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24866124627524.jpg)
연기가 자욱한 어두운 실내, 한 줄기 빛이 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라는 책의 제목 때문에 선뜻 읽기를 망설였던건 아마도 '아편'이라는 단어때문 이었던것 같다. 접근하기 쉽지 않을 듯한 책의 제목과 달리 책은 상당히 얇은 편이다. 180여페이지에 달하는 작가 자신의 아편에 대한 고백과 20여페이지에 달하는 번역자의 해설을 담고있어 고전임에도 편하고 가볍게 읽을수 있었던것 같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 독자들의 관심이 맴도는 진짜 중심은 아편쟁이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쾌락을 가져오든 고통을 가져오든, 아편의 불가사의한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이 글의 역할도 끝난 것이다. /p164
그것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을 치료하는 진통제였다. 철학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온 행복의 비밀이 당장 발견되었다. 행복은 이제 1페니만 주면 살 수 있는 것이었고, 조끼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중략......아편의 쾌락조차도 엄숙하고 진지한 성격을 띠고 있다. 아편쟁이는 가장 행복한 상태에서도 "쾌활한 사람"의 성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럴 때에도 그는 "사려깊은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고 생각한다. /p86-87
저자가 이야기 처럼,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은 아편이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화자인 드 퀸시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신이 아편중독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학생 시절의 일화, 아편을 시작하게 된 경위, 아편의 쾌락과 고통, 아편의 남용에 따르는 무서운 환상, 아편을 줄이려는 노력 등이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과 함께 담겨 있다. 그의 이야기가 아편중독자라기 보다 순간 순간 낭만적으로 보였던건 그의 문체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올때마다 포스트잇 붙이기를 멈출 수 없었고 다시 읽어보기를 반복하다가 글로 옮겨 적어놓기도 했다. 고전의 매력이란 이런것일까?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했을때, 그 순간이 아닌 반복하기를 통해서 내 것이 되는것...그동안 고전이란 어렵다고만 생각하며 책만 진열하고 읽기를 미루었는데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것 같아 즐겁게 읽어내려갔다.
19세기 드 퀸시가 활동했던 시기엔 '아편'이 약방에서 처방전 없이 요즘의 드링크제처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가정의 상비약같은 존재였고, 술값보다도 저렴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아편을 복용했다고 한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이 밤중에 울거나 경기를 해도 아편팅크를 먹였다니 그냥 일상 상비약 같은 약이었던것 같다. 동시대의 낭만파 워즈워스를 빼고 모두 아편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하니 아편에 대한 증상들을 고백한 드 퀸시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중독의 증상을 보이지 않았을까? 중독된걸 끊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지 또 그 과정들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실천해본 사람들만이 알것이다. 습관, 중독...단어 자체만으로도 뭔가 집요함이 느껴지는데 그 집요함을 끊어내기란 얼마나 힘들것인가...
'예절'이라는 커튼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특징과 표현 위에 너무 두껍게 드리워져 있어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양극단과 그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다양성의 영역이 모두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 /p60-61
즉 성서가 말하고 있는 무서운 책은 사실 각 개인의 마음 자체라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여기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다. 마음이 '잊을'수 있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사건이 우리의 현재 의식과 마음에 새겨진 비밀 기록 사이에 베일을 칠수도 있고 앞으로도 베일을 치겠지만, 같은 종류의 사건들이 이 베일을 찢어버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베일이 쳐졌든 벗겨졌든, 마음에 새겨진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 /p146
실제로 그의 유년은 유복했지만 그는 대부분의 삶을 가난과 빚에 시달리며 보냈다. 시공사에서 출판한 토머스 드 퀸시의 이 작품은 초판본이고 개정판은 이 작품보다 많은 부분이 수정되어 초판의 세 배 가까운 분량으로 늘어나면서 이야기 전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고 이야기 한다. 개정본에서 늘어난 분량도 그의 유년과 아편을 시작한 계기등이 늘어난거라고 하니 그 부분이 궂이 늘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을 분량이었기에 초판본을 선택한 출판사의 선견지명이었을까? 고전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부담없이 읽을수 있을 책인듯 했다. 책을 읽어가며 책장이 줄어드는게 아까운건 오랫만이었던것 같다. 책을 읽다 눈에, 마음에 내려앉는 문장들을 마주할때면 멈춰서 몇 번을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이 책은 정말이지 중독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 같다. 올해 고전을 읽어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시작이 좋은것 같아 앞으로 만날 책들이 기대되게 하는 책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끝 무렵쯤 발표된 [고백]은 낭만주의 문화와 포스트낭만주의 문화의 양면가치를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또한 19세기 영국의 미학, 철학, 문화, 사회상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출간 이래 판을 거듭하며 자체적 생명력을 유지해온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동시대 문인들뿐만 아니라 장 콕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문학의 대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보르헤스는 인터뷰집 [Jorge Luis Borges: Conversations]라는 책에서, 드 퀸시의 스타일을 극찬하며, G. K. 체스터턴이나 로버트 스티븐슨이 끼친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드 퀸시로부터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 출판사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