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따라 산다 - 차와 함께라면 사계절이 매일매일 좋은 날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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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책장에서 낡은 노트 한 권을 꺼내어 펼쳐들었다. 그 안에는 십여 년 전에 적었던 짧은 글들이 담겨 있었다. 글을 적은 건 대개 일주일에 한 번, 다도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처음에는 그날의 수업 내용이나 족자, 꽃, 다구, 과자 등을 기록해두었다. 그러다 점점 다도실에서 나눈 대화, 수업 중에 느낀 감정, 그날그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적어나가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많은 계절이 보였다. 우리가 이 다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그중 일 년을 이곳에서 돌이켜보려고 한다. 그 노트에 나는 '호일 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_15p.

영화 <일일시호일>의 개봉에 맞추어, <계절에 따라 산다>를 집필하게 된 책이라고 한다. 오십 대 즈음의 몇 년 동안 적어온 노트가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다도 수업의 기록인 동시에 계절의 순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 이전작인 책도 꽤 차분하게 빠져들어 좋은 기분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어 작년에 읽었던 책을 꺼내어보기도 했다.

"마음이 소란하고 지칠 때도

꽃이 피면 꽃을 보고

단풍 들면 고개 들어 그 빛깔을 봐야지."

"차 같은 건 너무 고루해."라고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다니기 시작한 다도,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는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다케다 선생님댁으로 향하는 길을 언제나 무언가를 품은 채 걸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위해 발걸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만 같다. 일, 인간관계, 장래에 대한 불안이나 집안 문제, 마음의 상처 등 작은 일에도 일일이 상처받지만 살아가야 하기에 한숨을 쉬며 선생님댁으로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묘사한 글을 읽으며 조금 어수선했던 내 마음도 그 정경들을 상상하며 차분해짐을 경험하게 한다. 차와 함께 하는 순간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 속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수업의 풍경, 그날의 족자, 감정, 계절, 과자 등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수록된 일러스트 몇몇은 기존 사용되었던 이미지이고 나머지는 전부 새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실 과자에 대한 일러스트를 보고 있으면 '이 과자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 질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마음만 분주한 일상,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온몸으로 맞이해보는 사계절. 「계절에 따라 산다」를 읽으며 흐름대로 살아가는 삶, 계절의 변화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길다면 긴 시간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의 흐름을 만끽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봄, 천천히 우러나 천천히 스미는 날마다 좋은날, 모리시타 노리코의 책을 권해보고 싶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어렸을 때는 부모님 말씀만 잘 들으면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지켜주던 부모님의 등이 어느새 작아졌다. 이젠 내가 지키고 떠받쳐야 할 입장이 되고 보니 세상에 확실한 안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_34p.

"슈ㅡㅡㅡㅡㅡㅡ."

가마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고, '솔바람'이 울린다.

유키노 씨가 툭, 중얼거렸다.

"고요함의 소리네...."

수증기가 은은히 피어오르는 따뜻한 방에 앉아 솔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의 술렁거림도 머릿속의 소음도 차츰 잠잠해진다.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그렇구나. 고요함이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야. 이 소리는 고요함의 소리인 거야.' _52p.

봄이 되면 곳곳에 새싹이 나고 일제히 꽃이 핀다. 누구나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날, 눈부신 새싹을 보고 불현듯 깨닫는다. 우리가 이토록 신비한 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걸 신비롭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_94~95p.

십 대 소녀였을 때, 나에게 계절이란 배경으로 흐르는 단순한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계절의 순환 같은 건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가능하다면 일 년 내내 일정하게 쾌적한 온도 속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계절을 앞질러 나아갈 수도, 같은 계절에 계속 머물 수도 없다. 언제나 계절과 함께 변화하며, 한순간의 빛이나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에 마음을 가다듬고, 쏟아지는 빗소리에 몸을 맡기며 자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 (중략)... 우리는 계절의 순환 밖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안에 있다. 그러니 지칠 때는 흐름 속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_132~133p.

