"이다. 이 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한 해이면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처음으로 생겨난 해이기 때문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난민은 생겨나지 말았어야할 비극이 역사의 아이러니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전쟁을 잠시 피해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그 수많은 사람이들이 타국에서 이방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갓산 카나파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하이파에 돌아와서Aid ila Haifa"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을 통해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사실 70년대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작은 이스라엘이 거대한 아랍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스라엘과 아랍의 비교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똘똘하고 아랍은 멍청한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 것도 없고 석유만 가진 자들의 객기로 치부했던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갓산 카나파니의 "하이파로 돌아와서"을 읽었을 때 아! 아랍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기쁨을 나누며 서로를 생각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이파로 돌아와서"라는 작품의 골격은 아주 간단하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배경이다. 아랍인 부부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신의 어린 아이를 이스라엘에 남겨두고 피난을 같다가 1968년 6일전쟁이 끝난 후에 자신의 옛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오래 전에 두고 온 아이를 찾는다. 그런데 그 아이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군인이 되어 자신들을 찾아온다. 그 수많은 시간의 시차를 이해하기 전에 자신들의 아들은 부모에게 말한다. "도대체 당신들은 이 시간까지 무엇을 했냐고.."

정말로 부모 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일까? 갓산 카나파니의 혁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팔레스타인들에게 하나의 각성이 된다. 이런 갓산 카나파니의 정신은 1980년대에 "인티파타"의 원동력으로 살아남는다. 무엇을 했는가? 이 혁명적인 물음이 갓산 카나파니의 목숨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총칼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각성이었을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가 암살된 1972년은 뮌헨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그 해 8월26일부터 9월10일까지 펼쳐진 지구촌의 축제는 아랍의 검은 9월단에 의해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갓산 카나파니는 올림픽이 개최되기 두 달 전인 1972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7월 8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스라엘이 올림픽이라는 거창한 축제를 앞두고 서둘러 살해해야만 했던 갓산 카나파니의 잠재력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총칼이라는 투쟁에 인간의 자각이라는 근육을 접목함으로서 팔레스타인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은 활동적인 육체의 투쟁이 아니라 끊임없는 물음표의 세계이다. 왜? 왜? 왜?라는 그의 물음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폭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 왜? 왜?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스라엘의 도덕적 상태는 더 큰 훼손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암살함으로서 올림픽 참가 거부를 당할 수 있었음에도 그를 죽여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고민은 자신이 폭력적으로 변함으로서 존재를 상실하였다. 반대로 갓산 카나파니가 암살 당한 후 검은 9월단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 역시 자신들의 정당함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그래서 갓산 카나파니의 문학적 세계는 개인의 고통을 통해 전체의 구원으로 향하는 통곡의 문학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1972년 7월 8일 하나의 결정을 하였다. 그들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라는 예언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갓산 카나파니를 죽임으로서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는 그 순교자 목록의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갓산 카나파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고난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하이파에 돌아와서"라는 작품이 없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나의 히미한 기억으로 1973-4에 "독서신문"에 번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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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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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11일 11시11분 서부전선의 총성은 멈췄다. 4년여에 걸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유럽인들이 한 달이면 끝날 것일고 믿었던 전쟁이 무려 사 년을 끌었던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전쟁이 끝났을 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승전국이라고 자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그 지긋한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패전국이라고 언급된 독일은 아쉬움이 팽배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귀국하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영국과 독일은 기쁨의 나눔이었지만 독일은 승전국처럼 당당한 분위기였다.

패전국 독일군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 문을 통해 귀국하였다. 이 문은 승리의 문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었다. 독일은 자국의 병사들에게 이 문을 통해 귀국하게 함으로서 자신들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독일은 귀국하는 병사들에게 '우리 독일은 전세계를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귀국하는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전사자 추모식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조국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고귀한 죽음이라고 칭송하였다. 많은 독일인들은 전쟁이 자신의 땅에서가 아닌 이국에서 치뤄진 것에 대해 안도하였고, 자신의 조국이 적들에게 짖밟히지 않았음을 감사하였다.

