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박정언 지음 / 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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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의 쓸모를 찾아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만,

그 시절 그 순간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너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



  페이지를 펼쳐 글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걸 이번에 또 절감하게 됐다.  사실 책표지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읽을 순서를 뒤로 미루고 미루다 명절 연휴 끝자락에 읽기 시작했다.  첫 글인 '잃어버린 대화'를 읽으며 '아! 이 책을 왜 지금 읽은 거지?' 하며 페이지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도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제는 오랜 친구를 만나도 급히 안부를 묻고 커다란 변화들을 브리핑해야 한다.  일상의 언어들, 일을 위한 말들, 꼭 처리해야만 하는 말들만으로도 쉬이 목이 아파오는 탓이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시간들이란.  비록 무의미하고 쓸모없을지라도 우리 머릿속을 맴도는 작은 물고기들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들이란, 얼마나 소중했는지. /p014~015 #잃어버린대화 

  행위는 지속될 때 빛을 발한다.  이 명제는 ‘보통의 존재’들뿐 아니라, 보통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오로지 지속될 때만이, 행위는 그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바꾸어가며 진화한다.  그러니 그 어떤 작은 가능성이라도 기대한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한다.  계속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한 음 한 음을 쌓을 것이고, 글을 쓰고 싶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일기나마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나가는 것처럼. /p029. #그냥일어나서일을하러간다


  신간을 읽으면서도 책에 대한 정보 없이 바로 읽는걸 즐기는 편이다.  글을 읽음에 있어 선입견이 없이 읽기 위함이었는데, 이렇게 책 읽기를 하면 글을 읽으며 체감하게 되는 글의 감도가 조금더 짙게 느껴진달까?  평일의 라디오 PD, 평일의 산책자라고 자신을 이야기하는 박정언의 에세이 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삶의 소리와 모습들을 포착하면 이런 글이 될까?  한 사람의 삶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는걸, 그것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하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의 필력에 빠져들게 된다.



  상황은 언제나 나빠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는 분명 영광스러웠던 것 같은데, 미래는 그저 암담하게만 느껴집니다.  1년 뒤, 5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명치끝이 답답해질 때가 있죠.  하나의 난관을 겨우 넘었는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난관이 등장하곤 합니다. ...(중략)...  지금의 상황에서 제가 꿈꿔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어쩌면 ‘고작’ 이런 것.  하지만 전 이 정도로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비관으로 낙관하며, 그저 하루를 무사히 버텨낼 뿐입니다.  /p115~117 #비관으로낙관하기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방문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공간 자체가 사라지거나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은 장소는 내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이니, 지칠 때면 언제든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변하거나 달라질 걱정 없는 10년 전, 5년 전의 그 장소로. 사랑하는 길을 걷다 사랑하던 카페에 들어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 돌아온다.   어쩌면 장소에 대한 사랑은 마음이 만들어낸 최후의 방어선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 남는 것은 오로지 공간, 장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주는 위로에는 말없이 가만히 마음을 쓸어내려주는 것 같은 조용한 다정함이 있다.
오래되고 사려 깊은 이상적인 친구처럼 말이다. /p148 #장소에대한사랑 


  이런 잘 쓰인 글을 읽을 때면 반가운 한편 질투가 나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하며 빠져들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삶과 사람을,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에세이를 즐겨 읽는 건, 단순히 내 감정 같은 글을 찾아 읽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꾸며진듯하거나 화려한 문체는 반감이 들어 읽으면서도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나 읽고 또 읽고 싶은 글이라니, 닮고 싶은 글이라니....  정갈하고 서글프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글이다.  때론 페이지 전체를 몇 번이고 읽고, 손으로 짚어가며 갈무리 한 문장들이 많아서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읽기를 되풀이했다. 



