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처음 접하고는 코맥 매카시가 아름다운 문체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체로 유명한 작가의 책을 번역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번역을 잘 해도 본래의 언어였을 때 가졌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옮긴이도 최선을 다해 번역했다고 말할만큼, 그래서 번역한 글을 보아도 와~ 놀랄만큼 그의 문체는 독특하고 또 길었다.

감정이 거세된 서술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감정도 짙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부의 사막에서 도시로, 또 사막으로 이동하는 소년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그가 부랑자일 때나 불법 군대의 군인일 때나 그의 군대가 모두 전멸 당할 때나 놀라운 지략으로 승리할 때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내내 삭막한 사막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촉촉함. 그 감정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으니 기쁜것인지 슬픈것인지 혹은 연민하는지조차. 그저 장면이 있을 뿐이다. 장면, 또 장면. 그리고 길게 늘어난 문장들은 숨쉴틈을 주지 않아 독자를 목마르게 한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물을 찾는 소년을 따라가면서 나 또한 끊임없이 목마름을 느꼈다. 

오늘. 살아있는가 죽는가

소년이 살아내는 공간에는 삶과, 죽음밖에는 없다. 오늘 살아있거나 혹은 오늘 죽거나이다. 바로 옆에 있던 누군가가 죽어나가도 그저 그럴뿐. 생존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으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런 시절이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소설로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떠오르는 태양조차 그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피와, 절망의 상징인 것이다. 하루가 시작되면 또 누군가가 죽는것. 혹은 그것이 나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동녘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웠다. p.67"
"아침에 오줌빛 태양이 어스름한 먼지 유리판 너머로 형체 없이 떠올랐다. p.70"
 
춤추는 곰

인생이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극한에 내몰리기까지는 깨닫지 못할 뿐.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인간의 감정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인물. 모두에게는 죽음이 오직 자기에게만 삶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잔인한 판사는 이제 어른이 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연. 그런걸까.

"무대에는 오직 짐승 하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네. 공간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는 그 하룻밤 동안 이름은 없되 목숨을 이어갈 운명이지.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내려가지. 춤추는 곰이 있고 춤추지 않는 곰이 있어.pp.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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