당당한 독일은 연합국들에 의해 주도된 회담에서 동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교전국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가장 큰 피해국인 프랑스의 고집으로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과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이 베르사이유 조약 혹은 체제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이 결과 베르사이유 체제에 의해 독일에 강제로 이식된 모든 것-바이마르공화국으로 대표되는 민주적인 모든것-을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배신자요 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20년 후에 나치가 득세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은 과연 필연적인 전쟁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떠올랐던 물음이었다. 어쩌면 독일이라는 가공의 실체에 대한 근거없는 두려움이 일차세계대전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독일의 허구적인 강대함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프러시아로 대표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헝가리로 대표되는 대독일주의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격돌이라고 책임을 미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지도자들은 실체를 붙잡기 보다는 허상을 부여잡음으로서 비극은 잉태되었다. 근거없는 낙관론과 보불전쟁의 패전에 따른 치욕에 대한 복수는 일차세계대전의 희극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들 유럽의 군사지도자들은 1905년의 러일전쟁과 1910년의 멕시코혁명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러일전쟁과 멕시코혁명은 근대적인 전투가 현대적인 전투로 전환하는 분기점이었다.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참호와 수류탄으로 대표되는 이 전쟁과 내란은 고전적인 전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무장된 고지를 소총병들만으로 돌격하게 하여 대량살상을 방조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군부와 기관총으로 무장된 참호를 기병대로 돌파하려다 패배한 멕시코에서의 산쵸 비야의 예는 앞으로의 전쟁이 대량살상과 장기전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을 간과하였다. 오직 고전적인 전투 방식-돌격에 의해 적을 돌파한 뒤 적군의 수도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구 시대의 발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유럽의 지도자들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은 보병이 아니라 기동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그나마 이런 현대적인 전투기술에 대한 이해에서 조금 나았던 독일이 전쟁 초반에 적국 영토로 진격하여 4년 내내 자국이 아닌 타국에 전쟁의 무대를 설치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 어리석은 전쟁의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차세계대전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영국과 독일과 러시아의 제왕들은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으로 이어진 사촌간이었다. 하지만 사촌간의 배아픈 경쟁이 유럽을 불안한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대륙의 어느 국가도 홀로 강하게 되는 것에 반대하는 영국의 고립주의적 간섭정책은 독일을 불편하게 하였고, 독일의 팽창정책은 러시아를 신경쓰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독일은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뒤늦은 해외식민지에 대한 도전은 식민지 제국인 영국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모든 요소가 폭발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실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실제로 영국은 자국이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플랑드르 지방-지금의 벨기에지역-의 중립화만 보장된다면 대륙의 전쟁에 무관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전격전을 위해 이 지역의 침공이 불가피했고 영국은 이 지역이 침공되면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이 지역에 돌입했을 때 영국은 독일이 물러날 시간을 주었다. 반면 독일은 영국의 이러한 태도가 자국의 행동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독일의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침입의 명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각국의 오판과 우유부단함은 수 백만명의 유럽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었고, 그 넓은 플랑드르의 들판을 붉은 양귀비꽃으로 뒤덮이게 하였던 것이다. 8월의 한 달은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어리석음의 시작이었으며 대량살상의 문을 연 무더운 바람이었던 것이다.

*오래 전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소설 "1914년 8월"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탄넨베르그 전투의 비극을 재구성한 소설이었다. 질린스키 대공, 삼소노프와 렌넨캄프와 같이 발음이 멋있었던 러시아 장군들의 이름이 히미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비극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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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江의 도도한 흐름은 어떤 역학적인 심오함이 있을까?

물은 앞에서 끌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뒤에서 밀어주는 것일까? 앞에서 끌어준다면 뒤는 수동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뒤에서 밀어준다면 앞이 수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 어느 한 면이 수동적이었던 적이 있을까? 판단이 오직 뒷 사람보다 앞에 살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우리들이 반복해서 시행하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은 반복을 통해서 익숙해진다.하지만 역사는 일회성이고 반복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약간의 유보가 필요하다. 일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다르다. 일이 끝난 다음에 평가를 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평가가 그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이다. 그런데 그 반작용을 그 시대를 결정하는 판단으로 환치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그 시대를 판단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군대의 신화를 아는가? 그 상황은 절대절명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절대 복종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대한 예비역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대는 절대 복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심의 세계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월 혹은 시간이라는 좀이 현실을 개인의 신화로 각색하기 때문이다.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은 그 삶이 어떤지를 잘 안다. 그렇기에 酒席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관용스럽게 용서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의 자존심이 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 군대 생활의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잔인한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진실을 자신의 가슴속에 뭍고 가는 것이다.

