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소녀 사이드미러 3
소향 지음 / 텍스티(TXTY)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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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소녀 #소향

#가제본서평단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무시당하고 싶지도, 고개 숙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빠를 지켜야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돈이 필요한 아빠를.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단 하나, 선을 넘는 것뿐이었다. 평생 자신을 옭아맨 선. 몸속 깊은 곳을 흐르는 동맥처럼 떼어낼 수 없던 선. 하지만 선 안쪽에 남아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악인은 태어날 때가 아니라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정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_43~44p.

_

진실이냐 거짓이냐, 진짜냐 가짜냐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보면 탐하게 되고, 탐하는 걸 갖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또 다른 타인을 관음하고 모방한다. 사람들은 낯선 진실보다 '낯익음'을 사랑하고, 낯익음을 갖춘 가짜는 금세 진짜가 된다. 그리고 때로는 진리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초롬의 삶을 철저히 모방하며 체득한 것이었다. (중략) 모두가 오르려고 하는 곳에 닿았고, 모두가 닮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_321p.

영리는 아빠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수능시험장으로 향하던 중 큰 교통사고를 겪고, 아빠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수능 미응시로 수시와 정시 모두 불합격 처리가 되어버렸다. 숨 쉬는 것조차 돈이 필요한 아빠, 순간 가장이 되어버린 영리에게 아버지가 모시던 송 회장의 비서가 찾아오고, 송 회장과의 만남은 영리가 송초롬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이유로 대리 수능이라는 위험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판돈 30억, 담보는 아빠의 목숨!

아버지의 쌓여가는 치료비,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 결국 영리는 1년간 영리가 아닌 송초롬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데... 초롬이 다니던 학교, 초롬의 친구들을 모두 속이고 무사히 대리 수능을 볼 수 있을까? 영리는 초롬의 삶을 모방하며 학교 성적을 조금씩 올려 서울대에 갈만한 성적을 만들어야 했고, 동시에 초롬의 상류사회 진입을 위해 수제들의 스터디그룹에서 유력 집안 자제들과의 친분을 쌓을 것 또한 유구하며 '카피캣 프로젝트'진행된다.

송 회장의 처음 목적은 자신의 딸 초롬을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딸의 인생을 위한 것이었을까?

송 회장이 자수성가하며 이루었던 과정을 겪지 않고 유력 집안의 자제들과 어울리며 편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발판을 만들어주기 위한 시작이었던 그 시작만은 절절한 모성인 한편, 자신만의 고집으로 딸의 인생을 망가뜨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소설 속 영리는 참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자신의 앞가림도 잘하지만 초롬이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서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던 인물. 영리의 '초롬'행세는 의심을 받기도 하고 비리 교사의 주목을 받으며 위험한 순간도 겪지만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사건들이 정신없이 뒤집어지기 시작하고, '영리' 정말 수재는 수재가 맞았구나!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결말까지.

텍스티의 시사 소설 시리즈 '사이드 미러'는 우리가 목격했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사회적 문제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자 기획하게 된 시리즈라고 한다. <난기류> <제> 에 이은 세 번째 시리즈인 <모방 소녀>는 '입시'라는 가장 공정해 보이는 제도가 실제로 계급과 자본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 그 안에서 개개인의 선택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며 만약 당신이 영리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이다. 저자가 현직 초등교사이자 고3 수험생의 엄마로 더욱 생생하게 써내려가신게 아닌가 싶다. 큰 기대 없이 궁금한 마음에 읽었지만 꽤 만족스럽게 완독한 소설이라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도 기대가 되는 소설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영리는 사람이 숨을 쉬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돈이 이렇게 많다는 걸 몰랐다.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 출신 아빠가 간신히 혼자 먹고 살 정도로 버는 돈으로 둘이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간단한 계산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프거나 해고당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되는 순간 안전장치 없는 삶은 곧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추락하며 영리는 알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이란 당연한 일이 아닌 축복이고, 축복에는 저마다 가격표가 있다는 것을. _41p.

