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글 없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글에서 시작된다

이 글도 쓰임이 있어야 한다

쓰임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6gOblRd8DKA

<오늘 나는 / 이랑>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 채!!!!! 다!!!!!!!!!!

이랑은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음악 전공자들로부터) 차별을 받았(는)다고 했(한)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요즘 매일 아침 내가 제일 먼저 듣는 노래는 이랑의 <오늘 나는>이다. 

이랑의 신곡 <오늘 나는>을 들으면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화장을 한다. 

이 노래를 들으면, 특히 가사!!, 마음이 비장해지고, '어떻게든 오늘 하루도 보란 듯이 살아내겠다!' 하는 각오가 솟구친다!

나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실제로 들어본 적도 없는, 사용해 본 적도 없는 타자기 소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영화 <어톤먼트> ost를 좋아한다. 특히 1번 곡이 좋다. 1번 곡은 타자기 소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일기를 쓸 때 자주 듣는다. 요즘은 영화 <arrival> ost를 제일 많이 듣지만. 이전에는 어톤먼트였다. <오늘 나는>도 타자기 소리로 시작해서 더더욱 좋다!!


196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을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104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87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뜨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쓰기(=읽기)에 대한 이랑의 노래 가사는 200% 와닿는데, 사사키 아타루의 읽기(=쓰기) 애찬은 매우 심하게 거부감이 든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빠가 자세히 설명해 줄게" 하는 어투로 읽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읽을 수 있었던 혁명전사 남자들 냄새, 정액 냄새. 먹물 마초남의 가르치려 드는 듯한 태도. 그래서 싫다. 싫어서 이 책을 산 지 최소 5, 6년은 되었을 거 같은데 그때 몇 바닥 읽고 내버려 뒀다가 이번에 다시 읽고 있는 중인데, 역시 싫다. 가수 이랑의 노래 가사와 맥락은 같은데 너무 싫다. 번역 송태욱 씨의 번역이 잘못인 걸까? 사사키 아타루는 가르치려 든 적 없는데, 번역 송태욱이 가르치려 들었던 걸까?


한글을 모르던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책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변사처럼 다른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아했다. 일기를 배우고 나서부터는 늘 일기를 썼고, 용돈기입장을 배운 후로는 늘 가계부를 썼다. 즉, 나는 이야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하는 걸 좋아한다고 볼 수 있다. 일기쓰는 걸 좋아하지만, 남들보다 잘 쓰는 글은 주장하는 글이다. 아무튼 나는 대화보다는 읽기를, 대화보다는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나의 소확행 정도이지 성전을 읽고 혁명을 읽으키는 대확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읽고 쓰는 것이 비장하고 거대한 무엇이었다면 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 책, 쓰기는 개인적인, 사적인 것일 때 빛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니체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의 글(?)도 의심한다.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는다. 특히 니체는 내 취향이 아니다. 정말 싫다. 그래서 니체를 옹오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편.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만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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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덕분에 들었습니다. (우리 이랑으로 찌찌뽕 한 사이임ㅋㅋㅋ)
- 대략 이부분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은 즉슨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 말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들린다.˝

여기를 듣고 그냥 이번에도 울컥했어요. 저도 집중할 시간에... 일의 효율성 극따집니다. 왜냐면 읽을 시간을 확보해야하기 때문에... 아.. 이랑이 정희진 공부 듣는다고해서 맙소사! ㅋㅋㅋㅋ 이랑은 천재. 천재가. 맞습니다.

덧, <잘라라>의 어느 부분에서 맛이 딱 떨어졌는 지 알것도 같은, 괜히 동조하고 싶은 덧붙이려다가 말게 되지만... 그럼에도 책 전체를 옹호하며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면. 저의 읽기는 이러해요. 300페이지 중에 단 한 줄이라도 내게 걸린다면. 그만이며 성스러운 독서라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꽂힌 부분은 ‘읽을 수 없는 것을 읽는다‘이며, 정말로 읽게 되면 미쳐버리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엔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나를 읽는다.는 거죠. 저는 큰 혁명을 바라지는 않고요. 그렇게 읽는 종족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니체도 아타루도. 성별 꼬장꼬장 다 떼고. ‘그렇게 읽는(것에 미친) 종족‘이기에 옹호합니다. 저를 싫어하진 말아주세요~ ㅋㅋㅋ

2024-06-29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9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9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2024. 5. 8. 개봉

혹성탈출 시리즈의 3편인 줄 알았는데 4편이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아주 좋아하는 나는(지금도 이건 걸작이라고 생각함)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을 보고 대실망하여 시리즈의 3부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 

한 줄 평1: 시저 죽었다. 그만 찍어라.

