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영미의 소설 <청동정원>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자의 자서전? 한국적 성장소설? 이 소설 아닌 소설의 스토리가 그녀의 직접적인 경험에, 근접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밀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은 이런 분류를 어렵게 만든다. 1990년대 초 어느 날인가, 한겨레에 실린 그녀의 시 선운사를 본 순간, , 이거 예사롭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녀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나 역시 남들처럼 흥미로운, 그리고 신선하고도 도발적인 시집으로 읽었다. 그녀의 시는 저 만치 떨어진 관조의 자리가 아니라 제 삶에서, 제 몸뚱아리로 겪고, 그 몸뚱아리에 얼룩져 있는 것들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시는 가장 직접적으로 제가 겪어온 삶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르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영미의 시는 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라 말해도 좋다. 그녀만큼 그녀의 시와 한몸임을 보여주는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청동정원>을 세모의 끝, 바람 불어 추운 겨울날 새벽에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끊었던 담배를 피다 끄다 하면서, 착잡하고 안타깝고 그립고 아쉬워하면서, 재미있게(라기보다 차라리 어이없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식간에 넘겨 버렸다. 왜 소설 속 이애린(아니 최영미)는 이 모양 이 꼴로 살았던가. 그녀의 지난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 살았다는 판단이 아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역사의 무게를 나름의 방식으로 짊어졌고, 그것과 불화하는 그녀의 욕망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된 원심력을 팽팽하게 오가면서 그럭저럭 그녀는 살았다. 누구보다도 예민한 신경증을 지닌 그녀가 80년대 운동권의 한복판에서 버텨왔다는 것이 차라리 신기할 정도다. 제 욕망을 스스로 거세한 채, 집단의지에 몸을 내 맡기는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이 그 시절의 삶의 윤리(?)일 진대, 그녀는 대체 왜 자신의 길이 아닌 길로 갔던 것일까.


그래, 나는 그녀가 말하는 서울대 건너편 강건너를 잘 알지 못한다. 대학시절, 어느 봄날 그 언저리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먹었던가 아니던가. 흐드러진 봄꽃과 걸쭉한 막걸리에 취해 휘청휘청 걸었던가, 아니던가. 하지만, 거기는 내가 놀던 곳도 아니고 술 마시던 곳도 아니었다. 그녀는 70년대 막바지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80년대를 지나고, 짧은 결혼을 하고,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자본 1권을 번역하고, 출판사에 들어가고, 소설을 쓰고, 시를 썼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그런 얘기다. 여기에 대학입학을 위해 보내야 했던 모진 고3 시절과 부동산으로 돈을 번 아버지, 차림새에 유난히 집착하던 여대생, ‘미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작은 에피소드들, 가난한 정치학도(철학도가 아니었던가)와의 결혼과 그로부터 받은 폭력, 사랑에 굶주린, 아니 사랑에 기꺼이 투신하는 저돌성, 욕망을 긍정하는 여자’, 감옥, 고급한 취향의 독재자 아들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의 경험, 그리고 소설가로서의 삶이 나란히 병치돼 있다.


그래, 뒷표지에 실린 방민호의 발문처럼,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그녀가 오랫동안 묵혀왔던 일기. 80년대를 지나고 이제 중년을 넘은 여자의 내밀한 일기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서 패셔너블한 여대생이 되고, 중산층의 삶에 걸맞는 직업과 결혼을 하고, 우아한 중년으로 늙어갔다면 어떠했을까.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내달리며, 감옥에 갇혀 칸막이 없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운동권 사내에게 매질을 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처단하려던 독재자의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밥벌이를 하지 않고 말이다. 남학생들이 곁눈질을 하며 쫓아올 정도의 미모이던 그녀가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면 말이다. 운명이 타고난 기질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녀는 다시 80년대가 오더라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역사구속적 존재로서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결혼에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판단력을 보여주는 여자’, 그녀의 삶은 그렇게 운명지어졌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녀의 벗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각료가 되고, 유명 언론인이 되고, 벤처기업가가 되고, 이상한 전도사가 되고, 여전히 바닥에서 박박기는 또다른 운동권으로 살아가지만, 그녀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글을 써서 제 몸의 새겨진 얼룩의 내력을 보여주고, 실패한 사랑의 기구한 역사를 들려주고, 혁명가 아닌 혁명가로 살았던 시절을 말하고, 이제야 갓 눈을 뜬 욕망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중년을 넘어 이토록 정직하게 자기 삶을 속살까지 보여주는 것도 참으로 큰 용기다. 그녀의 삶에 연루된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그토록 투명하게 속생각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도 용기다. 누군가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녀의 한 대학동문처럼 아직도 80년대에 갇혀 있구려라고 지적질할 지도 모른다. 80학번은 여든 야든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없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대학새내기 시절에 광주를 겪은 자들의 운명은 오래 붙들려 있었다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광주와 역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단 한번으로 기억되는 스무살의 청춘, 이후의 삶이 그 시절로 인하여 경로의존적이 되는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을 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최영미의 시가, 그녀의 소설이 늙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의 형식속에 거의 직접적인 사실과 경험들을 집어넣었으리라. 그녀는 여전히 과거진행형인 것이다. 


그녀의 서가에 옛책들이 그대로 있듯이 내 서가에도 옛 책들이 그대로 있다. 한때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없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내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동반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내 일기 같아서였을 것이다. 비록 삶의 경로가 전혀 달랐으며, 생물학적 연대가 훨씬 더 멀었고, 고뇌의 깊이와 교유의 폭이 사뭇 달랐다 해도 말이다. 윤동주의 참회록이 구리거울속에 비친 모습이듯이, 과거의 반추는 일그러지고 거친 청동거울이라야 외려 잘 보이는 법이다. 그런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라니, 그 정원의 꽃들은 시들고 지친 모습일 것이며, 예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럼에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정원은 낡고 때에 절어 있어도 눈물겨운 그리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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