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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전자(한글표기)로 보통은 다관이라한다
잎차를 우려내는 그릇
불위에 직접 올려 물을 끓이는 것이 아니며, 손잡이의 위치에
따라 위에달린 윗손잡이형, 위에 달린 뒷손잡이형, 옆손잡이형
으로 구분된다.크게에따라 1,3,5인용으로도 구분한다


찻잔(다완)
차를 마시는 잔으로 잔, 구, 종, 완등의 형태가 있다.
찻잔의 모양은 입구쪽이 바닥보다 약간 넓은 것이 마시기에
편하며 흰색 찻잔은 차의 색깔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구는 원통형의 통잔,완은 사발형의 가루차용(아래사진참조)
종은 작은 반구형이 잎차용을 이루는 말로 추정


차잎을 곱게 분말로 만든 말차를 내는 그릇.
다완, 차완, 이라고 한다
*찻잔도 다완이라하고 이것도 다완이라 하나 잎차와 말차의 형태상의
차이로 그릇의 모양이 다른것에 유념하여 분류한듯..
또한 그 구분이 일반적으로 혼용되거나 모호하다 ㅡㅡ;

보통 "숙우"라한다
차의 제맛을 내기 위해 끓인 찻물을 식히는데 사용하는 그릇-숙우.
재탕이나 삼탕의 차를 낼때나 손님이 많을 때 차를 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물을 식히거나 차를 낼때 두 용도로 쓴다 물식힘사발 또는 귓대사발이라고도 한다.


퇴수기라고 한다 차를 낼 때 예열을 했던 물이나 남은 차를 버리는 그릇으로
물 버림사발이라고도 하고 개수그릇이라고도 한다.


차를 낼 때 찻통의 차를 우릴 만큼만 넣어두는 작은 항아리.
뚜껑 모양에 따라 차호와 차합으로 구분된다.


다관 뚜껑이나 차호의 뚜껑을 받쳐 놓는 다구.
없을때는 남는 찻잔을 뒤집어 뚜껑을 그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보통 "차칙"라 한다
차를 다관에 넣을 때 사용하는 찻숟가락 용도의 다구.
대나무의 절반을 쪼개어 만들거나 대나무 뿌리로 만든것과 먹감나무로 만든것이 있다.
엄격이 구분하면 차칙,차시를 구분하나(모양도 다르다)
요즘은 명칭을 구분없이 차숫가락이나 티스푼으로 혼용하는곳도 있는듯하다 ㅡㅡ;
다만 모양에서 보듯 차칙은 잎차에 적합해 보이고 쓰며
차시는 티스픈과 비슷한게 가루차에 적합해 보이고 쓴다

잔대,차탁,차반이라고도 한다
찻잔받침으로 도자기나 대나무, 등나무, 향나무 등으로 만든다.
나무로 만든 것이 찻잔과 부딪칠 때 충격과 소리를 방지하여
더 좋다. 모양은 원형, 타원형, 사각형,배모양 등이 있다.


찻가루와 끓인 물을 저어서 거품을 내어 차와 물이 잘 섞이도록
사용하는 솔로서. 대나무의 쪼개짐에 따라 80본, 100본, 120본이 있다.


차선을 꽂아 놓는 다구로 사용후 차선의 모양을 잡아주며
물기가 손잡이쪽으로 츠르게 하여 곰팡이 발생을 방지할 수 있다.
차선 모양에 잘 맞는 차선 꽂이를 선택해야 하천의 형태를
변함 없이 잘 보관할 수 있다.


찻통의 차를 떠서 다관에 옮기는 다구.
대나무와 일반 나무를 수저처럼 깎아서 사용하거나
주칠을 한 수저가 사용되기도 한다.찻숟가락이라고도 한다.
말차를 낼 때의 차시는 주칠을 한 차시를 쓰는데 대나무 겉애가
안쪽으로 맡아져 가루가 차시에 묻어나지 않도록 되어있다.
한글 표기는 역시 차숟가락이나 앞서 말했듯
차의 종류와 그에맞는 차숟가락의 모양에 따라 분류한다
주의할점은 차긁게와 그 모양이 비슷해 초보자는 실수할수 있다
자세히보면 끝이 차시는 둥글고 차긁게는 등긁게처럼 홈이
쉽게 긁어낼수 있게 여러게 있다


찻잔을 담아 나르기 위한 반으로 굽이 없는 쟁반형이 있다.


다관에 우려낸 차찌꺼기를 꺼내기 편리하도록 만든다구.
앞서 말했듯 차시와 헛갈미면 안되며 비슷한 용도로 차집게가 있는데
대나무로 만든 핏셋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것이다.

찻상포라고도 하며 다포라고도 한다
찻상 위에 까는 것으로 차를 낼 때 물이 흘러도 차포에 흡수
되어 정갈해 보인다.
면으로 된 것은 차포라고 하며 대나무나 등나무 껍질로 만든
것은 차석이라고 한다.