한 줄 평2: 동물의 인간화 지긋지긋!!!


기존의 인간이 급격한 퇴화로 인해 언어를 습득할 수 없을 정도로 뇌 용량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서사의 근본 줄기가 웃기고, 다시 한번 라캉 이론에 감탄하면서도 무엇에도 끼워 넣을 수 있는 라캉 이론이야말로 완벽한 환상&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인간이 사용하는 방식의 언어가 '진화'의 산물 혹은 근거라는 생각이 너무 같잖았다. 너무 무지한 인간종 중심주의 아닌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2024. 5.15. 개봉

낸 골딘 1953년 생. 저렇게 막(??) 살아도 70대를 맞이할 수 있구나... 낸 골딘의 장수(??)가 가장 큰 의문이었던 영화. 

낸 골딘과는 반대로 무수한 낸 골딘의 절친들은 (에이즈로 인해) 40대 초반에 죽어 나간다. 하지만 낸 골딘은 그 모든 역병을 이겨내고, 심지어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도 이겨내고, 거대 제약회사(옥시콘틴 모기업 새클러)와 싸운다. 이 싸움의 방식은 집회+행위 예술!!!!! 더럽게(마약 중독->사망으로 이어지게 함) 번 돈을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에 거액 기부를 하는 것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는 야비한 새클러 기업을 낸 골딘은 집회로, 자신의 작품 전시(소장)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싸워서 이겨낸다!!!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에 고립된 미친 예술가들만 보아왔던 나에게 자신의 예술성을 사회운동과 공익을 위해 사용(활용?)하는 예술가는 처음(?) 봤다! 위대함 그 자체!!


20대 시절 낸 골딘의 작품은 무키무키만만수의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2012> 같달까.



<드림 시나리오> 2024. 5. 29. 개봉.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전작: 해시태그 시그네)

한 줄 평: 밈 + 대관종 시대의 풍경스케치 같은 영화 ㅋㅋㅋ


같이 보면 좋을 다큐 영화: <밈 전쟁: 개루리 페페 구하기>


엔딩크레딧을 멍하기 보고 있다가 아리 에스터 이름이 보이길래 뭐지 했는데, 제작에 참여했다고 함. 그러고 보니 폴(니콜라스 케이지)와 아리에스터 감독의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보(호아킨 피닉스)는 많이 닮은 형제 같았다. 어떤 점이 닮았냐 하면 이성적 매력이 제로인 동네 찐따 중년 남자 같은 점!!!!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2024. 5. 22. 개봉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가졌던 의문들을 말끔히 해결해 주는 이야기. 내가 가졌던 의문은 1)퓨리오사의 왼팔은 왜?? 2) 영화 마지막의 중년의 전사 언니들은 누구??

영화 장면보다는 영화 음악의 스케일이 더 큰 느낌. 이 영화 음악이라면 갯벌에서 꼬막 캐는 장면에서도 나는 엄청난 박진감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 언덕(사막이 만든 절벽 같은 모래 언덕) 장면을 보면서 만약 드니 빌뇌브가 이 장면을 봤다면 조지 밀러와 자신 중 누가 더 사막 연출의 대가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그냥 지구의 사막과 아라키스(듄) 사막 합체해!! 안야 테일러 조이 1인 2역(알고 보니 일란성쌍둥이 인걸로) 해버려!! 라고 생각 하던 중 지능 떨어진 야만 그 자체인 인간군상들을 보자 <혹성탈출 새로운 시작>의 인간 무리들 같아서 이럴 거면 혹성탈출이랑 매드맥스 합체해!! 안야 테일로 조이(퓨리오사)랑 노바(프레이아 앨럼)는 각자의 무리의 리더로 공동 주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제임스 프랭코(혹성탈출1 진화의 시작 주연)주연의 <127시간>이 퓨리오사에 나와버려서 혼자 속으로 미친듯이 깔깔 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 듄 + 혹성탈출 합체, 삼국통일 해버려!!!!