“너 지금 하는 거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해?”

영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이미 여러 번 물은 것이었으니까.

“예전처럼, 그리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데 평범하게 산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이더라고.” _98p.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것은 초롬의 부계정이 아니었다. 계정을 만든 것도, 몰래 찍은 초롬의 사진을 올린 것도 전부 민들레였다. 팔로워들의 환호가 초롬이 아닌 자신을 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순간, 민들레는 비로소 살아 있는 기분을 느꼈다. 가짜라도 좋았다. 하트 하나가 한 번 더 미소 짓게 했다. 영혼이 빈곤해질 때마다 민들레는 그렇게 온라인 셀프 숭배로 수혈을 하곤 했다.

민들레가 핸드폰을 닫고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는 헤어핀 금속 틀을 교실 시멘트 바닥에 썩썩 소리가 나도록 갈기 시작했다. 칼처럼 날카로운 핀이 언젠가 초롬의 모찌 같은 피부에 붉은 상처를 내주길 바라면서. 조용한 교실 구석에서 신경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한동안 규칙적으로 이어졌다._104p.

영리가 핸드폰의 고양이 인형을 움켜쥐었다. 다경이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무 좋아. 네 모든 걸 닮고 싶어.”

다경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경을 돕겠다고 했던 모든 행동이 도리어 다경의 마음에 욕망을 심은 것은 아니었을까. 잘난 친구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을. 다경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그 일을 신고한 자신일지도 몰랐다.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였을지 이제 영리는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졌다. 거짓의 한복 판에 서 있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다경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걸지도 몰랐다. 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_180~181p.

“비서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래.”

“왜 그렇게까지 회장님한테 충성하세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가요. 가끔은 막 대하기도 하잖아요.”

공 비서가 창밖의 땅거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인연은 길든 짧든 다 시절 인연이야.”

시절 인연. 영리는 그 말을 낮게 읊조렸다.

“난 그저 회장님과의 시절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다. 언젠가 우리의 시절도 끝나겠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공 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영리는 이미 지나간 인연과 아직 끝나지 않은 인연을 떠올렸다. 초롬도, 송 회장도 언젠가는 끝날 시절 인연일 것이다. 그리고 아빠도._201p.

#사이드미러 #텍스티

#소설추천 #txty #같이읽고싶은이야기 #반전소설 #추천소설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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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다이빙 문학동네 청소년 79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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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다이빙 #도서협찬

#문경민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

안간힘처럼 들리는 말이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보다 나은 기분으로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조건도 있었다. 조건이 압박에 눌려 숨쉬기도 버겁게 느껴질 때면 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나만 달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었지만 우울한 조건은 조건으로 가두어 다루는 게 맞았다. 오케이. 넌 딱 거기까지. 그런 태도로 몸을 바로 세우고 더 나은 선택으로 나아가는 게 현명했다. 그 선택이 현실을 뛰어넘는 더 좋은 쪽으로 나를 데려가기를 바라며. _191p.

_

누구에게나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있다. 『스카이다이빙』은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중략) 세상에는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늪이라는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조건을 넘어서는 그들의 성실함과 기개와 근성을 닮고 싶다. 지지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들을 든든히 받쳐 주는 세상이면 좋겠다. 모든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친절하고 넉넉한 세상이면 좋겠다. _작가의말