다구들을 올려 놓고 행다를 하는 굽이 있는 다기용 상.
목제류가 많고, 모양은 우너형, 정사각형, 직사각형, 타원형,
팔각형, 서랍형 등이 있다.
*다담상 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차와 다식을 올려 손님께 접대하는 상으로
찻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찻상앞에 다담상을 놓고 접대할때 사용하나
일반적으론 명칭을 혼용하여 찻상이라 하는걸로
추정된다 ㅡㅡ;

[ 탕관 ]
물을 끓이는 그릇으로 열의 전도가 잘되는 솥이나 주전자가 적당하다.
지금은 의식다례가 아니면 별로 사용치 않고 주전자나 전기포트를
대용해도 무난하다
[ 풍로 ]
숯등을 사용하여 불을 지피는 작은화로를 말하며 지금은 의식다레가
아니면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 찻통 ]
차를 덜어서 쓰는 기구
[ 차건 ]
찻그릇의 물기를 닦는 수건. 얇은 무명이 좋고 흰색이 무난하다.
물기가 잘 흡수되는 마 또는 면이 좋다
[ 찻상보 ]
찻상을 덮는 보자기. 청홍보, 수보, 쪽보, 삼베, 모시, 무명등이 있다.
[ 차시,차칙받침 ]
차시나 차칙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만들것.
p/s-중국의 다구와는 명칭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며 다구명은 순우리말을 우선으로 쓰고
뒤에 일반적 여러 명칭을 적었다
이중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일종의 사치품?(선택옵션?)이 많이 포함되 있으며
이런것이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며 없다하여도 다도를 하는데 지장이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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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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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근대

녹차의 역사-개요

우리나라에 차가 성행하게 된 것은 대렴(大廉)에 의해 차종자가 전래되어 재배가
시작된 신라 흥덕왕때 부터로, 그 후 천여년 동안 차는 우리 민족에게 예절과 사색을 즐기는 성품과 풍류의 멋을 가져다 주면서 나라와 겨례의 후생을 두텁게 해왔다.
그러나 신라, 고려의 차문화 번성기에 이어 조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차문화는 점차 쇠퇴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차문화 부흥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시작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의 시대별 차문화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근의 차 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녹차의 역사-신라시대

신라시대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차 종자가 처음으로 파종된 때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년) 왕명의 의하여 대렴(大廉)이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종자를 지리산 계곡에 심은 것으로 전하나 이미 선덕여왕(632~647) 시절에 차가 있어 왔는데 이때 이후 더욱 성행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계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차를 즐겼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花王戒)"도 참고가 될 만하다. 화왕계에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라때 화랑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다고 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잦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고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녹차의 역사-고려시대

고려시대

고려의 다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차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고려인들은 차를 기호음료로 즐겨 마셨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 이외에 차를 달이는 분위기에 도취되곤 하였다.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 있게 했고 문화 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고려의 불교는 호국 불교로 왕실과 귀족의 보호아래 매우 융성했다. 승려들은 수행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다. 또한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이렇듯 사원에서는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사원주변에는 차를 전공하기 위한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다인"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중국으로부터 차문화가 전파되면서 귀족, 왕실, 승려 사이에 차마시는 습관이 급격히 확대되어 도자기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는데 그 증거로 초기에 도자기를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의식 용구가 출토되었고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차를 마시는 그릇인 다완(茶宛)이었다.
차를 마시는 방법도 고려와 조선초까지는 말차(가루차)가 성행하였으나 이후 오늘날과 같은 잎차가 생산되면서부터 차 마시는 도구도 찻사발에서 찻주전자가 주류 이루게 되었다.

녹차의 역사-조선시대

조선시대

차문화는 숭유억불의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급격한 쇠퇴 현상을 보였다.

척불(斥佛)로 인하여 사원 활동이 위축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원 주위의 차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핍박과 시련속에서도 조선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와 한국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 장의순을 통해 차는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차나무가 있는 곳에 초의가 살았고 추사에게 보내진 차로 말미암아 차를 나누는 자리마다 초의 이야기가 전해졌고 초의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다승(茶僧)"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으며, 다신전에 이어 6년 후에는 동국(東國)의 차를 노래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초의가 동다송을 지은지 4년 뒤인 헌종 6년,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추사 또한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래며 지은 차시가 20여수 전해지고 있다.
"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는 듯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 추사는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고 자신의 묵적을 차와 바꾸기가 예사였을 정도였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는 다생활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초의선사의 거주지 일지암에는 다실이 있는데 그 다실의 이름이 일로향실(一爐香室)로,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끓이는 다로(爐)의 향(香)이 향기롭다" 라는 의미로 써 준 것이다.

근대

근대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경영된 다원은 무등다원이었는데 고향인 일본 돗도리현에서 차를 만들던 경험이 있는 오자끼는 1912년부터 야생차밭을 가꾸어 무등다원으로 개발했다.
이 무등다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성격의 다원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차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남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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