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三田忖泰助 / 나루 / 1992년 6월
평점 :
절판


지나가는 이야기 하나


일본인들은 이어령교수가 지적했듯이 축소지향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민족성은 미시사를 저술하는데 아주 딱 맞는 형질이라고 본다. 환관이란 책 역시 일본인의 세밀한 눈길에 포착된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 역사의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는 것은 마치 세포를 관찰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몸체를 그리는 과학의 세계와 유사한 것이다. 그만큼 미시사는 많은 자료를 섭렵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시사는 기록하고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는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이야기 둘.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부형(거세형)을 당한 직후 그 고통과 치욕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서에서 이때의 심정을 "몸이 망가져 세상에도 쓰이지 못하는구나" "뜻이 답답하고 그 맺힌 바가 있어 그 도를 통할 수 없으므로 지나간 일을 기술하고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고 적었다. 당시 사마천은 이理에도 의거할 수 없고, 지智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환관 제도가 중국에서 왕조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특성 때문이었다.  천자는 그 상징성에 있어서 일반인들과는 격리된 상태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보좌하기 위해서는 일반인과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환관 제도를 폐지하지 못하고 더욱더 정교한 정치체제로 만든 이유는 환관 제도 그 자체가 황제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환관을 이용하여 관료들이 대두하는 것을 억제하기도 하고 관료들을 이용하여 환관들의 발호를 견제하게 하기도 하였다. 즉 환관 제도는 황제권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정치제도였던 것이다. 환관 제도는 청이 멸망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 황제가 없는 곳에 환관은 존재할 수 없으며, 환관이 없는 황제는 무력한 상징성만이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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