주인공: 안야 테일러 조이, 티모시 샬라메, 프레이야 앨럼 

폴과 노바는 결혼, 결혼으로 듄 왕국과 망한 지구 왕국은 평화협정 맺는 걸로 하자, 망한 지구는 안야 테일러 조이가 가지고, 티모시랑 프레이야는 아라키스를 통치하면 됨



멸종 서사, 망한 지구 서사에 대한 사사키 아타루식 평가.


강의할 때 가벼운 농담으로 자주 말합니다만, 왜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뭐에서든 세계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걸까요? 세계의 명운이나 멸망을 건 싸움을 해야 끊어오를 수 있다면, 그건 그냥 불감증이 아닐까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세상은 계속됩니다. 세계는 넓습니다. 그 세계는 더욱 넓습니다. 세계는 계속됩니다. 그 세계는 더욱 오래 계속됩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서 세계는 변합니다. 우리 시대야말로 새로운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가소롭기 짝이 없는 잡담이 되는 미래가 옵니다. 단지 이 정도의 것도 견딜 수 없는 걸까요? 종말론을 비판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결정적인 종말이고 시작이라는 사고도 실은 종말론입니다. 옴진리교나 나치 같은, 가장 병들었으며 나쁜 종말론인 것입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현재의 인류 기준의 멸망한 지구 서사보다는 아픈 사람을 의약품 마약으로 중독시켜 피묻은 떼돈을 버는 중인 기업 새클러가 나오는 낸 골딘의 다큐가 백만 배 더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악은 하코넨이나 임모탄처럼 혐오스러운 외모로를 하고 있지 않다. 궁금하다면 새클러 기업 소유자들의 외모를 보라! 올드머니룩 그 차제다!!! 


얼마 전에 영화 <한나 아렌트>를 봤다. 아이히만이 그냥 일반인1의 외모이듯 살인기업 소유주는 잘 관리된 날씬한 몸매의 올드머리룩일 뿐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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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데이님 먼데이입니당~ 아… 저 캐스팅ㅋㅋㅋ퓨리오사 봐야겠다…. 근데 저도 안야 조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ㅋㅋㅋ 응? 엥? 뭐여 듄? 이랬거든요. 찌지뽕입니다 찌지뽕. 요새 헐리웃 배우들 너무 돌려쓰는 거 같아여. 그에 비하면 한국 배우들이 더 다양한 듯 ㅋㅋㅋㅋ 계속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나오고…
새클러 기업 소유자들의 외모를 잠시 검색하고 오겠습니다…(응?) 현대의 착취는 달콤하고 세련되고 그리고 시각적이죠….
한나 아렌트… 영화로 철학 할 셈인가?! (하지만 영화는 철학!ㅋㅋ) 아직 감상 안한 채이기 때문에 말을 아끼겠습니다. 참, 저 키노 샀어요. 키노요! 그냥 그랬다구요 (헤헤)

2024-06-05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처님이 오신 날 전 날 저녁 나는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 뉴스를 클릭하게 되었다. 평소라면 그냥 제목만 읽고 저런 범죄가 있군. 역시 인간세상이야 하고 넘겼을 것인데 '왜'인지 클릭을 해서 보게 되었다. 해당 뉴스의 연관 영상으로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이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여동생은 그것이 알고싶다류의 사건사고살인범죄를 좋아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날은 '왜'인지 모르게 범죄살인 사건 이야기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유튜브는 휴대폰을 금방 과부하시키기 때문에 나는 팟캐스트로 듣기로 했다. 그런데 팟캐스트에는 없고 팟빵에만 있었다. 그래서 팟빵을 다운받고 회원 가입을 하고 본격적으로 한국살인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2024. 5월), 5선 국회의원 아들 살인자(2023.12월), 서초동 일가족 살인사건 살인자(2015. 1월) 이런 살인자들도 있으니 가난이나 무지도 살인의 원인이 아니다. 다만 가난이나 무지라는 환경에 있는 살인자는 살인 상황에 더 많이 더 쉽게 놓인다고 볼 수 있겠다.


