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0만 부 기념 윈터 에디션)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11월
평점 :
품절


선언부터 하자면 나는 멍청이다. 30살이 다 지나가는 지금 내 본질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무능하게 지내온 이유는 전부 내가 멍청하기 때문이었다. 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인정하니 마음이 편하다. 누가 보기에는 유난이겠지만, 내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0월 중순, 빅데이터 교육(을 빙자한 잡스러운 코딩 교육)이 끝나고 무지성으로 놀았다. 때마침 추억의 게임인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 오픈했다. 초딩 때 이루지 못한 통한의 앵벌 노가다를 즐기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게임에 몰두했다. 밤낮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갔다. 현실을 자각했을 때는 어느새 11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취업 준비하자, 라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찼고, 나의 종특인 도피성향이 발동해 남은 11월도 게임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 좋은 증상이 생겼다.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된 것이다.


불면증은 아니었다. 누우면 잠들기는 빨랐다. 다만, 단면증이라고 해야 할지, 12시 내외로 잠들면 3시간 후 깨어나고, 모두가 움직일 시간에 다시 잠드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한 번도 안 깨고 자려면 날을 완전히 지새야 6시간가량 잘 수 있었다. 뭐 내가 뿌린 씨앗이니 투정일 뿐이지만, 이런 잡소리를 길게 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마음에 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읽게 된 이유’가 아니라 ‘마음에 든 이유’인 까닭은 이미 현실 자각을 했을 때 환기 차 교보문고에 들러 구매해 억지로 읽고 있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다시 차례를 보니 다양한 철학자가 나온다.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 공자, 간디, 니체 등등부터 처음 들어보는 시몬 베유, 세이 쇼나곤, 에픽테토스 등등까지. 그래도 딱히 기억나는 철학이 없다. 각 잡고 읽은 적이 거의 없다. 잠들기 전 펴서 읽다 두어 장쯤 넘겼을 때 졸음에 못 이겨 접었다. 덕분에 불면증은 겪지 않았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잠들었을 때는 어김없이 3시간 후에 깼으니 짜증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렇게 무지성으로 읽어도 힐링이 되기 때문에 굳이 리프레쉬 장르로 철학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미 생각해줬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독서인가!


무지성으로 읽다가 딱 한 군데 철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앞서 길게 이야기한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부분이었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 p.408 ~ 409」


5.5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고 해도 긴 시간동안 빅데이터 교육(을 빙자한 잡스러운 교육)을 수료하고, 전공자가 1명씩 끼어 있는 팀 사이에서 비전공자 셋이 뭉쳐 파이널 프로젝트 최우수상을 수상했어도 활용하지 못한 나 자신. 막연히 코딩 교육만 배우면 IT 업계에 취업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나 자신. 남들 스펙으로 이력 채울 때 게임으로 도피해 멍청함으로 이력을 채우던 나 자신. 내가 왜 멍청이인지 자각하게 해준 철학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세상에서 멍청한 존재가 가장 싫다. 멍청이가 멍청한 소리를 멍청하게 내밷는 것을 들으면 나도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허나 내가 그동안 해왔던 모든 행동은 합리화에 불과한 멍청한 짓 뿐이었다. 행위 그 자체에 만족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내게 어떤 의무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마저 행위보단 따라오는 보상을 기대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도 내가 바란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멍청하지 않음’을 바라고 독서를 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더욱 멍청해지는 기분이었고, 독서는 괴로운 일이 되었다. 게임마저 플레이하면서 재미를 느끼기 보다 고급 아이템이 드랍되기를 바라면서 본질적인 재미를 버렸다.


정말 놀랍게도 나의 멍청함을 인정한 엊그제, 한 번도 깨지 않고 밀렸던 잠을 몰아서 잤다. 약 13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와 함께 하기 싫어도 억지로 붙잡고 있던 공부들이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어졌고. 반대로 게임은 다시 흥미를 잃었다. 어떻게 보면 확률형 도박과 비슷한데, 즐겁지도 않은 행위를 그저 아이템 하나 바라고 하는 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후에 새로운 캐릭터를 키운다면 모를까, 아마 당분간은 안 할 듯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게으르긴 했으나 독서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 권은 읽었으니까. 그러나 독서감상문을 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딩 공부가 내 생각 외로 너무 힘들었던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멍청했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에 대한 내용은 매우 적지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의미 있는 책이다. 이렇게 중구난방인 글이나마 다시 기록을 하도록 나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멍청한 내가 조급해져서 이리 저리 고민해봐야 풀리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일어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멍청이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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