윤아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고,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이 있는 도희, 그리고 필우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하교를 함께하며 그들에게 조용히 도움을 주는 친구로 등장한다. 다른 친구들이 학원으로 향할 때 동생을 챙겨야 했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학교 부지에 특수학교가 지어지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특수학교 찬성 집회에 찬성하고 토론에도 참여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눌리지 말고 '구덩이 모임'을 결성해 가뿐하게 살아보고자 노력하기 시작한다. 형제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구덩이 프로젝트'는 한편으론 자신들의 삶을 정성껏 돌보기 위한 과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시각각 윤아를 압박해오는 주변 상황들, 필우의 사고..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미 주어진 삶의 조건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 아이들.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들이 청소년들이기에 읽으며 마음이 더욱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장애를 불편해하는 건, 지금껏 살아오며 자주, 가까이 경험해 보지 못했음에 대한 이유도 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는 왜 불편함을 감추고, 그들의 아픔을 보며 불편해하는가? 장애도 자주 보고, 배려하고, 경험하면서 이해와 배려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무거울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문경민 작가의 단단한 문체와 유려한 흐름의 에피소드는 추락이라고 보이던 것이 사실 비행을 위한 가속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들의 용기 있는 낙하를 기꺼이 받아줄 수 있는 든든한 그물망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글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권하고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사람은 앞일을 모른다.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아빠는 자신이 장애인 가족의 가장이 될지 몰랐고, 공익신고 뒤에 교단에서 내려오게 될지 몰랐다. 엄마는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괜한 염려와 괜한 불안, 내게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내 삶의 기본값이었다. _63~64p.

평범한 우리도 끔찍한 결정에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생각해 보세요. 학교 부지에 학교를 짓는 겁니다. 마침표를 찍고 끝. 그게 전부여야 해요. 하지만 특수학교를 반대하시는 분들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학교 부지에 특수학교를 짓는다고·····? 맙소사. 말줄임표와 물음표가 함께 붙어 버린 거예요. 이런 갈고리 같은 물음표는 특수학교 문제만이 아닌 모든 차별과 편견이 작동하는 상황에 매번 붙어요. 여자가? 남자가? 외국인이? 어린애들이? 학생 주제에?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이건 명백한 차별입니다. 제 주장은 명료합니다. 차별하지 마세요. _135p.

"낭떠러지 너무 무서워하지 말래."

"무슨 말이야?"

"낭떠러지 끝에 서면 거기에서만 보이는 길도 있다는데?" _201p.

#문학동네 #소설추천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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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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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하루치의낙담 #도서협찬

#박선영

나는 늘 은둔과 도피의 서사에 매혹됐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의 마지막 장면이 "도피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바침"이라는 문구로 끝날 때, 도피를 용인해주는 그 한 줄에 어린 심장이 얼마나 쿵쾅거렸던지. 도피가 왜 나쁘단 말인가. 감당할 수 없으면 도망쳐! 상처받지 않으려면 숨어! "이런 시대에 살아남아 꿈을 꿀 수 있는 길은 도피뿐이다." 다시 찾아본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문구다. 옳거니!

항상 도피하는 사람은 도피를 꿈꾸지 않는다. 그냥 도피 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울면서 맞서는 사람들이 늘 도피를 열 망한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으면서도 나는 차마 그것을 결행 하지 못했다. 머물기의 괴로움. 이것이 내 삶의 핵심 주제였다._7p.

강렬한 제목과 책표지에 홀린듯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쉬이 넘길수 없는 문장들이 많았다. 멈추어 생각하고, 지난시간과 지금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문장을 짚어나가기도 했다. 때로 필사하면서 나만의 문장으로, 글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저자의 <그저 하루치의 낙담>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속 스스로에게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과 무용하다 생각되었던 일들, 슬픔과 비참함등이 오늘의 내가 조금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고 앞으로 조금더 실패하고 낙담한다고 해도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조금은 여유있는 마음으로 지금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던 책이다.

누구나 지금의 생을,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지 않을까? 그렇기에 꼭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대한민국 유자녀 여성에게 일이란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는 삼각게임이다. 스스로 2급 트랙으로 후퇴하며 커리어를 만신창이로 만든 엄마가 상처받거나, 엄마 없이 외롭게 시 간을 보내며 돌봄공백에 시달리는 아이가 상처받거나, 언제가 생의 최후일지 모르는 노년의 부모가 양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무너져내리거나, 셋 중 하나 혹은 둘이다. 희생에 가까운 외부 조력 없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도 행복하고 엄마도 승승장구 하는 그림은 대체로 가능하지가 않다. 슬프게도 어딘가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_73p.