내가 선택한 길을 살아왔다. 그 점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다.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해나가다 보면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하지만 일이 끊길 때면 내가 얼마나 불안정한 장소에 서 있는지 깨닫고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젊을 때는 '정 안되면 뭐든지 해서 살아가면 돼'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

'여기는 인생의 어디쯤일까? 건너편 기슭은 아직 멀었을까.....?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을까.....?' 이내 불안해진다. _174p.

#계절에따라산다 #모리시타노리코 #이유라 #에세이 #티라미스더북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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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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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어림'에는 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치졸, 두려움, 그리고 맹목의 사랑 따위가 쉽게 들러붙죠.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비껴 앉게 되는 것, 피하거나 못 본척하거나 떨어뜨려 두려고 하는 것들이요. 진짜 삶은 '어림'이 깃든 시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어림에서 멀어집니다. ... (중략)... 당신이 '어림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면, 모든 '어림'을 애틋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돌보듯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어림을 돌보듯이. _9~10p.

소란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5년 전 읽고 지인에게 다시 선물했던 책인데, 최근 개정판 출간 표지를 보고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어버렸다. 찬바람이 불면 유독, sns에서 많이 보이는 박연준 작가의 「소란」 2020년 읽은 소란에 공감한 문장들은 5년 전 읽었을 때의 문장들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나의 내면이 조금은 성장한 걸까? 당시엔 저자의 글이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정체되는 구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 책 읽기는 이토록 한 개인의 삶을 농밀하게 드러내었던 글이었나?라는 생각이 드는 한 편, 문장이 마음이 콕콕 박혀 읽고 되짚어 읽기를 반복하게 된다.

소란 騷亂 ; 시끄럽고 어수선함. 소란 巢卵 ; 암탉이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두는 달걀. 밑알이라고도 함.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다시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책. 공감하는 문장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시선의 변화를 느껴보는 것도 꽤 즐거운 책 읽기가 아닐까? 봄비 내리는 밤에 읽었지만, 봄바람 부는 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좋은데, 읽어요 우리.

누가 사랑에 빠진 자를 말릴 수 있겠어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경험하고 지나가야 할 일정량의 고유 경험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다 겪지 못하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또 헤어지던 순간은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그 일을 나는 긍정합니다. _33p.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불쑥 돋아난 이후로, 내 생은 저 떨어지기 직전 '가을 나뭇잎의 소란' 같다고. _60p.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 뛸 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 척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 예순이 넘어서는? 중요한 건 생각은 갑자기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잘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 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_81p.

우리는 모른다.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_149p.

내게 죽음은 유예되고, 유예되고, 유예되고, 한없이 유예 가능할 것 같은 무거운 숙제다. 물론 오겠지. 결국엔 올 것이다. 내게도, 다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도, 죽음을 기약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죽음. 훗날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려 할 때, 피하지 않고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후회 없이 살았고, 즐거웠다고. 사랑이 충만했다고 말하며 다 읽은 책을 덮듯이 삶을 탁, 닫고 싶다. 그다음 죽음의 손을 잡을 것이다. _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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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박연준 #박연준산문집 #난다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book #blanket #handmade #이밤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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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의 위로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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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모두 안 되는 그런 날들이 있지." 두더지가 왜가리 발아래 구멍을 파면서 투덜거렸다. "너도 그런 날이 있잖아."

"그렇지. 그런 날이 있지." 개미가 대답했다._9p.

책띠지의 짧은 문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그런 날, 그렇지 그런 날이 있지.'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일상을 통제해야 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 답답하지만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모임을 삼가라고 계속되는 문자를 받으면서 이렇게 길어지기만 하는 사태가 언제쯤 마무리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소설에 등장하는 동물들에 투영한 짧은 이야기들을 읽어가다 보면 어수선했던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너도 넘어져 본 적 있니?"

"응, 꽤 자주, 다들 넘어지니까 괜찮아."