  이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있을까.  경계선이 있다 해도 아마 몹시 흐릿해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든 자칫하면 밟을 수 있는, 흐리고 또 흔한 선.  삶이 우리를 살짝이라도 떠밀면 속절없이 넘어가게 되는.   요즘 길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선을 밟고 선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은 어떤 세상인 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자꾸 고민하게 된다.  /p166 #143번버스의여자

  어떤 말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조차 못할 즈음이 되면 갑자기 불쑥 떠오르곤 한다.  주로 잠들기 전 베갯머리에서다.  아, 내가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구나. 무의식의 바다 아래로 묻어놓았던 말들이 갑자기 둥실 떠오를 때면 당황하게 된다.  언제 들은 말인지도 희미하지만 그 말을 듣던 순간의 모든 풍경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순간이 있다.  평소엔 아주 덤덤한데도 그런 기습 공격 앞에선 휘청거리고 만다. /p255 #니가세상에서사라졌으면좋겠어

  너무나 좋았던 책의 서평은 언제나 힘들다.  읽은 만큼, 좋았던 만큼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하는 생각에 또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는 이석원 작가의 추천사로 마무리할까 한다.  아마도 이보다 더 이 책을 잘 이야기 할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으니 말이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좋겠다.)


삶의 환등기처럼 그 활자로 포착해낸 순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 있다.  덩달아 나의 삶의 한 시기마저 끝난 기분이랄까.  나는 이분이 부디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이석원 추천사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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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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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바라보던 세상의 온갖 사물들이

다 아름답고 정겹게 살아났다."

​  

  1970년대의 사회는 어땠을까?  박완서 작가 8주기를 맞아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름다운 나의 이웃>에선 당시 사회를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4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글을 읽으면서 시간차를 약간 어색한 대화체 빼고는 시간의 갭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평범한 여성이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자네 행여 아들들 연애결혼 시키지 말게, 딸은 시켜도 괜찮네만.  나도 큰애를 저희가 좋다는 대로 큰소리 한마디 안 하고 짝 지워준 게 지금 와서 슬그머니 심통이 날 지경이라니까.  아들 가진 쪽에선 중매결혼 그거 참 할 만한 거더라고 그게 말야, 꼭 돈을 핸드백에 잔뜩 넣고 백화점으로 물건 고르러 다니는 것만큼이나 신이 난다니까.  자네도 알지?  돈 없이 물건 쳐다볼 때 온통 갖고 싶은 거 천지다가도 가진 돈이 두둑하면 별안간 안목이 높아지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싶어지는 거 말야." /p26  #어떤청혼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 그녀는 혼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은 새롭고도 신나는 삶의 보람이었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과 결혼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상반되는 것 같았지만 후남이는 그 둘을 행복하게 화합시킬 자신이 있었다.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 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었다. /p96  #아직끝나지않은음모3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누구야 놀자~' 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 마당이 있고 비슷한 모양의 단독주택들이 있던 동네,  한 학교에 다니는 그만그만한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온 동네가 북적이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를 모르겠지?  한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놀아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옆집에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을 보고도 못 본 척 핸드폰을 보고 스쳐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웃'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주는 옛이야기 같은 아련한 추억과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겐 평범한 삶 속에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구나! 하며 감탄하게 한다.  



  "여자란 여자로 길러지는 걸까?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는 걸까?" 

...(중략)...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 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라도 해야지 입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p178~182 #아파트열쇠

  가끔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아직 귀가 어두워진 건 아니니까 똑똑히 알아듣고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처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아주 쉬운 말을 내가 이해한 뜻과 전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걸 들을 때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중고등학교 정도의 또래들이 저희들끼리 찧고 까불면서 조잘대는 은어 속어 따위를 들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우리 자랄 때만 해도 어른이 들을까 봐 꺼리는 얘기는 작은 소리로 소곤대거나 어른이 못 듣는 데서 했는데 요새 젊은 애들은 저희들만의 언어를 개발함으로써 어른을 앉은 자리에서 감쪽같이 소외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참으로 깜찍하고도 괘씸한 젊은이들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p262~263  #외래어노이로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에선 대를 이은 여인들의 삶이 현대에 이르러 자립적인 삶을 꿈꾸며 자신이 주체인 삶을 살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완성된 그림'은 영동의 땅을 구입하기 위해 몇 년이나 돈을 싸 들고 오가는 문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급변했던 시대의 부동산 투기와 서민의 삶을 조명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아파트 열쇠'는 오늘날 맞벌이 여성들의 마음과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완두콩만 한 아이'에선 연인과의 사이에 원하지 않는 아이의 중절수술을 이야기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완두콩만한 태아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외래어 노이로제'를 읽으며 조카가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줄임말을 하는 게 오래전 세월인 그시대와도 닿아있어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된 책이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어서 다행이다.  예전에 비해 개인의 삶이 많이 노출되어 불행보단 행복을 더 많이 보게 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 심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48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짧은 호흡으로 이어져 있지만 흐름에 끊김이 없어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가면서 아련하게 기억하는 그 시절을 떠올려 보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아름답기만 한 것이 어디 삶일까? 

