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江의 도도한 흐름은 어떤 역학적인 심오함이 있을까?

물은 앞에서 끌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뒤에서 밀어주는 것일까? 앞에서 끌어준다면 뒤는 수동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뒤에서 밀어준다면 앞이 수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 어느 한 면이 수동적이었던 적이 있을까? 판단이 오직 뒷 사람보다 앞에 살기에 가능한 것이라면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우리들이 반복해서 시행하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은 반복을 통해서 익숙해진다.하지만 역사는 일회성이고 반복이 불가능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약간의 유보가 필요하다. 일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다르다. 일이 끝난 다음에 평가를 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 평가가 그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반작용이다. 그런데 그 반작용을 그 시대를 결정하는 판단으로 환치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그 시대를 판단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닐까?

군대의 신화를 아는가? 그 상황은 절대절명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절대 복종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대한 예비역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대는 절대 복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심의 세계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세월 혹은 시간이라는 좀이 현실을 개인의 신화로 각색하기 때문이다.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은 그 삶이 어떤지를 잘 안다. 그렇기에 酒席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관용스럽게 용서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의 자존심이 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 군대 생활의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잔인한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진실을 자신의 가슴속에 뭍고 가는 것이다.

단체의 비밀을 토설하는 사람이 배반자이듯 자신의 시대의 부끄러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용사였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부끄러움은 삶의 과정에서 현실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난 뒤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지 미래 혹은 과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저히 현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사랑을 설파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면 영원함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찰라를 생각하기에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長江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밀리는 세대인가, 아니면 떠미는 세대인가?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를 보는 마음의 신중함이 싹트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눈으로 보지 말자. 왜 역사를 현실의 잣대로 보는가? 마음으로 그것도 깊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눈으로 보면 모든 역사는 현실이 된다. 하지만 마음으로 보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현실과 진실을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향하게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절대로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분법은 투쟁일 뿐이다. 그것은 헤겔이 이야기한 정-반-합의 끝임없는 우르보스의 순환이 될 수 있다. 역사가 전진이 아니라 끝임없는 순환이라면 우리 역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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