단체의 비밀을 토설하는 사람이 배반자이듯 자신의 시대의 부끄러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용사였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부끄러움은 삶의 과정에서 현실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난 뒤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지 미래 혹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저히 현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사랑을 설파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면 영원함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찰라를 생각하기에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長江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밀리는 세대인가, 아니면 떠미는 세대인가?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를 보는 마음의 신중함이 싹트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눈으로 보지 말자. 왜 역사를 현실의 잣대로 보는가? 마음으로 그것도 깊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눈으로 보면 모든 역사는 현실이 된다. 하지만 마음으로 보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현실과 진실을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향하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절대로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분법은 투쟁일 뿐이다. 그것은 헤겔이 이야기한 정-반-합의 끝임없는 우르보스의 순환이 될 수 있다. 역사가 전진이 아니라 끝임없는 순환이라면 우리 역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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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적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박정희.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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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 세상에서 가장 치밀한 민족인 독일인들이 어떻게 한낱 선동꾼인 사람에게 넘어가 고통의 나락속으로 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선택했고, 믿었으며 제국의 황혼때까지 그를 숭배하였다. 왜 그들은 그렇게 하였을까? 독일은 언제나 유럽 세계의 변방이었다. 허울뿐인 제1제국-하이네는 이 제국을 구름 위에 세워진 제국으로 묘사했다-과 프랑스를 꺽고 통일된 제2제국은 1차세계대전으로 몰락하였다. 아마도 독일인들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유럽 세계가 자신들이 성장하고 주도적인 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시기하여 베르사이유라는 족쇄로 얽어매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독일의 감성은 베르사이유에 반대하는 것은 무조건 선이고 이것에 동조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였다. 즉 베르사이유를 강요한 서구 민주주의 세력은 악이고 이를 거부하는 독일인은 선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이마르 체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번졌고, 결국 히틀러가 나치즘으로 대두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왜 이성의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독일인들이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독일의 심성을 가장 크게 보여주는 것은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바그너의 음악은 몇몇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지루하다. 그 엄청난 양의 악보 속에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강렬함이다. 하지만 그 짧은 강렬함에 빠져들면 바그너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가 되고 이 세계는 독일이 된다. 신화와 이성은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 르네 지라르는 신화의 세계는 은폐된 거짓의 세계라고 보았다. 즉 지라르는 신화 속의 영웅담은 약탈과 살인과 범죄를 교묘하게 은폐한 기록이라고 보았다. 즉 신화의 세계를 뒤집어 보면 그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독일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바그너가 숭상한 신화의 세계 역시 그러하다는 점이다. 그 신화 속에 미화되어 있는 폭력과 살인의 미학은 독일이 본받아야 할 세계가 아니라 이성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세계였다. 하지만 언제나 신화는 이성을 압도하였고, 그 신화의 세계가 독일의 자존심으로 비약하면서 독일의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반면 이성으로 언제나 반박받는 성서의 세계는 신화가 아니라 진실의 세계로 본다. 여기에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있다. 그것은 고통이며 자기 비하이다. 이런 세계는 독일인의 세계가 아니라 그들이 박해한 열등한 민족의 세계였던 것이다. 독일은 자신들이 이성의 민족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면서 감성의 세계에 살았다. 윤리의 세계에 살고자 하였지만 범죄의 신화속에 침잠하였다.

사실 독일의 역사에서 이성이 지배했던 시기가 얼마나 되었던가? 독일이 역사에서 일어서던 시기에는 항상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였다. 합리성은 언제나 독일을 분열시켰을 뿐 통합에는 신화와 감성이 작용하였다. 언제나 신화와 감성은 이성을 뛰어 넘었다. 그 깊숙한 시원에는 열등감이 있었다는 점이다. 게르만이라는 단어는 로마라는 거대함 속에서 언제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런 열등감은 게르만의 신화를 극대화시켰고 그것을 통해 독일의 자존심과 아니 자부심으로 승화시켰다. 그 조야한 신화가 이성을 뛰어넘는 실재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국민으로서의 책임감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 속에서 독일이 차지할 위치와 역할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히틀러의 이야기에 많은 독일인들은 암묵적으로 지지를 표하였다. 즉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신화적 전망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그 미래가 파괴의 신이 지배하는 세계일지라도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지지한 세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아니 신화가 지배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신화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가 추구하는 영웅의 세계가 도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의 새로운 신화를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찾았다. 그것은 아주 절묘한 것이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신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즉 '등 뒤의 칼'이라는 희생양 찾기 이론이 횡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세계속에서 히틀러는 서서히 솟아오르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히로시마와 같은 의미였다. 전쟁의 가해자에서 어느 새 피해자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독일이라는 거대한 힘을 주변국들이 갈기갈기 찟어 놓은 것으로 이해하였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신화를 독일인들에게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베르사이유 조약을 하나 하나 파기해 나가는 그 과정이 독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고, 결국 독일이라는 새로운 천년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으로 독일인들이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업을 히틀러가 이루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독일인들이 생각하고 있던그 모든 것을 히틀러가 이루어 주었다고 믿음으로서 그들은 히틀러의 추종자에서 협력자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히 상상속에서만 생각한 것을 실재로 이루어준 사람에 대한 그들의 보답이었다.

이 책과 병행하여 르네 지라르의 책을 다시 읽어 보고 있다. <희생양>과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인데 여기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읽으며 독일인과 히틀러를 생각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히틀러는 스스로 독일 민족을 구원하는 예수를 자처했지만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숨도 보전할 수 없는 나약한 헤로데였고, 사악한 유다였다는 점이다. 독일인들은 예수가 혁명적인 왕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한 유다처럼 또는 세례자 요한의 목이 쟁반에 담겨온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못했던 헤로데처럼 히틀러가 독일의 영광이 아니라 파멸을 가져온 베르세르크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같이 죽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성이 아니라 신화가 지배한 세계의 비극이었고 독일의 멍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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