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조각들 - 타블로 소설집
타블로 지음 / 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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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영어로 씌어졌던 20대 초반의 자신의 글을 30대의 문턱에서 다시 국어로 고쳐쓰는 감회가 남달랐을 듯 하다. 그의 조각들은 모두 20대의 문턱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를 넘어서는 고통. 청소년기에 겪었던 방황의 끝. 그 방황의 끝은 언제라도 될 수 있었다. 10대의 말일수도 있었고, 20대 중반, 30대, 40대일수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청소년기의 아픔을 당대에서 끝내는 행운을 모두 누리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죽을때까지 끌어안고 같다. 다행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그런 불행까지는 읽지 않아도 되었다. 감사할 일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그 아버지의 거대했던 과거와 그 때문에 지금의 현재를 용서할 수 없는 아들의 이야기. 안단테. 아픈 어머니를 돌봐야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다 대마초 흡연으로 숨이 가빠진 어느날. 다시 되찾은 엄마의 따뜻한 품에 관한 이야기. 쉿. 사진에 대한 꿈을 접고 값싼 여배우들과 잠자리를 하며 캐스팅감독으로 살아가던 어느날 집에 들어온 쥐와 함께 자신의 현재를 잘라버리는 이야기 쥐. 어떻게 보면 아주 괴로웠을 과거를 함께 해 온 담뱃갑에 관한 이야기 성냥갑.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인생이 왠지 꼬여버린 주인공이 머리가 다 세어서 만난 동창회장에서 비로소 당시의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승리의 유리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인의 살인사건에 대해 사과를 듣게 되는 주인공. (아마 작가 자신의 이야기같은) 증오범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전쟁영웅이며, 자신은 복싱챔피언이라는 환상에 빠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서 겁쟁이 소리를 듣는 천재작가 아들의 최후의 일격. (아버지가 정신과의사에게 날린 일격인지, 아들이 빈 총을 자기의 머리에 겨누고 당긴 방아쇠가 일격인지 아마도 후자겠지만) 이러한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퍼즐의 합은 상처받은 10대의 딱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제 딱지가 앉은 자리에는 상처가 아무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 모든 조각들의 끝이 안심되는 것은 그것들이 날카로운 유리의 조각이 아니라 다채로운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의 조각같았기 때문이다. 퍼즐의 조각은 누구도 찌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하게도 찔리지 않고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아픔의 조각조각들. 조각났기 때문에 꺼내놓을 수 있는 상처들. 

내 10대도 그랬던가. 그가 당신이라고 지칭했으니 내게도 있었겠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하루하루들. 이제 10여년이 지난 지금 조각났기에 꺼내놓을 수 있는 상처들. 그리고 그랬기에 더욱 담담할 수 있는 이야기들. 듣는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의심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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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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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접하고는 코맥 매카시가 아름다운 문체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체로 유명한 작가의 책을 번역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번역을 잘 해도 본래의 언어였을 때 가졌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옮긴이도 최선을 다해 번역했다고 말할만큼, 그래서 번역한 글을 보아도 와~ 놀랄만큼 그의 문체는 독특하고 또 길었다.

감정이 거세된 서술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감정도 짙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부의 사막에서 도시로, 또 사막으로 이동하는 소년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그가 부랑자일 때나 불법 군대의 군인일 때나 그의 군대가 모두 전멸 당할 때나 놀라운 지략으로 승리할 때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내내 삭막한 사막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촉촉함. 그 감정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으니 기쁜것인지 슬픈것인지 혹은 연민하는지조차. 그저 장면이 있을 뿐이다. 장면, 또 장면. 그리고 길게 늘어난 문장들은 숨쉴틈을 주지 않아 독자를 목마르게 한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물을 찾는 소년을 따라가면서 나 또한 끊임없이 목마름을 느꼈다. 

오늘. 살아있는가 죽는가

소년이 살아내는 공간에는 삶과, 죽음밖에는 없다. 오늘 살아있거나 혹은 오늘 죽거나이다. 바로 옆에 있던 누군가가 죽어나가도 그저 그럴뿐. 생존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으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런 시절이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소설로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떠오르는 태양조차 그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피와, 절망의 상징인 것이다. 하루가 시작되면 또 누군가가 죽는것. 혹은 그것이 나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동녘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웠다. p.67"
"아침에 오줌빛 태양이 어스름한 먼지 유리판 너머로 형체 없이 떠올랐다. p.70"
 
춤추는 곰

인생이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극한에 내몰리기까지는 깨닫지 못할 뿐.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의 감정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인물. 모두에게는 죽음이 오직 자기에게만 삶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잔인한 판사는 이제 어른이 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연. 그런걸까.