박완서 작가 8주기를 맞아 '사람다운 삶에 대한 추구'라는 문학정신을 기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29인의 작가의 단편인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겉으론 다 행복해 보여도 근심 없는 집이 없구려." 

"아아, 돈이나 왕창 많았음 좋겠다."

"그래 돈이 제일이야.  돈만 왕창 많으면 애들이 공부 좀 못하기로서니 까짓 미국 유학 보내버리고 말지. 

살맛도 저절로 날 테고." /p300 #서른아홉살가을


  짧은 소설을 즐기는 것을 가벼운 디저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결코 소홀하거나 가볍지 않은 삶의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재미 속에 쿵 하고 가슴을 흔들어대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게 합니다.

아치울에서 호원숙​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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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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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간다.



  특정 작가, 책표지,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꽤 많은 편이다.  김소연 작가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읽다가 덮어둔 채 완독하진 못했던 책이었구나!  책표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책표지가 시선을 더 끌었다.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졌던 겨울, 곧 봄이 올 것만 같은 연둣빛에 어중간한 계절을 나고 있는 듯한 외투를 걸친 한 사람. 표정이 밝아 보이진 않아서?  시크해 보여서? 호감이 가기도 했다.   이 책이 더 끌리니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부터 읽어보기로 한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이 사소한 하루하루를 읽고서 누군가는 부디 자신을 둘러싼 타인과 세상을 더 멀리까지 둘러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서 언젠간 아주 먼 곳까지 다가갈 수 있다는 걸 끝까지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책머리에 

  선물은 주거나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되는 것이라고.  선물이 되는 사건.  선물이 되는 시간.  선물이 되는 사람.  선물이 되는 말.  선물이 되는 표정.  선물이 되는 사람이 선물이 되는 말과 함게 선물이 되는 표정을 지으며, 자그마하고 사소한 선물 하나를 건넸을 때, 그것은 선물이 되는 시간이자 선물이 되는 사건이다.  그때 손과 손 사이에서 전달되는 사물 하나는 그 무엇이어도 상관이 없다. /p23

 

  자신의 일상을 글로 담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왜일까?  글로 표현하는 연습이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생각의 깊이가 약간은 제한적이기 때문일까?  사실 글 읽기는 즐기는 편이지만, 짧은 글이라도 하루의 일과를 간단하게 기록하는 것 외에는 글이라곤 써본 일이... 없다.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의 에세이와 산문집을 찾아 읽지만 읽어도 '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는 걸 보니 글쓰기엔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쉽게 읽히는 문장은 아니다.  때론 문장을 읽고 또 읽기도 했고, 눈길이 머물러 생각이 깊어지는 페이지도 있었다.   



  문학은 악몽과 현실 사이의 온도 차이에 맺힌 결로처럼 존재한다.  이젠 악몽보다 현실이 더 지독해졌다.  악몽의 내부에서 더 지독한 현실을 내다보며 문학은 겨우 지탱하고 있다.  악몽을 현실과 혼동한다는 죄목을 짊어진 채로 문학은 장문의 테두리를 타고 결로처럼 맺히는 듯하다. /p44 

  결혼과 출산에 의한 가족이 아닌, 다른 방식의 가족을 탄생시키며 사는 이들을 요즘은 꽤 자주 목격한다.  오랜 고정관념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삶을 꿈꾸는 이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내게도 새로운 꿈이 생긴다. /p71 

  우리는 빨라도 너무 빠르다.  빠른 것이 주는 편리함을 지나치게 선호한다.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랜 끈질김이 아니라 속도일 때, 그 위태로움이 무섭다.  /p117


