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교류사 연구
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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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수일교수가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한데 모은 논총論叢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쉽게 접해보지 못한 글들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대진경교유행중국비>나 <임진왜란에 대한 중국 학계의 인식과 평가>, <중세 아랍인들의 신라 지리관>과 같은 논문들의 신선함은 이 책을 읽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역사시간에 검은 오석에 새겨진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대진경교비의 초역문을 읽어 내려가는 감흥은 특별했다.  이 비는 중국으로 전파된 <네스토리우스교>가 어떻게 중국적으로 이해되어가는가를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기독교 사상을 자신들의 익숙한 종교적 표현으로 기술하는 것을 볼 때 중국이란 나라가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그 역사의 깊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한 동양 삼국인 한. 중. 일의 관점을 볼 수 있는 논문에서는 중국의 입장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의 원인이 전국을 통일한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국내의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을 침입했다고 보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일본의 영토확장야심을 가장 주된 요인으로 보고 부차적인 요인으로는 풍신수길의 정치적 야심과 새로이 대두된 상인계급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외확장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이런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아주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명군의 참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명은 조선이 붕괴되면 자국의 안전이 위험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조선원조를 결정하였음에도 이를 양국관계의 의리상 거절할 수 없는 도의에 의한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 논문은 앞으로 전개될 한국 사학계와 중국 사학계의 역사인식에 대한 차이점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다.


그밖에도 아랍에서 본 신라의 지리관이나 저자의 전공인 아랍세계에 관한 논문-특히 회회고回回考-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복식과 서역 복식간의 공통 요소>란 논문을 읽다보면 이 책의 제목 처럼 서역과 우리의 문명 교류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질적인 두 세계가 복장에서 상관성과 근연성이 있음에도 한국적인 것이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독자성과 고유성 때문이라는 저자의 결론은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5천년을 외세의 압박에서 견뎌온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고유성과 독자성은 바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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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 1 - 풍속과 사회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 외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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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을 정화하기 위해 공창公娼을 폐쇄해 버렸다. 외견상 빈은 도덕적으로 정화된 듯 보였다. 하지만 공창에서 쫒겨난 창녀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져 도시 전체를 사창가로 만들었다. 즉 공창을 없애자 쫒겨난 창녀들은 거리의 창녀 즉, 가창街娼이 되었다. 이것은 도덕이란 문구로 인간-주로 남성-의 욕구분출을 막아 버릴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패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의 사회사를 논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상황이 모두 고려되어야만 한다. 한예로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는 현대처럼 범죄로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들의 밀집대형이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고도 주장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신전 매음이 성행하였는데 그것은 매음 당사자의 경제적인 사정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성공하자 제일 먼저 사창가를 폐쇄시키고 창녀들을 재교육시켜 사회로 내보냈다. 하지만 개방. 개혁이 되면서 이들 나라에 가장 먼저 활성화 된것이 홍등산업이었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직업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여기서 낙오된 여성들은 사창가로 흘러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예에서 보듯 성의 사회사는 인간의 도덕적 끈의 약화가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상황에서 발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성의 사회사는 도덕적 주입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얽혀있는 요소들을 고려하고 제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주목하게 된 것은 푹스의  하수도 이론이다. 푹스는 오물을 하수도로만 흐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도로 위로도 흐르게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성의 본질을 가리는 것은 어찌보면 "포템킨의 마을"과 같은 가식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정치가들은 성에 대한 제도를 마련할 때면 이 포템킨의 마을 효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시대를 따라 성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달라지지만 인간의 본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종교적 의미의 성 이해-자손을 낳아 번성하라-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앞질러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을 억압하는 사회일수록 성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사실이다. 성의 왜곡은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성의 왜곡은 억압된 상상에서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성에 탐닉한다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제는 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성을 검열함으로서 제도는 인간의 본성을 콘트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의 통제는 식량의 배급제와 같이 인간의 활동범위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적인 정권이 붕괴되면 가장 먼저 성적인 억압이 해체되면서 그동안 꿈꿔왔던 환상을 실현할 대체수단을 찾게된다. 역사 속에서 억압이냐 자유냐의 갈림길은 남녀 공히 사타구니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은 재미있으면서도 우리가 정치적 동물이란 사실을 알게해주는 표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또한 정치적인 견해에 치중되어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너그럽게 보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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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三田忖泰助 / 나루 / 199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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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이야기 하나


