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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무심히 바라보던 세상의 온갖 사물들이
다 아름답고 정겹게 살아났다."
1970년대의 사회는 어땠을까? 박완서 작가 8주기를 맞아 개정판으로 출간된 <아름다운 나의 이웃>에선 당시 사회를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4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글을 읽으면서 시간차를 약간 어색한 대화체 빼고는 시간의 갭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평범한 여성이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자네 행여 아들들 연애결혼 시키지 말게, 딸은 시켜도 괜찮네만. 나도 큰애를 저희가 좋다는 대로 큰소리 한마디 안 하고 짝 지워준 게 지금 와서 슬그머니 심통이 날 지경이라니까. 아들 가진 쪽에선 중매결혼 그거 참 할 만한 거더라고 그게 말야, 꼭 돈을 핸드백에 잔뜩 넣고 백화점으로 물건 고르러 다니는 것만큼이나 신이 난다니까. 자네도 알지? 돈 없이 물건 쳐다볼 때 온통 갖고 싶은 거 천지다가도 가진 돈이 두둑하면 별안간 안목이 높아지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싶어지는 거 말야." /p26 #어떤청혼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 그녀는 혼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은 새롭고도 신나는 삶의 보람이었다. 혼자 살 수 있다는 기쁨과 결혼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상반되는 것 같았지만 후남이는 그 둘을 행복하게 화합시킬 자신이 있었다.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 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었다. /p96 #아직끝나지않은음모3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누구야 놀자~' 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 마당이 있고 비슷한 모양의 단독주택들이 있던 동네, 한 학교에 다니는 그만그만한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온 동네가 북적이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를 모르겠지? 한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놀아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옆집에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을 보고도 못 본 척 핸드폰을 보고 스쳐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웃'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주는 옛이야기 같은 아련한 추억과 그 시절을 모르는 이들에겐 평범한 삶 속에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구나! 하며 감탄하게 한다.
"여자란 여자로 길러지는 걸까?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는 걸까?"
...(중략)...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 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라도 해야지 입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p178~182 #아파트열쇠
가끔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아직 귀가 어두워진 건 아니니까 똑똑히 알아듣고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처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아주 쉬운 말을 내가 이해한 뜻과 전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걸 들을 때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중고등학교 정도의 또래들이 저희들끼리 찧고 까불면서 조잘대는 은어 속어 따위를 들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우리 자랄 때만 해도 어른이 들을까 봐 꺼리는 얘기는 작은 소리로 소곤대거나 어른이 못 듣는 데서 했는데 요새 젊은 애들은 저희들만의 언어를 개발함으로써 어른을 앉은 자리에서 감쪽같이 소외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참으로 깜찍하고도 괘씸한 젊은이들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p262~263 #외래어노이로제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에선 대를 이은 여인들의 삶이 현대에 이르러 자립적인 삶을 꿈꾸며 자신이 주체인 삶을 살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완성된 그림'은 영동의 땅을 구입하기 위해 몇 년이나 돈을 싸 들고 오가는 문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급변했던 시대의 부동산 투기와 서민의 삶을 조명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아파트 열쇠'는 오늘날 맞벌이 여성들의 마음과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완두콩만 한 아이'에선 연인과의 사이에 원하지 않는 아이의 중절수술을 이야기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완두콩만한 태아의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외래어 노이로제'를 읽으며 조카가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줄임말을 하는 게 오래전 세월인 그시대와도 닿아있어 크게 공감이 되기도 했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처음 접하게 된 책이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어서 다행이다. 예전에 비해 개인의 삶이 많이 노출되어 불행보단 행복을 더 많이 보게 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 심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48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짧은 호흡으로 이어져 있지만 흐름에 끊김이 없어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가면서 아련하게 기억하는 그 시절을 떠올려 보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아름답기만 한 것이 어디 삶일까?
박완서 작가 8주기를 맞아 '사람다운 삶에 대한 추구'라는 문학정신을 기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29인의 작가의 단편인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겉으론 다 행복해 보여도 근심 없는 집이 없구려."
"아아, 돈이나 왕창 많았음 좋겠다."
"그래 돈이 제일이야. 돈만 왕창 많으면 애들이 공부 좀 못하기로서니 까짓 미국 유학 보내버리고 말지.
살맛도 저절로 날 테고." /p300 #서른아홉살가을
짧은 소설을 즐기는 것을 가벼운 디저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결코 소홀하거나 가볍지 않은 삶의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재미 속에 쿵 하고 가슴을 흔들어대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게 합니다.
아치울에서 호원숙
본 서평은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