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림원 이삭줍기 4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갓산 카나파니의 원죄는 "1948년"이다. 이 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한 해이면서, 팔레스타인 난민이 처음으로 생겨난 해이기 때문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난민은 생겨나지 말았어야할 비극이 역사의 아이러니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전쟁을 잠시 피해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그 수많은 사람이들이 타국에서 이방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갓산 카나파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하이파에 돌아와서Aid ila Haifa"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을 통해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사실 70년대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작은 이스라엘이 거대한 아랍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스라엘과 아랍의 비교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똘똘하고 아랍은 멍청한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 것도 없고 석유만 가진 자들의 객기로 치부했던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갓산 카나파니의 "하이파로 돌아와서"을 읽었을 때 아! 아랍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기쁨을 나누며 서로를 생각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이파로 돌아와서"라는 작품의 골격은 아주 간단하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배경이다. 아랍인 부부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신의 어린 아이를 이스라엘에 남겨두고 피난을 같다가 1968년 6일전쟁이 끝난 후에 자신의 옛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오래 전에 두고 온 아이를 찾는다. 그런데 그 아이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군인이 되어 자신들을 찾아온다. 그 수많은 시간의 시차를 이해하기 전에 자신들의 아들은 부모에게 말한다. "도대체 당신들은 이 시간까지 무엇을 했냐고.."

정말로 부모 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일까? 갓산 카나파니의 혁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팔레스타인들에게 하나의 각성이 된다. 이런 갓산 카나파니의 정신은 1980년대에 "인티파타"의 원동력으로 살아남는다. 무엇을 했는가? 이 혁명적인 물음이 갓산 카나파니의 목숨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총칼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각성이었을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가 암살된 1972년은 뮌헨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그 해 8월26일부터 9월10일까지 펼쳐진 지구촌의 축제는 아랍의 검은 9월단에 의해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갓산 카나파니는 올림픽이 개최되기 두 달 전인 1972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7월 8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스라엘이 올림픽이라는 거창한 축제를 앞두고 서둘러 살해해야만 했던 갓산 카나파니의 잠재력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총칼이라는 투쟁에 인간의 자각이라는 근육을 접목함으로서 팔레스타인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은 활동적인 육체의 투쟁이 아니라 끊임없는 물음표의 세계이다. 왜? 왜? 왜?라는 그의 물음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폭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 왜? 왜?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스라엘의 도덕적 상태는 더 큰 훼손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암살함으로서 올림픽 참가 거부를 당할 수 있었음에도 그를 죽여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고민은 자신이 폭력적으로 변함으로서 존재를 상실하였다. 반대로 갓산 카나파니가 암살 당한 후 검은 9월단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 역시 자신들의 정당함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그래서 갓산 카나파니의 문학적 세계는 개인의 고통을 통해 전체의 구원으로 향하는 통곡의 문학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1972년 7월 8일 하나의 결정을 하였다. 그들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라는 예언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갓산 카나파니를 죽임으로서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는 그 순교자 목록의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갓산 카나파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고난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하이파에 돌아와서"라는 작품이 없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나의 히미한 기억으로 1973-4에 "독서신문"에 번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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