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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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은 어떤 언덕이어도 좋다. 그리고 그곳에 나무는 어떤 나무라도 상관없다. 단지 그런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곳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중이다. 고도와의 약속이 무엇인지, 고도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는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고도는 두 사람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일 수 있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둘에게 절대적이어서 둘은 그 약속을 지키느라 이 언덕에 매일 오르는 중이다. 

인생은 기다림

이 기다림을 보여주는 이틀간. 비슷하게 계속된다. 두 사람은 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는 바위에 앉아 말놀이를 하거나,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도를 기다리는 일로 돌아간다. 그들의 모든 행동의 귀결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가도 고도를 기다려야한다는 목적을 상기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말은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무언가를 실제로 행하는 때는 아마도 고도를 만났을 때겠지만 그들의 기다림이 끝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워보인다. 그들이 기다림에 지칠때쯤 만나게 되는 '소년'의 말 때문이다. '내일'이면 오겠다는 고도. 그러나 '내일'에는 또 '내일'오겠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고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할 '내일'인지도 모른다.

'내일'의 힘

소년이 와서 '내일'에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났을테니. 하지만 그랬다면 틀림없이 비극이다. 왜냐하면 둘은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고도가 없다면 죽음. 하지만 내일은 고도가 올지도 모르니 일단은 살아보자는 결론. 그것의 매일 반복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을 살기는 힘들었지만 '내일'은 다를지 모른다는 희망. 오늘은 이루지 못했지만 '내일'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 그것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자기 확인의 시간

고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기다리던 고도와 발음상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 포조.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둘에게 상기시킨다. 어떤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받으려고 하는 그의 성향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임금을 닮았다. 어린왕자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하면서 어린왕자가 하려는 행동을 미리 명령했던 임금말이다. 자기의 권력을 확인해야했던 임금처럼 포조는 자기의 존재를 확인해야했다.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확인되었던 럭키와는 달리,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자기를 스스로는 확인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불안했던 것이 아닐까.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다.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이틀간의 일을 마치 인생으로 보이게 하는 특수한 장치다. 이 두 사람은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이 어느날 갑자기 변화하는 것이라는 시사를 던진다. 포조는 전날과 달리 장님이고, 럭키는 전날과 달리 벙어리이다. 게다가 포조에게는 전일에 보였던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거드름도 없으며, 목표도 없다. 럭키와의 관계도 크게 달라져 있다. 둘은 상부상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블라디미르가 묻자, 그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 같은 대답을 한다. 어느날 그렇게 되었다.고. 그 어느날이 어제와 오늘 사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긴 인생을 축약한다면 어제 본 사람의 모습이 오늘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변화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계속 눈을 뜨고 있었던 어제. 그리고 갑자기 보이지 않는 오늘. 그 시점이 이 이틀에 걸쳐 있었다고 해도 뭐가 이상하겠는가.

이 소설은 사뮈엘 베케트가 2차 대전시 전쟁을 피해 숨어있었던 생활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가 기다린 고도는 평화로운 세계였을테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숨어있는 생활을 끝낸 다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기다리던 평화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었을까. 소년을 만나고 다시 내일을 기약했던 두 사람과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지. 그리고 우리의 고도도 내일온다고 우리에게 전언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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