  시인의 산문집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한 글은 쉽게 넘길 수 없는 페이지들을 종종 마주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권쯤은 시집으로 읽으려고 노력 중인데, 요즘 시집 다운 시집을 읽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읽다 보면 이런 글도 '시'가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시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해서 글을 탓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글을 탓하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나'와 부딪힌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쌓인 시간들의 이야기는 조금은 천천히 살아가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생각하고 기록하고 손으로 짚어가며 읽었던 문장들이 꽤 많았던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살아가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고 생각될 때, 나만 뒤처진 게 아닐까 싶을 때 읽어보길 조심스레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독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적혀 있는 시집을 찾아 헤맨다.  꼭 듣고 싶은 한마디가 시에 적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말도, 희망이 있다는 말도, 인간을 믿어보자는 말도,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도 뻔히 거짓말인 줄 다 아는 시대다.  어쩌면 뻔한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고려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시가 다시 읽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보겠다며 다른 방식으로 고백해보고 싶어서 시집을 선물하게 되는 건 아닐까.  /p173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이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p252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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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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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 강유원 #책과세계


🔖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지만 독서 중독자라 해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소수일 뿐이다. 결국 살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게 되는 일이 많은데, 독서 중독자들은 남아도는 독서력으로 그럭저럭, 아니 심도 있는 수준까지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유독 할 말 없는 책들이 있으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중 하나다. /p66




🔖 자네, 일반인과 독서 중독자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나?
독서 중독자들은 완독에 대한집착이 없어.
흠, 지금껏 읽은 책 중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은 책은 20%도 안 될 것 같군./p147

🔖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역사>/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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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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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에세이에 지나치게 편향적인 독서를 하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독서중독자들의독서리스트 에 내가 읽어본 책이 한 권도 없을까?
지난 10년간 난 무엇을 읽은 것인가? 하고 반성(?)하며
겸손한 자세를 만들어주었던 책...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체가 아니어서,
구입여부를 고심했던 책이었고,
평이 꽤 좋아서 구입했지만,
스토리, 구성은 둘째치고 그림체는 영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예 책을 읽지 않았던 독자였다면,
이들이 이야기하는 책들이 오히려 가깝게 느껴졌을까?

글쎄,
이 책을 몇 번 더 읽어봐야 알 수 있을까?
일반인들의 독서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줄거라는
책표지의 글에 동의하기는조금 힘들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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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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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그 두 번째 이야기

우리와 당신들


  2018년 4월 베어타운의 여운이 꽤 깊게 남았었다.  1도 모르는 아이스하키와 아이스하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대한 사건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고는 조금은 아쉬운, 뒷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하는 궁금증을 던져놓고 끝맺음을 했었다. 

  아이스하키로 하나 되었던 베어타운, 헤드와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주전 선수인 케빈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이 밝혀지면서 경기는 지게 되고 베어타운의 선수들이 대거 헤드로 옮겨가면서 하키단의 존폐 위기에 몰리게 된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사람들 말로는 만 시간을 투자해야 진정한 실력자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아맛은 몇 시간을 더 바쳐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이제 심지어 소속팀도 없다.   봄에 케빈이 마야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진실을 공개하느라 모든 것을 포기한 이후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마야의 아버지마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p165

  정치는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으로 이루어지고 그 과정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기본 전제는 단순하다.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받길 원한다는 것.  이 때문에 관료 조직은 대부분 거기에 맞춰서 움직인다.  네가 하나를 주면 나도 하나를 줄게.  그것이 문명사회의 건설 방식이다.  /p191

  병원 대 하키, 헤드 대 우리, 시골 대 대도시. 스포츠와 정치를 연결 짓지 마라.  아이스링크 위에선 스포츠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베어타운이 아이스하키로 일어서기 위해 단장인 페테르는 정치적인 협상을 해야 하는데...   사건의 피해자인 마야는 생존자임에도 그녀로 인해 케빈은 베어타운을 떠나야 했으며, 베어타운은 경기력이 뛰어난 선수를 잃었다.  길 잃은 분노는 생존자에게 향했고 그들의 분노의 출구를 찾아 헤매는듯했다.  벤이의 방황이, 고뇌가 글의 전반에 깔린듯했던 우리와 당신들   



