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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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의 이야기는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에서 시작된다. 시점은 3인칭으로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으젠 라스티냐크라는 청년의 입장을 둘러싸고 전개되기 때문에 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노인은 제면업자로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딸들에게 자신이 벌어 놓은 대부분의 재산을 지참금으로 넘겨주고 그 후에도 그녀들의 소비와 빚을 떠안다가 비참하게 죽어간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
 
페이지 : 368쪽  
고리오 영감역시 알고 있었다. 딸들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로서 자신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삶을 화려하게 유지하는 데에 급급해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도 그는 딸들에 대한 비극적인 애정을 멈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딸들이 돈이 필요할 때에만 자신에게 애원하고 울부짖었음에도, 때로는 그 부채가 딸들의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일 때에도 그는 그녀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위엄이 아니라 오로지 자애로서 대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이토록 비참한 것은 딸들에게만 죄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교육을 딸들에게 해주지 못한 탓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부재를 딸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위로받고 싶어했다. 딸들은 절대 아내가 되어줄 수 없는데도. 딸들이 스스로 성숙하여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또한 그의 과잉보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역시 그의 삶에 눈물짓게 되는 것은 그의 헌신이 맹목적이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고리오 영감은 어느 자식이나 꿈꾸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천성이 착한 자녀를 낳았던들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한편 여기서 고리오 영감과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다. 빅토린양의 아버지가 아마 고리오 영감과 대비되는 극단에 서 있을 것이다. 그는 아들과 함께 살면서 딸인 빅토린 양의 존재는 아예 무시하고 있다. 죽은 아내의 눈물섞인 유서와 눈 앞에 서 있는 딸이 울먹이며 호소하는 것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빅토린양은 아버지를 옹호하고 존경한다.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가 전 재산을 넘겨준 후에는 고리오 영감의 딸들처럼 변해버리고 말았을까! - 이 아버지의 냉정함 때문에 그가 곁에 두었던 아들이 보트랭이라는 인물의 사주에 의해 살해당하고 - 격투 형식이었지만 - 마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아버지의 모습이든 정도를 벗어난 것은 자식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되었다. 

파리의 사교계에서 법학교 학생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잃어가는 청년 라스티냐크의 성장기도 읽을 만 했다. 고리오 영감을 통해서 그는 인생을 배웠을 테니, 그의 임종을 함께하는 수고로움은 지불해도 좋은 수업료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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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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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한마디로 말하면 잔혹 성장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일반적인 성장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잔혹하고 무서운 성장기를 거치는 경우를 묘사한 소설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소년이 어른이 되어갈 때 일반적으로 거치는 통과 의례 - 방황, 사랑, 눈물, 상처 등등 - 을 모두 거세하고 단지 거기에 선과 악, 선택과 강요. 두가지 축을 놓고 인간의 성장을 논하고 있다. 

무엇이 소년을 성장시키는가.

초기의 소년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다. 늙은이가 가지고 있는 책을 빼앗아 찢어버리고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며, 약을 탄 우유를 마시고 누구든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면 상대가 누구든 실행해버리고 만족한다. 열다섯밖에 안된 어린아이지만 그는 자기가 다 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을 이용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이미지는 주변에서 바라보는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그는 그저 ’꼬마 알렉스’였다. 

’꼬마 알렉스’는 그래서 끊임없이 배신당한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리더라고 믿고 행동했던 동무들 집합에서, 그 다음은 교도소에서 자신이 나름 헌신하며 호의를 이끌어 내려고 생각했던 신부에게서, 석방 후 자신을 돌봐주고 자신의 처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어른들’의 무리에서. 그들 중 누구도 알렉스의 미래를 염려하거나 그의 개인 신변을 걱정해 준 이는 없었다. 모두들 말로만 그를 위해주었고 결정적일 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가 뿌린 악의적 씨앗이 자라나 열매 맺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리 동정만 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충분히 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변도 그다지 선하지 않았다. 악에 악을 더해 경험한 후에야 그는 성장할 수 있었다.

강요된 선은 선택한 악보다 나쁜가.

내무부 장관과 브로드스키 박사가 알렉스에게 실행한 요법은 아마도 조작적 강화를 통한 방법인 것 같다. 즉, 신체적 고통-메스꺼움-과 폭력, 강간, 살인, 절도등의 행위를 지켜보는 것을 연관짓는 것이다. 먹이가 나오지 않아도 종이 울리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알렉스는 신체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주사를 맞지 않아도 폭력이나 살인 등의 나쁜 행동을 보거나 상상하기만 하면 그 신체적 고통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은 과학적으로는 성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강화는 계속 연결시켜주지 않으면 저절로 소멸된다.ㅡㅡ; )