하는 일마다 모두 안 되는 그런 날들,

괜히 울적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순간들...

그럴 때마다 가만히 귀 기울여주는 조그만 우리 친구 다람쥐

가끔은 긴 문장보다 짧은 문장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 톤 텔레헨의 소설은 귀여운 동물들이 화자로 등장해 우리를 위로한다.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 「잘 지내니」, 「잘 다녀와」에 이어 다 섯번째로 만나게 되는 「다람쥐의 위로」다. 작고 귀여운 다람쥐와 숲속 친구들. 역시나 이번 책도 김소라 작가님의 일러스트로 이야기의 따스함을 한층 더했다. 말없이 차 한잔 함께할 누군가 필요할 때 톤 텔레헨이 전하는 고요한 위로의 이야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조용한 다독임을 받는 느낌의 책이다.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에서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위로를 건네는 게 다이지만, 그 작은 위로가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한 건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 그리고 적절한 때에 건네는 작은 위로가 아닐까?

"난 아픈 데가 없어." 갑자기 개미가 말했다.

모두가 입을 닫고 놀란 눈으로 개미를 바라보았다.

"아픔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야." 개미가 말을 이었다.

다람쥐는 이따금씩 자기 안에서 느끼는 아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콕 집어 어디가 아픈지는 절대 알 수 없었다. 뭔가 울적한 아픔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픔도 터무니없는 것일까? _58p.

"나는 나 자신이 지겨워질 때가 있어. 넌 그럴 때 없니?" 그때 개미가 물었다.

"도대체 왜 지겨워진다는 거니?" 다람쥐도 물었다.

"그건 모르지. 그냥 말 그대로 지겨워지는 거야. 전반적으로 말이야." 개미가 대답했다.

다람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귀 뒤를 긁적이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한참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점점 자신이 지겨워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제 나도 나 자신이 지겨워졌어." 다람쥐가 말했다. _72p.

"안녕, 차야." 다람쥐가 다시 말해보았다. 그렇게 차와 담소를 시작했다.

둘은 향기에 대해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에 대해서, 그리고 겨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는 다람쥐에게 찻잔을 비우라고 했다. "내가 식어버리기 전에 말이야."

다람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안녕, 차야."

그리고는 찻잔을 비웠다.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네가 필요하다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게, 다람쥐야." 차가 말했다. _176p.

#다람쥐의위로 #arte #아르테

#톤텔레헨#김소라 그림 #정유정#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독서스타그램 #book #bookstagram #handmade #blanket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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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깊이의 바다
최민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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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이라는 바다의 해변에 서 있을 뿐이다. 가끔씩 밀려와 발목을 적시는 파도에 마음이 가벼이 흔들리도록 자신을 내맡기면서, 언젠가는 저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_183p.

주변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들, 그리고 사라지는 사람들... 이 세계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들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음으로 다른 이들이 해를 입지 않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고 말했던 노아. 도서정리협회에 노아의 명함을 들고 찾아온 소년 한별은 '불로불사'의 삶을 살고 있는 엄마가 사라졌다며 찾아달라고 찾아오게 된다. 대부분의 사건은 노아가 맡아서 해결했지만 한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경해는 한별의 엄마의 실종을 조사할수록 10년 전 '대실종'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날지 않고 바닥에 모여드는 비둘기, 그 비둘기를 무참히 살해하는 시민들... 그리고 경해의 주변을 찾아드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발견되는 유골과 유품들.... 계속되는 '대실종'. 존재하지 않는 문으로 사라진 이들은 저마다 절박한 사연이 있었고, 그러한 사연만으로도 공통된 점을 갖는듯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 지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문제의 틈을 없애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 모종의 조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경해는 TV에서 아내의 반지를 보게 된다. 이야기는 짧지만 스피디하게 전개되고 등장인물이 많지 않지만 의뭉스러운 캐릭터들이 글의 긴장감을 더하게 된다. 상상력이 무럭무럭 자라게 했던 「발목 깊이의 바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바다의 해변에 서 있을 뿐이다.'라는 이 한 문장이 책장을 덮고도 한참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게 된다. 미스터리하지만 스피디한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상상력을 자극했던 최민우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보고 싶은 글이었다.

