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3.27.개봉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이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가 화재였을 당시 보러 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그게 싫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타이틀로 하는 건 왠지 엄마찬스 같았다. 반칙 같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왜 보러 갔을까 싶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 <오키쿠와 세계>와 상영 시간이 앞 뒤로 있어서 간 걸음에 봤다. 


영화에 대한 감상 이전에 감독에 대한 감상 먼저 하자. 천...재!!!!! 다!!!!!!!!!!!!!!!!

몰라봬서 죄송하옵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그저 한 마디 아! 름! 답! 다!!!!!!!!!!

장작 패는 장면도 아름답고, 국수 먹는 장면도 아름답고, 운전하는 장면도 아름답다.


개인적 취향으로 맘에 들었던 장면은 기획사의 두 직원이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하던 장면. 이 부분만 편집해서 보고 또 보고 하고 싶었다. 이런 한담 좋지.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이지 않을까?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일 년>이 떠올랐다.



<오키쿠와 세계> 2024.2.21.개봉. 감독 사카모토 준지

아주 오래전 BIFF에서 사카모토 준지의 <얼굴>을 봤다. 이 영화보다 6~7년 쯤 뒤에 만들어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극장에서 보면서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얼굴>의 여주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데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일어선다.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두 번째로 본 사카모토 준지 영화다. 이 영화 역시도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는 훌륭한 여성이다!


ps. 이 영화 개봉을 통해서 안 건데, 봉준호랑 사카모토 준지는 친하다고 한다. ㅎ 사카모토 준지 내한 GV에 진행을 맡은 봉준호 감독!



<키메라> 2024.4.3.개봉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행복한 라짜로> 2019.6.20 이후 처음 개봉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내 최애 영화 리스트에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감독도 천재다! 

큰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갔고 그 기대를 여한이 없이 즐겼다. 집에 와서는 여운을 더 길게 뽑고 싶어서 <행복한 라짜로>를 봤다. (4월 28일에 왓챠서비스에서 종료됨 ㅠㅠ 다시 돌아와.)

내가 보기엔 <행복한 라짜로>도 <키메라>도 SF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이걸 영화로 이토록 자연스럽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거지?


ps. 영화 <혹성탈출 3>을 아직 보러 가지 않았는데, CG 범벅인 헐리웃 금수저 영화는 가급적 덜 보고 싶달까. 하지만 <혹성탈출>은 1, 2 편 다 봤기에 3편도 봐야 한다는 왠지 모를 스티커 모으기 심리가 작동 중...



<바람의 세월> 2024. 4.3.개봉 감독 김환태, 문종택.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나로선 세월호 관련 영화를 보는 것이 최선. 작게나마 관객수에 +1을 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실천해 봤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일단 스트레스받는다. 이런 참사가 발생했다는 자체가,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이 참사를 단순한 사고일 뿐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스트레스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몫 / 최은영>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로움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순간 정의로움을 버리는 인간들. 정의로움이 자신에게 득이 될 경우에만 정의로움을 지키는 인간들. (이미 <상실의 시대>에 언급되었던. 대학 붕괴를 외치며 데모를 했지만, 퇴학 위기가 닥치자 아닥하고 수업에 참여하던 정의를 외치던 작자들을 보고 열받은 와타나베의 출석 침묵 ㅋㅋㅋㅋㅋ)

그래서 애초에 나는 '정의로움'은 멀리 하고 살았다. '정의'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싫어서.


음...그리고 희영같이 지나친 사람도 난 별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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