살인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살다가 살인을 해야 자신의 기분이 해소될 상황에 놓이게 되면 주저 없이 살인을 저지른다고 난 생각한다.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와 분당 서현역 칼부림 살인자(2023.8월) 두 살인자 사이에 뭔 차이가 있겠나? 의대생도 공부 못했으면 서현역 살인자처럼 묻지 마 칼부림했을 거고 서현역 살인자도 공부 잘해서 의대 갔으면 여자친구가 자기 말 거역했다는 이유로 찔러 죽였겠지. 


뭐 따지고 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은 긴 세월 인간의 생존 필살기였을 텐데. 영화 <듄 2>만 해도 마지막 장면은 폴(티모시 샬라메)과 로타의 일대일 살인 대결이고, 폴이 칼로 로타의 목을 땄나, 심장을 찔렀나로 끝이 나는데. 주위에는 그 살인 대결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무예로서의 살인과 범죄로서의 살인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은 지녀야겠지만, 내 말은 천재 예술가가 자연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듯, 살인자도 자연의 섭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살인자도 같은 인간의 꼴을 하고 있기에 인권을 인정해주고 사형을 시키지 못하는 게 것이 인간의 비극이라면 비극. 


살인자로 태어나서 사람을 죽이고 무기징역으로 목숨만 건지고 사느니(물론 살인자들은 목숨이 삶의 전부이기에 만족하겠지만) 나는 살인자와 살인당하는 자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남을 죽이면서까지 살아야할 가치가 있나 이 세상이??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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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본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한국에 개봉하는 일본영화들은 인디도 아니고 오락상업도 아니고 1990년대 KBS2에서 방영하던 드라마게임 같단 말이지. 영화와 드라마 사이 어디쯤. 막 각본가 시험에 합격한 이들의 인턴쉽 같은. 

평론가들의 평이 매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평론가의 평과 나의 영화 취향은 다르기에) 별 기대 없이 봤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영화는 이제 이제 시시해 별점 6점이 최선이야 생각했던 나를 놀라 자빠지게 했다.

모든 장면이 거의 완벽하게 다 아름다웠다. 사소한데 흥미진진하고. 심지어 스릴러??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아... 역시 천재다 천재.'라는 생각만 했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주기적으로 천재들은 태어나는구나. 같은 교복을 입어도 다른 교복인 것 처럼 하이패션인 것처럼 굉장히 세련되게 입은 급우를 본 듯한 기분. 러닝타임 179분!! 이 패기는 어쩔 건가. 이 179분은 드라이브, 연극연습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대사와 화면 둘 다 완벽하다.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나? 특별한 플롯 없이 179분을 흥미진진하게 끌고 나가다니!! 뭐,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이긴 하지만. 하루키도 이 영화보고 놀라 자빠졌을 거 같다. 청출어람데스네 하면서!! 

<드라이브 마이카>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친하지 않은(직업으로서의 동료일 뿐인) 두 사람이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한담으로 시작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한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고, <드라이브 마이카>는 더 무거운 인생사에 대한 고백이다. 사실 나는 인생사에 대한 무거운 고백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괜찮아요. 제가 오늘은 피곤해서....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일 년 / 최은영>

나는 <드라이브 마이카>의 홋카이도행 드라이브에서 차 안 대화 같은 건 부담스럽다. 그런 인생사 고백은 듣고 싶지 않달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의 대화 정도가 적당하다. 이 회사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소개팅 어플에서의 만남은 어땠는지 사소한 사생활 이야기 정도는 감당가능하나 '내 아내에겐 남자가 많았다.'라는 고백의 대답으로 '내가 엄마를 죽였어요.' 같은 것은 역시 상당히 부담스럽지 않을까. 이 대화를 했다고 치자. 그다음 스텝은? 서로의 내밀한 인생사 고백을 나눈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절친베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 고백을 나누기 전처럼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이여야 할까? 