사라진 사람들, 반복되는 균열

과거와 현재, 현상과 환상을 틈입하는 응시의 흔적들

세상에는 여기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있어. 하지만 있게 된 이상 함부로 없앨 수 없지. 그렇다면 그 존재를 가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단다. ... (중략)... 우리는 수수께끼를 다뤘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세계는 비유이자 실재이고, 수수께끼는 그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다. _15~16p.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그렇죠. 각자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있죠. 그러니까 손님 같은 분이 먹고 살 테고, 다만 그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오래 끌어안고 살다 보면 좀 뭐랄까.... 자기 멋대로 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런 사정 같은 거 깨끗이 털어버리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란 게 원체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는 않거든요." _55p.

자기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종은 인간뿐이에요. 다른 동물들은 상대의 모습과,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에만 관심을 가져요. 생존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볼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엄청나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기가 세상에 어떻게 보일지 알고 싶어 하죠. 하지만 거울은 좌우가 반대로 비쳐요. 그런 점에서 거울은 은유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가능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은유. _79p.

#발목깊이의바다 #최민우 #한국소설 #소설

#은행나무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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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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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다면, 그 헌신이 잊히지 않도록 뭐라도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지금 아무리 소중해도 몇 년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 잊힙니다. 그러나 활자로 남겨둔 기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활자화'의 중요성은 의학계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영역에서 강조되는 부분이다. 교수들의 여러 가지 책무 중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도 연구 업적의 활자화, 즉 논문이나 저서로 기록을 남기는 일에 있다. 박혜경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나는 그 이후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시간적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다. 나는 바쁜 일상과 개인적 고난에 치여 쓰기를 멈추다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3년쯤 지났을 때, 나와 팀원들을 둘러싼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매 순간 끝을 생각할 만큼 모두가 지쳐 있다는 현실만큼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_ #서문

이국종 교수님이 한창 이슈일 때도 '나랑은 먼 일이니까...' 하고 관심 갖지 않았던 분야였다. 하지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간 당시 전자책으로 구입해두고 '코로나19'사태가 길어지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읽기 시작한 골든아워. 사실 그가 자신의 시간과 건강을 갈아 넣어가면서까지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에 매달리지 않아도 됐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긴 세월 매달리지 않았다면, 길바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정말 초인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을 하는 그와 팀원들의 글을 읽으며 때론 고구마 몇 백 개를 먹은듯한 답답한 쳇병이 몰려오기도 했다. 공문서 좋아하는 관공서 기관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도 중요하진 않았던 거였겠지. 당장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고,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니까...

최근 코로나 사태의 중심지인 대구로 닥터헬기를 몰고 갔던 이국종 교수님을 보고 너무도 놀랐다. 뼈만 남아 바람 불면 날아가실 것 같... 그의 이름이 아직도 정치적인 이슈로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제발 사람 살리는 일을 이슈로 만들어 이용하지 말자.

한 사람이 완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한 팀원들이 있기에 긴 시간 버틸 수 있었고, 그를 응원하고 지지해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이국종 교수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직 한국에 뿌리 내지리 못한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의 굳건한 뿌리내림을 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감사함이 넘쳤던 책...

글의 마지막, 함께 했던 이들의 ‘인물지’는 너무도 인상 깊었다. 이제라도 읽어 참 다행이다.

골든아워 1권

한국은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외상 환자가 수술이라도 받다가 사망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현실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길에서 죽어나가고, 이런 죽음의 기록은 '예방 가능한 사망률'이라는 허망한 숫자로만 표기될 뿐이다. _7p.