한국에서 슬픔의 회피는 심각한 사회병리의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슬픔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 감정의 탈진을 버거워하고, 내면의 고충을 은폐한다. 누군가 자신의 슬픔을 약점으로 악용할까봐, 기쁨이 찾아와 자신을 얕볼까봐 공포에 잔뜩 질려 있다. 박복한 슬픔파로 분류될까봐 남의 슬 품을 외면하려 애쓰고, 영원한 기쁨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열정적으로 거짓 시늉을 한다. SNS에 전시하기 위한 삶의 저 부박한 행복이란 오로지 불안과 두려움의 동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기쁨을 좇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다. 생의 비의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기쁠 수 없다. 당신의 기 쁨은 무지에 기반해 있다. 나는 당신이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 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더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슬픔에 대해 도란도란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_100~101p.

영어로 된 어떤 글을 읽다가 moral courage라는 표현과 마주쳤다. 도덕적 용기. 두 단어 위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용기는 그저 용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용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는 거였다. 물리적 위험과 대범하게 맞닥뜨리는 외적 용기만이 어디 용기겠는가. 도무지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지적 용기도 있을 것이고, 아름다움을 위해 인습과 관행을 격파하는 미적 용기도 있다. 그저 옳은 일이니까,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눈 질끈 감고 분연히 일어서는 도덕적 용기는 그중에서도 언제나 나를 가장 강렬하 게 매료한다. 자신의 오류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끊임없이 수정 하는 것도 용기요,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도 용기다. _135p.

우리는 타인의 행과 불행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걱정과 배려 속의 호기심, 축하와 공감 안의 호기심, 어쨌든 거기엔 호기심이 있다. 알려지고 싶지 않을 때 굳이 알아채는 쓸데없 이 발달한 너의 촉수. 아니, 나의 촉수. 행이야 고맙다 하고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나의 불행에 개입하는 너, 아니 너의 불행 에 개입하는 나의 오지랖은 참말로 못나 빠지지 않았는가. 남의 사정을 염탐하느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호기심만 왕성한 이 징글징글한 사회에서 이제 나는 '돕는 나', '걱정하는 나'라는 비대한 자아를 뒤로 물리고, 조용히 응시하는, 절도 있게 기다리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_219-220p.

#반비 #에세이추천 #까망머리앤의작은서재 #도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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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려줘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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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들려줘요 #해문단

#엘리자베스스트라우트 #독파

"밥, 우리 모두는 흐르는 모래 위에 서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삶에 언제 들어오는지에 따라 그들의 허상을 만들어내죠. (중략) 우리는 모두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같이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의 깊은 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요. _305~306p.

_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 걷고 대화하고 - 그저 행복했다. _353p.

'이것은 밥 버지스의 이야기다'로 시작되는 소설은 500여 페이지의 분량에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소설이다.

밥의 소개로 올리브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루시는 '기록되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산책하며 걷고 말하고 그저 행복했던 밥과 루시, 가족들 간의 갈등, 전처, 전남편 현재의 관계들, 그리고 어느 날 벌어진 실종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또 다른 이야기들과 그들 사이에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산책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루시에 대한 밥의 마음이 점점 커지고 어쩔 줄 몰라하는 감정, 그 애틋한 마음이 어디에 닿을지 두근거리다가, 거의 마지막장에 다다라 루시가 올리브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이내 참지 못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너무도 완벽한 결말이 아니었을까....

책장을 덮고 든 생각은 '이제라도 스트라우트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였다. 인간 내면의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소설, 정말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소설 중 손꼽고 싶은 작품이다. 그동안 작가가 집필했던 책의 등장인물들이 총출동한 이야기라니! 이전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읽는데 큰 지장이 없고 읽고 나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글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밥 버지스의 이야기다. 메인주 크로스비 타운에 사는 키 크고 체격 좋은 남자인 그는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 예순다섯 살이었다. 밥은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모른다. 우리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자신의 삶에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있고, 그런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_13p.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녀 주변의 모든 기록되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 바턴이 올리브를 처음으로 만나 올리브가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표현을 썼다. 기록되지 않는 삶.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올리브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 사실이 지금 그녀를 강타했다. _126p.