"무대에는 오직 짐승 하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네. 공간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는 그 하룻밤 동안 이름은 없되 목숨을 이어갈 운명이지.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내려가지. 춤추는 곰이 있고 춤추지 않는 곰이 있어.pp.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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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클루스 제1권 - 해골이 쌓인 미로 39 클루스 1
릭 라이어던 외 지음, 김양미 옮김 / 서울교육(와이즈아이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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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한 39개의 단서. 이 단서들을 다 모으려는 카힐가문의 아이들 이야기이다. 사랑하던 외할머니 그레이스의 장례식날에 에이미와 댄 남매는 외할머니의 저택에서 100만달러냐 단서냐 선택을 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에이미는 생전에 할머니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기억에 힘입어 용기있게 자신과 동생의 몫 200만 달러를 과감하게 버리고 단서를 선택한다. 첫번째 단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따라가라는 것. 이후로 남매는 세계를 여행하며 온갖 모험과 위험에 처하게 된다. 생전에 그레이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이유로 교활하고 폭력적인 친척들은 모두 공동의 적으로 에이미 남매를 지정한 상태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단서를 찾는 것 보다는 이 두 남매를 먼저 제거하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누가 적인지 친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재빠른 것도 아닌 이 남매가 과연 위험들을 모두 헤쳐나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남매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경쟁자다. 평소에는 으르렁거리며,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 이해하기도 힘들어했지만 남매는 단서를 찾아가면서 서로에게 없는 부분들을 서로가 채워주며 앞으로 나아간다. 누나는 동생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 동생은 누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둘의 사이는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도 있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 그들의 눈물겨운 남매애를 볼 수 있다는 점.

또 하나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여러가지 사실들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약간의 픽션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의 업적의 대부분은 사실이다. 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 것보다 좀 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위인에 대해 배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9권의 대장정이 남아있다. 이 두 남매의 모험이 부디 성공적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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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쥐 퍼민
샘 새비지 지음, 황보석 옮김 / 예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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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꼭지를 열 두개밖에 가지지 않은 엄마쥐에게서 태어난 13번째 쥐 퍼민. 그는 이렇게 잉여적인 부분을 태초부터 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도 잉여적이다. 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소비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생산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삶. 그런데 묘하게도 이러한 삶은 그가 사랑한 인간 노먼과, 제리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쓸쓸한 그들의 뒷모습과, 퍼민의 마지막 모습은 서로 닮아있었다. 

제목에 집착하는 나의 특성상 읽으면서 내내 퍼민이 언제쯤 소설을 쓰게 될까를 생각했다. - 퍼민이 미리 경고했듯이 라따뚜이의 주방장쥐와 혼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책을 마치고 난 지금은 퍼민이 머릿속으로 소설을 썼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책들을 먹고, 그것을 머릿속에 자신의 이야기로 배설했다. 

인간보다 인간적인데도 불구하고 쥐로 살아가야 했던 퍼민의 삶이 비극이라고는 하지만, 꼭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쥐가 쥐답게 살아가는 것도 꽤나 비극적이니까. 퍼민의 형제중 하나가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자동차 바퀴에 깔려 의미없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마도 형제들 중 일부는 그렇게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쥐약을 먹었을 수도, 사람들의 눈에 띄어 빗자루에 맞았을 수도 있다. 퍼민이 처할 뻔 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그들도 처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퍼민의 비극은 그가 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만큼 자의식도 강했다. 그것이 더 비극이었다.


물론 나는 그 고통의 강도가 나의 엄청난 허영심과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생각 때문에 속만 더 상할 뿐이었다. 그저 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허영심까지 강하다는 것, 그것은 웃음거리를 더해주는 것밖에 되지 못했다.
 
페이지 : 74쪽  

쥐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소설은 그 소재가 쥐이든 개이든 뱀이든 소이든간에 결국은 모두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책을 씹어 먹으면서 성장한 퍼민의 자의식. 그리고 그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의 허영심. 고독함 속에서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았던 - 그는 이것까지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을지라도 - 퍼민의 사회적 욕구. 그것이 우리를 늘 삶에서 비참하게 스러지도록 만드는 것들이 아니었던가. 

퍼민의 책목록을 들여다 보면서 읽었던 책의 제목을 만나는 일. 그 주인공을 상상해보는 일. 그리고 읽어 볼 책 목록에 그것들을 추가해 보는 일.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해 볼 수 있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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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아버지
카렐 판 론 지음, 김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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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아르민은 아내 모니카를 아들 보가 세 살이던 해에 매우 급하게, 혹은 어처구니없이 잃는다. 모니카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나는 죽을 거야.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 미안해라는 말은 죽게되어 미안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의 미안하다는 말이었을까.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조건 전자의 의미라고 생각했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아르민이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꼭 전자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

 

 아무튼 아르민은 속시원히 밝혀 줄 아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보가 열 세 살이 된 후에서야 자신이 보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들. 지금까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유전자가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다니. 끊임없이 아르민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물음을 반복한다. 진실을 알게되면, 그렇게 되면 아르민은 자유롭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자유롭게 되든, 아니든간에 그는 나름의 방법으로 보의 아버지 목록을 만들기 시작한다. 때로는 서슴없이 자신의 신분을 숨겨가며 용의자(?)의 아내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기도 한다. 결국 자신의 아들 ‘보’와 똑같은 이름의 아들을 가진 니코라는 인물이 거의 확실시되고. 아버지의 죽음을 치른 후 그는 ‘보’와 자신이 그토록 닮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자신의 아들의 아버지를 찾게 된다.

 

네덜란드 문학을 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도 없고. 문화도 잘 모르고.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나라의 시대적 사회적 반동인물들이 아니라면, 아마 현재의 네덜란드는 매우 자유롭고 한편으로는 문란한 곳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인물들의 성과 삶이 개방되어 있었다. 소설로만 읽을 때는 제법 재미있는 삶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면 글쎄, 그걸 합리적이라는 말로, 편리하다는 말로 간단하게 설명해버릴 수 있을런지. 걱정스러웠다. 

 

자기 아들의 아버지를 찾는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결국 부자(?)간의 가족애로 마무리된다. 어떤 삶에든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족이 필요하다. 결국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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