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독점공개 HBO 드라마 <나의 눈부신 친구> 시즌1-1화를 봤다. 아역의 릴라는 내 상상보다 못생겼고 레누는 내 상상 이상으로 예뻤다. 나는 이 소설의 1부만 2번 완독하고 나머지 2, 3, 4부는 미루게 된 상태로 책만 전권 소장한 상태.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내 마음이 내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진짜 장편소설이 읽고 싶어서 샀는데 1부를 읽는데만해도 너무 스트레스(부모때문에 태어나서 개고생하는 애들이 너무 불쌍)받아서 도무지 2권을 집어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레누가 사는 공동주택은 지옥 그 자체였다. 레누는 엄마들이 이웃과 서로 악담을 퍼붓고 험담하고 심지어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면서 싸우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기물을 파손하는 이유가 하수구에서 기어나온 수억마리의 벌레들이 밤이면 밤마다 잠든 엄마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엄마를 미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나레이션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끔찍하던지...


부모가 자식을 돌봐야 하는데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현실... 미쳐버린 과부 멜리나의 불쌍한(철든) 아들과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만회한다는 동백이의 잘못된 신념에 의해서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필구. 옹산이든 나폴리든 다르지 않다.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인간일 수록 번식에 필사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번식만큼 쉬운 성취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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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인간일수록 번식을 함으로써 그 모자람을 채우려고 한다. 

부모의 모자람 탓에 태어나아짐 당한 인간들만 불쌍하지. 
나 역시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애를 낳지 않는 게 아니란다. 멍청이들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게 섹스와 임신, 즉 번식.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번식을 한단다.
뭐 일단 섹스를 하는 거지.
가장 하찮고 쉬운 것을 뭐 위대한 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화하는 거 보면 너무 가소롭다.
국민연금 고갈을 막기 위해서 인간들이 계속 태어나야 한다는 것처럼 이기적이고 악한 핑계가 있을까?

내 부모는 늘 이렇게 변명한다.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그게 최선이었다."고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다.
"먹고 살기 힘들면 낳지 말았어야지."
하긴 그 덕에 부모를 반면교사 삼아서 나는 낳지 않는다. 
요즘은 먹고 살기 힘들지 않고, 다만 그냥 사는 거 자체가 힘드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힘들냐
하면
진상들, 염치 없는 인간들, 공공의 규칙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없는 인간들을
상대해야하는 것이 힘들다.
그냥 아주 내가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 내던져짐 당했구나 싶다.
왜 사람을 죽였을까? - 스트레스 풀려고.
라고 답하는 원숭이 한 마리를 존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건 쉽지가 않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봤다. 
옹산 시장의 게장 거리.
바로 그런 정서(특히 찬숙 패거리) 정말 싫어한다.
나는 동백이를 욕하고 괴롭혀도 되지만 너는 동백이를 욕하고 괴롭혀서는 안돼.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니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츤데레요, 니가 하면 괴롭힘.
살인범이 궁금해서 끝까지 시청했지만 드라마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나는 찬숙 패거리가 맘에 들지 않았고, 
그런 한국의 정서가 싫고 또 싫었다.
내가 하면 칭찬, 니가 하면 성희롱.
내가 하면 사랑의 매, 니가 하면 아동학대

웃기고 자빠졌네 진짜.

저런 드라마가 인간적이라고 하는 한국 정서가 나를 아주 빡치게 한다.
나를 아주 황시목+그르누이로 만든다.

그리고 동백아, 필구 왜 낳았어? 니가 제일 나빠.
필구도 그러더만,
내가 낳아달라고 했어? 엄마는 내 허락 받고 낳은거야? 라고


13살 11살 3살 자녀를 가진 83년생 김지영은 아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눈물을 흘렸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점순이도 아닌데 조혼을 하여 생각없이 애만 낳은 것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애는 무슨 죄인가.
태어난 게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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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엄청난 해무였다. 오전 11시까지도 해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 창밖을 보면 몽환적이긴 했으나 해무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망한 영화 <워터월드>가 생각났고, <무진기행>은 시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중2중2한 것이다. 촌스럽달까.