여기서 문제는 신이 부여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없애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이다. 그대로 둔다면 당연히 악을 선택할 인물이 있다면, 그에게 강요해서라도 선을 선택하게 하고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논리다.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요청이 더 구체적이다. 알렉스가 감옥에 가서 겪은 내용을 읽어보면 감방이 모두 꽉 차 있으며,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늘 더 많이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무부 장관은 이러한 감옥상황을 개선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획기적인 범죄율감소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견고하게 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브로드스키 박사는 자신의 실험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리고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욕망 앞에 인간의 기본권 같은 것은 - 더더군다나 알렉스같은 범죄자에게는 - 전혀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로운 선택을 신이 가져가지 않은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실 수 없어서 인간을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을 선택할 때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앞으로 그에게는 선택할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면, 처음에는 범죄를 줄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 다른 인간들 위에 마치 신처럼 군림하게 될 것이다. 정치력을 지닌 사람이, 또 과학의 힘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이기적인가를 떠올려 본다면 (내무부 장관과 브로드스키의 예를 볼 때) 이러한 권력이 생기게 될 때의 위험성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소설의 각 장의 매 첫머리에, 또 이야기 중간중간에 알렉스는 이처럼 말한다. 알렉스의 성장기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는 자신의 밖에서 서술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신상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는 와중에 그의 자아는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의 이야기를 구경꾼이 구경하면서 중계하듯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이 이렇게 벌어졌어.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 라는 식의 가벼운 말투. 그래서 그의 일이 심각하게 되어가는 와중에도, 그에게서 괴로움과 절망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독자들은 그의 자아와 함께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의 집으로 들어와 아이를 만나게 되는 부분에 이르면 그의 자아는 그의 생활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전까지는 남의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아이의 사진이 실제 아이로 전환되면서 그는 성장하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생활을 스스로 청산하게 되는 계기는 매우 모호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번 돈을 이유도 없이 남에게 주는 것이 아깝다고 느끼다가, 늘 즐기던 친구들의 작당이 시덥잖게 느껴지고, 그리고 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우리의 성장은 이렇게 축적되어오던 경험이 어느 순간 발현하여 변화를 일으키면서 이루어진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도 변화하지 않던 알렉스가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 변화를 보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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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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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꿈을 꾸면서 꿈과는 다른 현실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인물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연의처럼 기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박지원의 소설들이 떠오른다. 남에게 들은 것처럼 꾸며 이야기의 시작을 삼은 것이나, 일반에서는 부족하거나 모자란 인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논리력으로 오히려 정상적이라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점에서 나는 호질의 도입부와, 광문자전 등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책에 기록된 천명의 내용. 그리고 정가가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는 예언이 담긴 거울의 존재. 그리고 아이의 머리에 우연히 생긴 상처를 가지고 정처사는 아들이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왜 아들을 황제로 보이게 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트릭을 썼는지는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화자는 정처사의 입장과 황제측근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현대의 독자들의 사고를 고려해 본다면 그 반대자들의 의견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아버지는 사기꾼이고 황제 역시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미치광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생활 터전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후반부에 가면 그들이 그렇게 허황된 미치광이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보여준 여러 덕목들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들을 가린 것이다. 

황제가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망은 어느정도 삶에서 실현된다. 놀라운 것은 그가 모은 사람들이 대부분 정상의 범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인데도 그의 나라에서 맡은 부분을 충실하게 이루어낸다는 점이다. 일찍 죽은 마숙아는 사기꾼이었고, 우발산은 노비출신의 무지한 인물이었으며, 신기죽은 몽상가이면서 알콜중독자였다. 마숙아는 황제를 실로 황제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보좌하며 의리를 다 바쳤다. 그리고 가장 정상적인 인물 김광국의 경우에도 황제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어쩌면 황제가 실로 황제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진짜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짜 황제였다면, 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미리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큰 권력은 분명 그를 타락시켰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특이점은 이밖에도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황제의 공간에 있다. 그는 한일합방과 독립운동을 겪으며 일제에 신음하는 국토를 살았다. 서구문물이 들어왔고, 공산주의의 유입되었으며 종교인들도 이 땅을 밟고 들어와 포교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양상이 끊임없이 황제가 살고 있는 땅에 들어오고 때로는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국가는 이를 잘 막아낸다. 황제의 천명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순진한 사람들의 믿음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수십년의 세월에 걸쳐 이제는 생활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제 황제의 국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소공동체가 과연 잘 지켜질 수 있을까. 높은 나뭇가지에 작은 둥지속에 든 알을 보는 것처럼 언젠가 고라니떼에 발각되는 것은 아닐런지 걱정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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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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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나는 그 노인이 황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말-1972년경으로 그야말로 격동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씨의 왕가가 이어지던 조선에서 태어나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그는 이후 일본에 의해서, 또 해방 이후에는 남과 북 각기의 이념에 의해서, 전쟁 후에는 정부라는 조직에 의해서 계속 자신이 차지해야할 왕좌를 놓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황제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던 그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진정한 황제였음이 분명하다. 

