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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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는 발자크의 소설과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발자크는 근대성이라는 신화를 파리 밑바닥에서부터 파헤쳐온 소설가다. 도미에는 이 도시의 일상과 그 추악한 단면을 특유의 삽화로 그려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이 도시사회학자의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발자크를 애독했고, 엥겔스는 그를 두고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테제를 이끌어 내었다. 


90여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그의 <인간희극>을 읽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는 내게, <고리오 영감>의 발자크는, 그러나, 이런 찬사를 받을 만한 소설가는 아니다. 이 소설과 하비의 책과 파리행이 우연히 겹쳐 있던 어느 날,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주인공 라스티냐크가 결기어린 다짐을 하는 대목을 넘길 때, 새삼 소설읽기란 참으로 허망한 노릇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왜 그런가. 


이 소설은 시골 출신 젊은 법학도(라고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거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라스티냐크가 파리의 사교계에 데뷔하고, 어설프게 귀부인과의 사랑에 빠지고, 사치와 화려한 생활로 인해 부성마저 부인하게 되는 인간적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는 이야기다. 그는 파리의 추악한 현실에 대해 절망하지만, 유명한 마지막 대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 속악한 도시 파리와의 대결의지를 밝힌다. 


주인공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뇌브 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의 보케르 하숙집과 그 집에 기식하는 파리의 따라지 인생들이 있고, 딸들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부성의 화신 고리오 영감이 있으며, 그의 귀부인인 두 딸이 있다. 19세기 파리의 풍속화를 보여주기 위해 제2 제정기 파리의 여전히 화려한 무도회와 귀족들의 사치, 젊은 애인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귀부인들의 치맛속 사랑 이야기, 범죄자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모, 따라지 인생들의 세속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정되거나 대결의 한쪽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티이기에는 좀 모자라 보인다. 이 소설에서 아이러니게도 자본주의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오히려 고리오 영감이다. 제면업자 출신인 그는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기술과 유통의 혁신’으로 떼 돈을 번 인물이다. 그가 사업을 통해 번 돈은 모두 두 딸의 결혼비용으로, 그리고 두 딸의 사교계 진출을 위한 씨드머니로 허비되었다. 


그가 자본의 축적과 지속적 이윤창출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자본가’였다면, 이런 방식으로 자본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본가적 방식으로 돈을 벌었지만, 바로 그 자본주의 방식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방식(자본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는)을 되풀이 한 끝에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귀족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끊임없이 수혈받는 두 딸이 애써 붙들고자 하는 것은 귀족사회와 사교계에 어울리는 모양새와 ‘티내기’다. 


그러므로, 라스티냐크가 절망하고 대결하고자 하는 현실은, 근대사회의 경제적 질서거나 그로 인해 창출되는 추악한 현실이라 보기에는 분명치 않다. 여기서 도드라지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지속되어온 봉건적 귀족질서와 그 질서가 만들어내는 부산물로서의 사교계이며, 그 사교계의 생리와 관계의 사슬이 보여주는 추악함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제 나와 파리의 대결이야”라고 주먹을 불끈 쥘 때, 그는 이미 다 죽어가는 봉건적 질서를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이기에는 철저하지 못했던, 감정마저도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가이지 못했던 고리오 영감의 장례 후에 내뱉은 그의 외마디 결기는 허공에 내지르는 주먹처럼 보였던 것이다. 


요즘 뜨고 있다는 토마스 피케티의 고리오 영감 인용에 대해서도 뜨악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세습자본주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보케르 하숙집의 젊은 처녀 빅토린과 라스티냐크가 결혼했을 때, 이 젊은이가 결혼으로 인해 얼마를 벌 것인가하는 셈에서 나온 말이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처녀 빅토린은 남매 지간인 다른 상속자가 죽을 경우 백만 프랑의 돈을 손에 쥐게 된다. 


피케티로서는 부의 불평등과 세습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 소설을 거론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세습을 받는 당사자가 라스티냐크가 아니라 빅토린이라는 점이다. 세습보다 더 주목해야할 것은, 여성의 지참금을 배우자인 남성이 갖게 되는 봉건적 관습이다. 부의 세습과 함께 여기에는 남녀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또 하나의 층위로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차라리 부의 세습화와 더불어 봉건적 관계의 부당함을 말했어야 한다. 그런데, 부의 세습화가 어찌 자본주의 시대만의 문제인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허망함의 내력은 대략 이러한 것이다. 


한마디 더.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번역자의 한국어 문장은 가끔씩 참담했고, 더러 우스꽝스러웠다. 더불어 뒷 표지에 쓰여진 말, “이 작품은 허구의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직임을 부여하여, 실재의 세계로 변화시켜 내는 근대적 기획의 첫 시도이자 완성인 것이다.” 번역자가 붙였을 이 췌사는 대체 무슨 말인가. 허구의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게 소설을 비롯한 허구에 근거한 예술의 본질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근대적 기획으로서, 허구의 세계를 실재의 세계로 변화시켜 낸다고?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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