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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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소설 경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지 설명하자면 기니까 ‘재미없다’는 메인 이유만 남겨두고 넘어가자. 덕분에 책 구매를 좋아해도 한국 소설은 대체로 제외하는 편이다. 그나마 장편 소설은 몇몇 보는 작가가 있지만, 소설집은 더욱 싫어한다. 단편 소설의 매력도 모르겠거니와 한 편 읽고 끊기는 느낌이 되게 별로다. 그런데 장르가 SF, 그것도 판타지가 아닌 문학이다? 거침없이 ‘아웃 오브 안중’이다.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나의 불만족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책이라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유일하게 친한 대학 동기가 연말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절대 볼 일 없었을 책이었다. 선물을 받아와 다른 독서는 미뤄두고 이 책부터 펼쳤다. 선물 받은 책에 대한 최고의 처사는 곧장 읽는 것이라는 내 철학 때문이었다. 물론 간만에 받은 책 선물이라 설레는 마음도 한껏 담겨 있었다.


불행이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재밌는 책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점이 불행했고, 그 불행 덕분에 이 재밌는 책을 선물 받아 즐거운 연말을 보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SF 판타지가 아닌 SF 문학의 재미도 처음 느꼈다. 내가 아는 SF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그것을 이용한 격정적인 대립이었다. 참 무지렁이 수준의 지식을 가진 나였음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총 7편의 소설로 구성되었는데, 이중에서 나는 후반부 세 편인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를 가장 몰입해 읽었다. 앞의 네 편은 좀 더 나의 감상을 분석해야 느껴지는 재미라면, 뒤의 세 편은 직관적인 재미라고 할까.


「감정의 물성」은 어떤 감정을 고스란히 유발하는 상품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야기로, 침착의 향수를 뿌리면 침착해지고, 우울의 자갈을 쥐면 우울에 푹 빠지게 된다. 그 특이한 성질로 인해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했지만, 마약 성분이 검출되면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 속에서 화자는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긍정적인 감정의 수요는 이해되지만, 도대체 분노, 증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왜 사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삼류 신파 영화를 봤던 기억에서 도출되었다. 한 여자가 영화를 보고 마냥 울다가, 영화가 끝나자 영화 포스터를 구겨 버리는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 p.215


우리가 표출하는 감정은 정말 순수한 감정일까? 나는 정상적으로 사회화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웃기다고 해서 무조건 웃으면 안 되고, 화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내면 안 된다. 즉, 우리의 감정은 이성의 검열을 받은 정제된 감정이다. 물론 사회 질서를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때때로 그것이 개인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충분히 힘듦을 표출할 때임에도 그렇지 않다고 여기며 삶을 이어가다 무너지는 사람들이 해당되지 않을까. 이런 부류에게는 ‘감정의 물성’ 중 부정적인 면이 더 약이 될지 모른다. 뭐 그렇게 생각하며 읽었다는 뜻.


「관내분실」은 빅데이터 교육을 받으면서 잠깐 떠올렸던 상상과 맥락을 함께해 흥미진진했다. 소설 내 도서관은 죽은 이의 정보를 데이터로 바꿔 저장하는 공간이다. 어떻게 보면 디지털 납골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자(死者)의 데이터는 이름이나 특징으로 인덱싱되어 마인드라는 형태로 보관된다. 화자는 어머니의 마인드를 찾았으나 ‘관내분실’되어 찾을 수 없었다. 인덱스가 지워져 마인드는 존재하나 불러올 수 없던 것이다. 다행히 개발 중인 기술의 도움이 잘 작동해 어머니의 마인드를 만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저 디지털 미아가 어느 기업의 데이터였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었다면? 화자가 그런 데이터를 다루는 개발자였다면? 후, 상상만으로도 식겁할 부분이다. 소설의 내용과는 별 상관 없지만, 어쨌든 재미가 더해진 부분이었다.


마지막 소설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가윤’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재경’의 진짜 행적을 알게 되었어도 그녀에게 영웅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제를 가졌다. ‘재경’은 세계인의 관심을 받으며 우주 저편으로 통하는 ‘터널’로 향할 우주인 3인 중 하나였으나, 진입 당일에 이탈하여 바다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나머지 2인은 터널 입구에서 캡슐이 폭발해 죽음을 맞이했다. 항공우주국은 ‘재경’의 행적이 들통나면 더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쉬쉬하며 함께 죽은 것으로 덮어버렸다. ‘가윤’ 역시 그런 행적은 모른 채 ‘재경’을 영웅으로 삼아 우주인을 꿈꿨다.


우주인 훈련을 하면서 그녀는 ‘재경’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비난의 여론에 피로를 느꼈으나, 그럼에도 ‘재경’이 그녀의 영웅임은 변하지 않았다. ‘재경’의 행동엔 ‘재경’만의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이었고, ‘가윤’에게는 ‘가윤’만의 진심이 있으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의 개인사 중 일부가 내 존경심을 해할 이유가 되는가. 예를 들면, 나는 F.스콧 피츠제럴드를 존경하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들이밀며 내 존경심을 왜곡된 시선으로 판단했던 적이 있다. 다른 예로는 스티브 잡스도 있고, 빌 게이츠도 있다. 흠, 나의 영웅을 너에게 대입하지 않으면 상관없는 일 아닌가. 또한 내가 존경하는 부분이 흠이 아니라면 더더욱 상관없는 일 아닌가. 가끔 드는 생각을 끄집어낸 소설이었다.


김초엽의 SF 문학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에 다른 책이 나온다면 곧장 사 볼 계획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SF 문학도 내 마음에 들지는 의문이다. 조만간 서점에 가서 몇 장 훑어봐야 될 것 같다. 다른 소설도 흥미진진해서 퍽퍽한 실용서만 깃드는 내 마음에 문학의 불이 다시 지펴졌으면 좋겠다. 이런 계기를 만들어준 나의 대학 동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임인년의 출발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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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1-02 2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찐새 님 리뷰 좋아요 세 번 누르고 싶어요.
반갑습니다. 김초엽은 저도 최근 관심 갖게
되었어요. 이 소설집 이후로도 꾸준히 왕성한 창작을 하고 있더군요. 우선 선물 받은 행성어서점부터 읽어야 하는데 다른 책에 밀리고 있어요. 임인년 출발 신나게 힘차게 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