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근대

녹차의 역사-개요

우리나라에 차가 성행하게 된 것은 대렴(大廉)에 의해 차종자가 전래되어 재배가
시작된 신라 흥덕왕때 부터로, 그 후 천여년 동안 차는 우리 민족에게 예절과 사색을 즐기는 성품과 풍류의 멋을 가져다 주면서 나라와 겨례의 후생을 두텁게 해왔다.
그러나 신라, 고려의 차문화 번성기에 이어 조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차문화는 점차 쇠퇴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차문화 부흥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시작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의 시대별 차문화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근의 차 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녹차의 역사-신라시대

신라시대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차 종자가 처음으로 파종된 때가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년) 왕명의 의하여 대렴(大廉)이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종자를 지리산 계곡에 심은 것으로 전하나 이미 선덕여왕(632~647) 시절에 차가 있어 왔는데 이때 이후 더욱 성행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계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차를 즐겼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花王戒)"도 참고가 될 만하다. 화왕계에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라때 화랑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다고 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잦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고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녹차의 역사-고려시대

고려시대

고려의 다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차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고려인들은 차를 기호음료로 즐겨 마셨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 이외에 차를 달이는 분위기에 도취되곤 하였다.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 있게 했고 문화 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고려의 불교는 호국 불교로 왕실과 귀족의 보호아래 매우 융성했다. 승려들은 수행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다. 또한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이렇듯 사원에서는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사원주변에는 차를 전공하기 위한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다인"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중국으로부터 차문화가 전파되면서 귀족, 왕실, 승려 사이에 차마시는 습관이 급격히 확대되어 도자기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는데 그 증거로 초기에 도자기를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의식 용구가 출토되었고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차를 마시는 그릇인 다완(茶宛)이었다.
차를 마시는 방법도 고려와 조선초까지는 말차(가루차)가 성행하였으나 이후 오늘날과 같은 잎차가 생산되면서부터 차 마시는 도구도 찻사발에서 찻주전자가 주류 이루게 되었다.

녹차의 역사-조선시대

조선시대

차문화는 숭유억불의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급격한 쇠퇴 현상을 보였다.

척불(斥佛)로 인하여 사원 활동이 위축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원 주위의 차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핍박과 시련속에서도 조선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와 한국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 장의순을 통해 차는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차나무가 있는 곳에 초의가 살았고 추사에게 보내진 차로 말미암아 차를 나누는 자리마다 초의 이야기가 전해졌고 초의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다승(茶僧)"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으며, 다신전에 이어 6년 후에는 동국(東國)의 차를 노래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초의가 동다송을 지은지 4년 뒤인 헌종 6년,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는데 추사 또한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래며 지은 차시가 20여수 전해지고 있다.
"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는 듯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 추사는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고 자신의 묵적을 차와 바꾸기가 예사였을 정도였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는 다생활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초의선사의 거주지 일지암에는 다실이 있는데 그 다실의 이름이 일로향실(一爐香室)로,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끓이는 다로(爐)의 향(香)이 향기롭다" 라는 의미로 써 준 것이다.

근대

근대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 경영된 다원은 무등다원이었는데 고향인 일본 돗도리현에서 차를 만들던 경험이 있는 오자끼는 1912년부터 야생차밭을 가꾸어 무등다원으로 개발했다.
이 무등다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성격의 다원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차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남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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