밥은 루시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쉬고 있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받았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스쳤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아요. 루시, 당신은 내게 음, 뭐랄까, 삶으로부터의 휴식을 주는군요."

"죄를 먹는 것으로부터의 휴식."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주 뿌듯한데요." 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 "나도 정확히 똑같이 느껴요. 다만 나는 죄를 먹지는 않죠." _260~261p.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요. 사람들은 살고, 희망을 품고, 심지어 사랑을 보듬지만, 여전히 고통을 겪어요. 모두 마찬가지예요.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_492p.

사랑은 많은 형태로 찾아오지만, 사랑은 늘 사랑이에요. 그게 사랑이라면, 그건 사랑이에요." _509p.

우리 삶이 기록되지 않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무소음 객차에서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루시의 그 엉뚱한 사랑 이야기처럼, 일상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일렁이게 한 그런 아주 엉뚱한 이야기라도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에 루시가 올리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었듯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_525p. 옮긴이의 말

#문학동네 #해문단2기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만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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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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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도서협찬

#황석영

나무는 씨앗이었을 적에 개똥지빠귀의 뱃속에 있다가 땅속에 묻혀, 그것의 몸속에서 싹이 트고 움이 솟아올라 풀 같은 묘목으로 시작한 기억이 그해에 자라난만큼 나무껍질의 한 층으로 나무의 제일 안쪽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기억들은 각각 다른 층을 형성했다. 팽나무의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겹겹의 층이었다. 그 매번의 겨울 층마다 개똥지빠귀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_46~47p.

개똥지빠귀의 분해된 몸이 녹아들어 기름진 땅속으로 뿌리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나갔고, 어린 팽나무 싹은 여름이 되자 묘목이 되어 몇개의 가냘픈 가지와 잎사귀가 돋아나와 바람에 팔랑대고 있었다. 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디며 버티어낸 어린 팽나무는 다시 겨울이 오자 추위에 죽어버린 듯, 삭풍 속에 꽂혀 있는 메마른 작대기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이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새 생명의 활기를 깨닫게 되었다. _31p.

나무는 나이테 속에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그 겹겹의 섬유질 속에 계절의 재활과 성장과 갈무리와 휴지의 반복이 새겨졌다. 이를테면 지상에서 계속되는 이 반복은 길건 짧건 시작이나 끝이 아니라 오래오래, 또다시 오랫동안 되풀이 되는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_37p.

몽각은 그 풀이 하나의 나무 모양을 하고 제 키만큼 자랐을 때, 잎을 따서 높다란 고목 팽나무의 큰 가지 위에 올려주며 중얼거렸다. 할매, 이것이 당신 자식이라오. 내가 키웠어요. 몽각은 이 빈터의 오랜 주인이었던 고목에게 자기도 한식구가 되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_77~78p.

몽각은 자기 몸이 곧 무너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 차례 통증이 지나간 뒤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팽나무에게로 갔다.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이제 내가 먼저 없어지네.

그는 한때 그가 부지런히 잡아서 먹고 몸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들에게 자신을 보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비틀거리며 갯벌로 나온 길이었다. _83p.

외갓집으로 짐작할 만한 길에 이르자 그는 문득 저쪽에 무성한 잎이 달린 가지를 벌린 높은 키의 나무를 발견했다. 동수는 그 나무를 금방 알아차렸다. 할매나무다. 집과 담벼락 너머 동네에서 제일 안쪽에 있어서 몰라보았던 팽나무였다. 그냥 아무것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폐허를 지나 나무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울퉁불퉁한 옹이와 상처투성이의 나무에 다가서서 우람한 몸통을 두손으로 쓸어보았다. _214p.

#창비 #소설추천

한마리의 새로 시작된 여정이 육백년 팽나무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역사에 대한 압도적인 서사는

천천히 필사하며 음미하고 싶어지는 문장으로 가득했던

책이었다. 올 해는 이 책을 통필사해볼까...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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