요즘 나는 시간을 메우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한 대화조차도 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 궁금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도 없으며, 할 말 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서재에서 일기로 모조리다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해소해 버리면 충분하기도 하고. 최은영의 단편 <일 년>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내가 더 이상 타인과의 한담조차도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었음에 관한 글(일기)만 쓰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이걸 쓸 시간(틈)을 확보하는 것에 한 달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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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9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3.27.개봉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이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가 화재였을 당시 보러 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그게 싫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타이틀로 하는 건 왠지 엄마찬스 같았다. 반칙 같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왜 보러 갔을까 싶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 <오키쿠와 세계>와 상영 시간이 앞 뒤로 있어서 간 걸음에 봤다. 


영화에 대한 감상 이전에 감독에 대한 감상 먼저 하자. 천...재!!!!! 다!!!!!!!!!!!!!!!!

몰라봬서 죄송하옵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그저 한 마디 아! 름! 답! 다!!!!!!!!!!

장작 패는 장면도 아름답고, 국수 먹는 장면도 아름답고, 운전하는 장면도 아름답다.


개인적 취향으로 맘에 들었던 장면은 기획사의 두 직원이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하던 장면. 이 부분만 편집해서 보고 또 보고 하고 싶었다. 이런 한담 좋지.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이지 않을까?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일 년>이 떠올랐다.



<오키쿠와 세계> 2024.2.21.개봉. 감독 사카모토 준지

아주 오래전 BIFF에서 사카모토 준지의 <얼굴>을 봤다. 이 영화보다 6~7년 쯤 뒤에 만들어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극장에서 보면서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얼굴>의 여주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데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일어선다.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두 번째로 본 사카모토 준지 영화다. 이 영화 역시도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는 훌륭한 여성이다!


ps. 이 영화 개봉을 통해서 안 건데, 봉준호랑 사카모토 준지는 친하다고 한다. ㅎ 사카모토 준지 내한 GV에 진행을 맡은 봉준호 감독!



<키메라> 2024.4.3.개봉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행복한 라짜로> 2019.6.20 이후 처음 개봉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내 최애 영화 리스트에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감독도 천재다! 

큰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갔고 그 기대를 여한이 없이 즐겼다. 집에 와서는 여운을 더 길게 뽑고 싶어서 <행복한 라짜로>를 봤다. (4월 28일에 왓챠서비스에서 종료됨 ㅠㅠ 다시 돌아와.)

내가 보기엔 <행복한 라짜로>도 <키메라>도 SF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이걸 영화로 이토록 자연스럽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거지?


ps. 영화 <혹성탈출 3>을 아직 보러 가지 않았는데, CG 범벅인 헐리웃 금수저 영화는 가급적 덜 보고 싶달까. 하지만 <혹성탈출>은 1, 2 편 다 봤기에 3편도 봐야 한다는 왠지 모를 스티커 모으기 심리가 작동 중...



<바람의 세월> 2024. 4.3.개봉 감독 김환태, 문종택.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나로선 세월호 관련 영화를 보는 것이 최선. 작게나마 관객수에 +1을 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실천해 봤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일단 스트레스받는다. 이런 참사가 발생했다는 자체가,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이 참사를 단순한 사고일 뿐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스트레스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몫 / 최은영>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로움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순간 정의로움을 버리는 인간들. 정의로움이 자신에게 득이 될 경우에만 정의로움을 지키는 인간들. (이미 <상실의 시대>에 언급되었던. 대학 붕괴를 외치며 데모를 했지만, 퇴학 위기가 닥치자 아닥하고 수업에 참여하던 정의를 외치던 작자들을 보고 열받은 와타나베의 출석 침묵 ㅋㅋㅋㅋㅋ)

그래서 애초에 나는 '정의로움'은 멀리 하고 살았다. '정의'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싫어서.


음...그리고 희영같이 지나친 사람도 난 별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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