코로나 감염자 숫자는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다. 만삼천명일 때도 놀랐었는데 이제 만사천명. 


황시목 프로젝트는 순조롭다. 황시목 보다는 감정적 그르누이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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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황시목을 보면서 '황시목처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를 곰곰이 꼽씹어 보는 중이다. 


오랫만에 화창하다. 뭉게 구름이 점점이 박혀 있는 파란 하늘에 눈부신 햇살, 빨래 널기에 딱 좋은 날이다. 맘 같아서는 폭우로 얼룩진 자동차도 세차하고 싶지만 내일 오후에도 비 예보가 있어서 일단 다음으로 미룬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때를 제거해야 한다. 때를 제거하는 행위는 일종의 반성 혹은 자기성찰이다. 계속 전진만 하는 생활 속에서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루고 내가 저지른 오욕을 지우는 작업. 그래서 나는 청소와 청결에 소홀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즐겨듣는 팟캐스트에서 진행자가 어떤 사람들이 옷을 잘 갖추어 입는 것은 나약해서, 두려워서, 겁이 나서 그렇다고 했다. 일종의 갑옷 같은 거라고 비유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의 유명한 장군들은 다 겁쟁이라는 말이 되니까. 겁이 나서, 나약해서 입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할 여력이 되니까 갑옷을 갖춘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 옷을 허술하게 입을수록 강한 사람이라면 노숙자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는 말 아닌가? 


노숙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제는 갑자기 기분이 내켜서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을 봤다.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인간이 꾸역꾸역 좀비마냥 태어나는데 그걸 어쩔 수 있을까? 태어나지 않을 순 없지만 낳지 않을 순 있지. 그래서 나는 욕심대로 본능대로 낳고 나서 불만불평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나 자신의 운명을 한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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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지금 당장 타임머신에 태워서 구석기 시대에 갖다 둬도 사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인간들이 얼마간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살면 살수록 더 확고해진다. 지금이 covid-19 시대이니만큼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겠다고 지랄발광을 하는 인간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자신에게 마스크 착용을 지시했다는 이유로 버스 운전기사에게 폭행을 저지르는 승객 같은 인간은 2020년보다는 구석시 시대의 어느 날에 데려다 놓아야 한다.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뗀석기 하나를 쥐어주면서 들판을 뛰어다니면서 동물 살육을 하라고 하면 더 행복해 할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단지 2020년을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의 인권(감성)을 적용해서 존중해 준다는 것은 그런 인간들보다 조금은 더 진화한 인간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이다. 


2020년의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사회화 되지 못한) 혈거인들은 뉴스의 단골 재료다. 교통법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인내심을 지니지 못해서 각종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성욕하나 어찌하지 못해서 성범죄를 저지르고, 뗀석기로 살육을 저지르던 피맛을 잊지 못해서 타인을 패거나 죽이거나 한다. 또한 남을 괴롭히는 쾌감을 조절하지 못해서 (소소하게는) 악플을 달고 다니면서 양아치스러움을 즐기며 산다.


위에서 언급한 진화가 덜 된 인류(쉽게 말해서 양아치 날건달)로 인해서 빡이 칠 때마다 나는 드라마 <비밀의 숲>을 본다. 황시목이 되는 수 말고는 마땅한 대처법이 없는 탓이다. 


그런 양아치들에게 이솝우화 <바람과 태양>같은 대처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공감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너의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이런 피해를 입는다." 라든가 "그래 사는 거 참 힘들지." 우쭈쭈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전자의 경우 양아치들은 공감능력이 없기에 본인으로 인해서 남이 피해를 받는 것에 왜 본인이 상관해야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또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이 양아치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공감과 배려를 해주는 사람들의 선의를 양분(이용해 먹는다)삼아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여진(배두나 역)은 틀려먹은 것이다. 한여진식 인간 대처법은 맹자가 말하는 사단이 갖춰진 인간에게는 효과가 있으나 그 사단의 하나도 갖추지 못한(주로는 사단의 전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양아치 날건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든가 오히려 그들의 양아치적 인간성을 부추기는 불상사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황시목을 타산지석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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