책에 기록된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모두 사실이다. 기록의 대부분은 2002년에서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종 진료기록과 수술기록 등에서 가려 뽑았고, 내 기억 속의 남겨진 파편들을 그러모았다. 또한 이 기록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_10p.

‘외상(外傷)’이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손상된 모든 것을 의미할 때, ‘중증(重症) 외상’은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외상으로 반드시 ‘수술적 치료’ 및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태를 뜻한다. 어딘가에 부딪히고 깔리거나 떨어져서 혹은 무엇인가에 관통당해 사지와 뼈들이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경우들이다. 이때 환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헬리콥터를 이용해서라도 이송은 신속해야 하고, 이송 중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최종 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의료기관에 도달해야 한다. 도착과 동시에 빠른 진단, 수술, 집중치료가 이어져야 하므로 수술방과 중환자실이 받쳐줘야 한다. 마취과부터 혈액은행, 의료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의료 자원도 신속히 투입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중증외상 환자들에 대한 ‘치료 원칙’이다.

한국에서 이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현장의 의사가 아닌 의과대학 학생들이다. 외상외과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원칙적이고 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 자격시험을 볼 때 90퍼센트 이상의 정답률을 보이는 기본적인 외상환자 치료 원칙은 현장에서 뒤틀렸다. 나는 한국의료 현실에 경악했다. 졸업 후 현장에서 임상 근무가 시작되면, 이 원칙은 곧 뇌리에서 사라진다. 수술할 의사는 없고 마취과 의사와 수술방을 확보하기 어려우며, 중환자실 자리는 언제나 부족했다._47p.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 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환자는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으로 와야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골든아워(golden hour)’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는 앰뷸런스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다. 고속도로나 일반 도로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로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헬리콥터로는 20분 안쪽이면 충분하며 이송 중 응급 처치까지도 가능하다. 그렇게 실어 온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런던에서 보고 일본에서 봤던 ‘사실’이었다.

나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이송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지방 병원의 외과 의사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죽지 않아도 될 환자를 죽지 않게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필요했고, 그 의지를 실현시킬 ‘정책’이 필요했으며, 관련된 자들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정책을 누가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고 확실한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제약과 한심한 조치들은 늘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몰려왔다._156p.

'외상외과 의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최말단이었다. ... (중략)... 아니, 이렇게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저희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오래 놔두셨습니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속에서 치솟는 불길이 머리끝에 닿았다. 긴 바늘이 머리를 쑤셔대듯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10년 가까이 내가 올린 수많은 자료들과 직접 작성한 ‘수혈 비용 삭감에 대한 이의신청서’는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혔단 말인가. 일개 의사의 불만이라도 10년 동안 지속되면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만했다.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화를 삼켜 눌렀다. 따지고 들어 좋을 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 회의 자리에서 물러 나왔다. 신경 마디가 뚝뚝 끊어져나가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고, 뜨거운 것이 여전히 울렁거렸다. _320~322p.

팀이란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내 몫이 어디까지인지 나조차도 모르지만 내가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될 때가 오면 정경원이, 권준식이, 김지영이, 그다음의 누군가가 또다시 이어나갈 것이므로 아직은 조금 더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밥벌이의 이유는 늘 헐거웠으나 그것만큼은 중요했다._448~449p.

골든아위 2권

외상외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모든 고통을 ‘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의 최종 희생자는 내 주위 사람들이다. 거의 완벽하게 건강을 회복한 젊은 환자는 연인과 행복해 보였으나, 외상외과 의료진은 강도 높은 노동 현실에 꺾이며 쓰러져나갔다.

민족의 명절 좋아하시네…….

습관성 멘트처럼 나도는 ‘민족의 명절’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사방에서 떠드는 ‘민족’이나 ‘국민’ 안에 나나 우리 팀원들은 속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_61~62p.

배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정부의 많은 부처들은 바다 밑으로 배가 사라지고 나서야 분주해졌다. 구조작업의 가장 중요한 시점을 속절없이 보내버렸다_89p.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_331~3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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