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 - 스케치북이 이끈 길 위의 감정 연대기
손혜진 지음 / 아트앤플레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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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골목길이 나타나고, 빨간 대문과 파란 대문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풍경을 마주할 때면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곤 했다. 하지만 액정 속에 담긴 풍경은 어딘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면, 그 풍경 속 분위기와 감정까지 도화지에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지만 난 영 그림에 소질이 없어 상상 속으로만 그리곤 했다.

 

이 책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는 바로 그런 내 마음을 조용히 건드린 책이다.

저자는 삶에 지치고 흔들리던 어느 시점에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어반스케치에 도전한다.

스케치북을 들고 바깥세상으로 나가 걷기 시작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빛의 방향, 공기의 흐름, 나무의 호흡,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기까지. 걷고 그리면서 비로소 그곳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책 속에는 풍경뿐 아니라 소리와 냄새가 함께 살아 있다. 골목 안으로 퍼져 나오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아이가 흥얼거리며 부르는 노랫소리, 강아지가 짖는 소리, “어서 밥 먹어!” 하고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 이런 소소한 일상의 감각들이 모여 사람 사는 동네의 맛을 만들어낸다.

저자의 그림과 글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그 골목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처음 어반스케치를 시작했을 때 저자는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음속에는 고요와 평온이 스며들었고,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 속에서 드로잉을 마무리한다.

그날은 저자에게 선물 같은 하루였고, ‘나 혼자서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그것을 넘었을 때 찾아오는 작은 용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정릉마을의 모습이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 그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웃음 짓는 아이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속에 묵직하고 뭉클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것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려왔던 마을다운 마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다정하고 정이 넘치며, 역사적 가치까지 품은 공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저자는 그림으로 남긴다는 행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드로잉은 단순한 그림 연습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온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마을을 걸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 마을의 역사와 시대의 흔적을 되살리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행위이기도 하다.

 

저자는 오래된 골목길을 단순히 멋진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안에 스며든 서사를 읽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 애쓴다.

낡고 오래된 동네를 좋아하는 이유는 미학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웃의 정과 사람 사는 온기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는 여행기이자 기록이며, 동시에 삶의 속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나 역시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고, 마음에 남기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걷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충분히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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