비유하여 우리의 삶을 전장으로 여긴다면, 짐과 그대가 이룬 것은 그 커다란 승리였으리라. 한바탕 꿈이라도 누구든 꾸어보고 싶은 꿈이었으리라.
 
페이지 : 257쪽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그 전에 그가 했던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한 다스림에 더하여 꽤나 의미있는 말이다. 다스리지도 않고 다스림 받지도 않는다는 그의 최후의 깨달음은 그가 그런 의미에서 황제일 수 있었음을, 그리고 한바탕 꿈이었다고 해도 꾸어볼 만한 꿈이었다는 말에서 그의 삶의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하더라도 한 때 그가 누린 시절들은 제법 아름다웠음을 생각했다. 

<황제를 위하여>는 우리 역사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재야에 숨어 황제로 이름했던 인물의 삶과 평행선상에 놓고 함께 전개시키고 있다. 역사는 이 재야 황제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과, 때로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행운의 연속을 설명해주는 교묘한 장치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황제의 생활의 궁핍함과 황제 주변 사람들의 변화과정을 설명해주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황제의 삶과 함께 역사는 보다 냉철한 방식으로 관찰된다. 황제의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배신과 반목을 통해서. 

묘하게도 황제의 측근들은 황제를 배신한 적이 없는 반면, 황제일가의 밖에서는 끊임없이 배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충성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시대.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관계도 버렸던 시대. 그 시대의 가장 순수한 알곡이 황제와 그의 충신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실소를 머금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천명을 믿고 어디에나 좌충우돌했던 황제를 향했던 냉소가 마지막에는 그를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 짓게 되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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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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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은 어떤 언덕이어도 좋다. 그리고 그곳에 나무는 어떤 나무라도 상관없다. 단지 그런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곳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중이다. 고도와의 약속이 무엇인지, 고도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는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고도는 두 사람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일 수 있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둘에게 절대적이어서 둘은 그 약속을 지키느라 이 언덕에 매일 오르는 중이다. 

인생은 기다림

이 기다림을 보여주는 이틀간. 비슷하게 계속된다. 두 사람은 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는 바위에 앉아 말놀이를 하거나,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도를 기다리는 일로 돌아간다. 그들의 모든 행동의 귀결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가도 고도를 기다려야한다는 목적을 상기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말은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무언가를 실제로 행하는 때는 아마도 고도를 만났을 때겠지만 그들의 기다림이 끝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워보인다. 그들이 기다림에 지칠때쯤 만나게 되는 '소년'의 말 때문이다. '내일'이면 오겠다는 고도. 그러나 '내일'에는 또 '내일'오겠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고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할 '내일'인지도 모른다.

'내일'의 힘

소년이 와서 '내일'에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났을테니. 하지만 그랬다면 틀림없이 비극이다. 왜냐하면 둘은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도가 없다면 죽음. 하지만 내일은 고도가 올지도 모르니 일단은 살아보자는 결론. 그것의 매일 반복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을 살기는 힘들었지만 '내일'은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 오늘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일'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 그것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자기 확인의 시간

고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기다리던 고도와 발음상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 포조.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둘에게 상기시킨다. 어떤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받으려고 하는 그의 성향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임금을 닮았다. 어린왕자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하면서 어린왕자가 하려는 행동을 미리 명령했던 임금말이다. 자기의 권력을 확인해야했던 임금처럼 포조는 자기의 존재를 확인해야했다.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확인되었던 럭키와는 달리,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자기를 스스로는 확인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불안했던 것이 아닐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다.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이틀간의 일을 마치 인생으로 보이게 하는 특수한 장치다. 이 두 사람은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이 어느날 갑자기 변화하는 것이라는 시사를 던진다. 포조는 전날과 달리 장님이고, 럭키는 전날과 달리 벙어리이다. 게다가 포조에게는 전일에 보였던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거드름도 없으며, 목표도 없다. 럭키와의 관계도 크게 달라져 있다. 둘은 상부상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블라디미르가 묻자, 그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 같은 대답을 한다. 어느날 그렇게 되었다.고. 그 어느날이 어제와 오늘 사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긴 인생을 축약한다면 어제 본 사람의 모습이 오늘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변화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계속 눈을 뜨고 있었던 어제. 그리고 갑자기 보이지 않는 오늘. 그 시점이 이 이틀에 걸쳐 있었다고 해도 뭐가 이상하겠는가.

이 소설은 사뮈엘 베케트가 2차 대전시 전쟁을 피해 숨어있었던 생활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가 기다린 고도는 평화로운 세계였을테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숨어있는 생활을 끝낸 다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기다리던 평화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었을까. 소년을 만나고 다시 내일을 기약했던 두 사람과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지. 그리고 우리의 고도도 내일온다고 우리에게 전언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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