일본인들은 이어령교수가 지적했듯이 축소지향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민족성은 미시사를 저술하는데 아주 딱 맞는 형질이라고 본다. 환관이란 책 역시 일본인의 세밀한 눈길에 포착된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 역사의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는 것은 마치 세포를 관찰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몸체를 그리는 과학의 세계와 유사한 것이다. 그만큼 미시사는 많은 자료를 섭렵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시사는 기록하고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는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이야기 둘.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부형(거세형)을 당한 직후 그 고통과 치욕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서에서 이때의 심정을 "몸이 망가져 세상에도 쓰이지 못하는구나" "뜻이 답답하고 그 맺힌 바가 있어 그 도를 통할 수 없으므로 지나간 일을 기술하고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고 적었다. 당시 사마천은 이理에도 의거할 수 없고, 지智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환관 제도가 중국에서 왕조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특성 때문이었다.  천자는 그 상징성에 있어서 일반인들과는 격리된 상태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보좌하기 위해서는 일반인과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환관 제도를 폐지하지 못하고 더욱더 정교한 정치체제로 만든 이유는 환관 제도 그 자체가 황제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환관을 이용하여 관료들이 대두하는 것을 억제하기도 하고 관료들을 이용하여 환관들의 발호를 견제하게 하기도 하였다. 즉 환관 제도는 황제권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정치제도였던 것이다. 환관 제도는 청이 멸망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 황제가 없는 곳에 환관은 존재할 수 없으며, 환관이 없는 황제는 무력한 상징성만이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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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유혹 - 합본양장본 - 재미있는 열세 가지 색깔 이야기
에바 헬러 지음, 이영희 옮김, 문은배 감수 / 예담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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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사물은 아름답게 채색되었을 때 아름답다고 일컬어 진다>고 서술하였다. 여기서 토마스는 색을 빛이란 관념과 동일시하는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토마스에게 색이란 신의 은총인 빛의 다른 형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반면 색을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였던 보나벤뚜라는 빛의 단계 속에 색을 집어 넣고 있다. 보나벤뚜라는 빛을 룩스, 루멘, 색채-광휘-의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룩스는 빛 그 자체를, 루멘은 공간속을 돌아다니는 빛을 말하였다. 이 루멘이 공간속을 돌아다니다 물체에 반사되면 광휘가 되고 지상의 물체에 반사되면 색채가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색채나 광휘는 루멘을 형상화 시키는 것이고, 루멘은 룩스를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토마스나 보나벤뚜라는 신의 은총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색이란 시각적인 것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색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자연의 감각인 것이다.


에바 헬러는 이런 색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중세와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변모하는 색의 세계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괴테가 문필가가 아닌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의식하며 써내려간 색채론을 여러군데서 언급하며 그의 과학적 오류를 변명하는 것은 독일인으로서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독일인 다운 꼼꼼함으로 색의 세계를 펼쳐 나간다. 이 작가의 작업이 얼마나 치밀하고 폭이 넓었는가는 색에 대한 몇 가지 책-블루, 파워 오브 컬러,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을 읽어보면 이 책의 내용이 많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색의 역사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색의 심리학과 색의 사회학도 섞여있다. 한마디로 색으로 보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역사는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정이나 모든 색을 반사하는 흰색과 같은 극단적인 역사가 아니라 조화로운 스펙트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이다.


사족: 괴테의 색채론도 번역되어 시중에 나와있다. 괴테의 임종시 마지막 말이 <내게 빛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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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渤海考) - 지혜의 샘.한국고전총서 1
유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 홍익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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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존재했던 발해.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이 동모산에서 건국한 발해의 역사는 300여년간 존속한 국가임에도 그 흔적은 미미하다. 이러한 발해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민감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발해는 한.중.러 삼국에 걸쳐 존재한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중국, 러시아는 발해에 대해 자국의 정치적 입장과 유사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당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고 보는 반면, 한국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역사의 일부이며 독립왕국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는 발해를 중국사나 한국사의 범주에 넣기 보다는 독립적인 말갈국의 역사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해와 가장 외교관계가 왕성했던 일본은 러시아와 유사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놓고 볼 때 발해의 역사는 어떤 각도에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발해고가 저술된 18세기는 조선의 사림사회가 주자학 일변도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자하는 운동이 왕성한 시기였다. 이 당시 청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일단의 학자들이 저술을 통해 국가 부강의 비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들을 역사에서는 북학파라고 한다. 이 북학파는 정치.경제.문화.역사에 있어서 주자학적인 의리관을 대신하여 실사구시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역사학에 있어서 조선이 소중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중국과 대등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주국으로서의 한국 역사를 기술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발해고는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발해고로 인해 발해사는 정식으로 한국의 역사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발해는 아직 우리에게 먼 역사의 세계 속에 속한다. 우리 민족 고대사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발해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더욱 중요한 역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발해고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국서고國書考이다. 이 부분은 속일본기에 적혀있는 발해의 국서를 그대로 적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분만을 제외한다면  발해고는 발해의 역사를 개괄하는데 아주 유익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교통도 불편하고, 자료의 수집에도 한계가 있던 시절 이만한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신산한 고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문득 문득 떠올랐다. 그의 노력 만큼이나 한국사에 있어서 값진 선물을 후세인들에게 남겨 준것이 몹내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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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andy 2004-09-02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왕청리(王承禮)가 쓴 <발해의 역사>(한림대학교 출판부, 1988)를 통해 처음으로 발해라는 실체와 접했습니다. 평면적인 서술 위주로 되어 있어 읽는 재미는 별로인 책이지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국사책에서 한두 페이지 나오고 마는 발해에 대해 한 권 분량의 글을 쓸 만큼의 자료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발해사만 전문적으로 다룬 책들이 몇 권 더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있어 발해는 아직도 까마득히 멀리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발해사 연구의 주춧돌이라 할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오고,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제 이야기 발해사 수준이 아닌 사료를 파야 하겠죠.

사실 <발해의 역사>에서부터 이미 동북공정의 싹은 보였습니다. 대응이 늦어도 너무나 한참 늦어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