  사람들을 챙긴다는 건 힘든 일이다.  사실 감정이입이란 게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피곤할 수밖에 없다.  감정이입을 하려면 모든 사람의 삶도 끊임없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모든 걸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워지더라도 정지 버튼을 누를 방법이 없지만 생각해보면 남들도 마찬가지다. /p245


  베어타운 하키단을 위해 초빙한 신임 코치 사켈은 무뚝뚝하고 '감정'이 보이지 않는 캐릭터지만 코치로선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정치가 깊이 개인되는 듯 리샤르트 테오라는 지역구 의원의 등장으로 이쪽 저쪽을 오가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로 새로이 등장한다.   주전 선수를 잃은 베어타운은 회생할 수 있을까?  벤이, 아맛, 보보 그리고 충동 조절 능력이 부족하지만 타고난 골키퍼인 비다르와 그 일당.  베어타운에서 흐릿했던 인물들이 더욱 또렷해지는 우리와 당신들의 이야기는 스포츠보단 인물 중심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케빈이 떠나고 헤드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케빈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빌리암과 누나의 사건으로 인해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레오의 충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

 

 


  팀 스포츠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단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일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유가 단순하다.  또 하나의 가족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애초에 가족이 없었던 사람에게는 팀이 가족일 수 있다.... (중략)...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용서.  스포츠는 그 모든 걸 하룻저녁에 맛볼 수 있다고 장담한다.  오직 스포츠만 그럴 수 있다./p472~473


  단장의 딸, 성폭행의 피해자이며 생존자였지만 경기 당일날 주전 선수가 잡혀가는 바람에 마을의 경기를 망치게 돼서... 유능한 선수였고 숨기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내 편이어서 배신감이 컸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뱉는 언어가, 폭력이 정당화 되진 않는다.   마을의 분위기,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단체행동은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베어타운을 읽었던, 베어타운이라는 마을의 분위기를, 아이스하키에 열광하는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벤이는 한참 동안 아이스링크 앞에 서 있는다.  발은 눈 속에 깊이 묻고 나무 그늘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는 평생 동안 수많은 이유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아이스하키를 했다.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는 것들도 있는데, 이 스포츠는 클래식 악기와 같아서 그냥 취미로 할 수 있을 만큼 만만치가 않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계적인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가 된 사람은 없듯이 마찬가지 원칙이 하키 선수들에게도 적용된다.  평생 동안 집착해야 한다.  나의 정체성을 모조리 삼켜버릴 수도 있다.  결국 열여덟 살짜리는 아이스링크 앞에 서서 고민에 잠긴다.  '이게 아니면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 /p598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대 당신들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의 패기가 마을 전체가 스포츠로 어떻게 하나가 되어 보이는지, 마야 때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한마음이 되어 그를 몰아가는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에 대해 어떤 희생을 감내하는지, 아이스하키에 빠져있는 동안 성장한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의 품을 떠나가는지... 자신이 평생을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어떠한지... 네 살 반에서 다섯 살이 되는 알리시아가 어떻게 성장할지...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 러브스토리와 형제자매들의 이야기가 있는지...

  우리와 당신들 마지막도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솔직히 전편보다 나은 속편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개인적으론 베어타운보단 두 번째 이야기인 우리와 당신들 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베어타운이 아이스하키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개요 였다면 우리와 당신들 은 본격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인 느낌었달까?   

작년 4월 #에어타운 이후 후속작.   600여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임에도,날샐각이다.  베어타운을 읽고 읽으신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에도 상황설명이 잘 되어있어서 이 책만 읽으셔도 스토리 파악엔 무리가 없을것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역시 배크만 이란 감탄사가 나온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언어술사 프레드릭 배크만 입니다.



​당신에게는 용기가

끓는 피가

너무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모든 걸 너무 힘들게 만드는 감정이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가장 짜릿한 모험이 주어지길 바라요.

당신은 탈출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길

해피엔드로 끝나는

그런 사람이길 바라요./p613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벗겨내고 애초에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들만 남기면 단순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다들 스틱 하나씩 들고, 골문 두 개를 두고.  두 팀으로 나눠서.

우리 대 당신들/616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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