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조여사를 모델이 되게 해 주세요
[오마이뉴스 2006-10-25 07:21]    
[오마이뉴스 배지영 기자]
▲ 엘리자베스 키스 <바느질하는 여인>
ⓒ2006 이충렬
가을비가 절도 있게 직선으로만 퍼붓는 일요일 아침에 당신 그림을 보러 전북도립미술관에 갔습니다. 당신의 눈을 통해 1920년대에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았어요.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180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이겠지요.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을, 신산하고 고단했을 삶이, 팍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좋았어요. 돌아가신 외할머니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보릿고개를 겪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지독한 통증으로 고생하셨지만 제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웃음이 있고, 반듯하셨지요. 당신의 그림은 '힘들고 아팠어도 그 때가 참 좋았구나' 되돌아보는 추억 같았습니다.

당신은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일본에서 판화 공부를 하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끝난 직후에 조선에 왔지요. 아무리 말해도 설명할 수 없다는 원산의 아름다움에 빠졌고, 조선의 풍경을 사랑했고, 빨래, 밥 짓기, 살림살이를 모두 아내에게 맡긴 채 고고하게 살아가는 조선의 남자들을 간파했습니다. 조선에서는 가장 비극적인 존재라면서 새색시를 그리기도 했고요. 조선 여자들을 끈기와 진정으로 대해야 한다고도 했지요.

 
▲ 엘리자베스 키스 <원산, 조선>
ⓒ2006 이충렬
그런 당신이 살아있다면, 당신 그림의 모델이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고한 남자와 살면 여자는 팍팍하고 외로워요. 저희 엄마가 그렇게 사셨거든요. 그런데도 추석날에 달빛 아래서 줄넘기를 하는 우리 엄마를 본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반할 거예요. 웃는 얼굴이 너무 천진해 보여서 가끔은 2%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해요.

우리 엄마 조여사는 1949년에 태어났습니다. 당신 그림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어릴 때 명절이면 '때때옷'을 입던 여자애였지요. 혼인하고 나서부터 몇 번씩이나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조여사는 늘 잃어야 했어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보증을 선 남편 때문에 집을 잃고, 땅을 잃고, 애써 모은 돈을 잃었지요.

몇 년 전에는 유일한 재산인,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산 아파트를 잃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기피해요. 일터에만 나갈 뿐, 집 앞 슈퍼에도 드나들지 않게 되셨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사고로 눈 한 쪽을 잃었어도 엄마는 안으로 삭일 뿐 한으로 여기지는 않아요. 그래서 다행이에요. 한국에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귀신이 되어 떠돈다고 믿거든요.

저는 당신 그림을 보러 가기 전 날, 동생 부부와 단풍놀이를 갔습니다. 당신도 한국의 감나무를 보았겠지요? 열 명도 넘는 자식을 다 젖 먹여 키운 할매 가슴 같은 감나무가 지천이었습니다. 감을 좋아하는 조여사는 풍성한 감나무가 있는 집에 시집왔어요. 하지만 조여사 신랑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감나무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듯 조여사는 혼자 살림을 떠안고, 아이 넷을 공부 시켰어요.

조여사는 손마디가 닳아 없어질 만큼 일하며 살았어도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어떤 곳에 가든 "아따 좋아야"하면서 금방 좋은 점을 찾아내십니다. 행여 비싼 밥집에 들어가 딸이 번 아까운 돈을 쓸까 봐 언제나 싸구려 음식을 고집하시는 조여사. 우리 자매는 대둔산 밥집에서 비싼 밥을 시켜놓고서 울컥, 목이 메었어요.

단체로 온 중년들이 막걸리를 먹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발표력이 없어서 딸이 혼인하던 날 "제가 신부 어머니입니다"를 말하면서도 덜덜 떠셨던 조여사지만 이런 곳에 와서 놀 줄 아는 사람이지요. 조여사라면, 화끈하게 노래 한자리 뽑고 있거나 벌써 불콰해져서 느린 스텝을 밟으면서 춤을 출 수도 있겠지요.

엘리자베스 키스.
당신은 언제, 당신이 나고 자란 스코틀랜드 말을 썼나요? 저는 유일하게 우리 엄마 조여사와 얘기할 때는 고향 말을 쓴답니다. 단풍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조여사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조여사, 뭣하요?"
"예, 결명자 따고 있어라우."

"좋소?"
"좋아라우. 대문 앞에다 쬐까 심었는디 겁나게 많이 됐어라우."

"조여사, 집에 감 있소?"
"없어라우. 신랑한테 세 개만 사오라고 했는디 안 사옵디다."

"감을 한 상자 사 갖고 가께라우?"
"오믄 좋제요. 진짜 올라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뭔가 저지르는 기분으로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이 그랬어요. 더구나 행동으로 옮겨서 가고 싶은 곳이 조여사가 사는 집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를 타고 조여사가 있는 영광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 남매들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집에서 엄마와 아빠는 늙어갑니다. 평생 엄마한테만 기대 살았던 아빠는 지난해부터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인력시장에 나가 일해서 번 돈을 날마다 조여사에게 바친답니다. 아빠는 당신 삶을 떠받든 것이 조여사의 인내였다는 것을, 나이 예순을 두 해 앞두고 깨달았지요.

▲ 올해 추석 때, 조여사와 동생, 그리고 우리 아이
ⓒ2006 배지영
엘리자베스 키스!

저는 자주 아이와 둘이서 여행을 해요. 몇 번은 그 길에 조여사도 함께 있었지요. 아이를 기저귀 찰 때부터 데리고 다녔고,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 업어줬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도, 가끔 저보고 업어달라고 해요. 아이를 업고 묵묵히 걸을 때에 들리는 조여사 목소리는 참 든든합니다.

"아이~ 제규야, 할머니한테 업혀야. 손바닥만한 느그 엄마 등에 업히고 싶냐 이놈아. 지영아, 때싸 큰 놈을 멀라 업어 줘. 너 힘들어서 못 써야. 제규야, 존 말로 할 때 할머니 등에 업혀라, 잉!"

조여사가 언제까지나 제 등에 업힌 아이를 당당하게 나무랄 수 있고, 지금처럼 힘도 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처럼 따뜻한 눈을 가진 사람이, 모델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을 줄 알았던 이가, 내 엄마의 그림 한 점을 남겨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어요. 맑은 냇물만 보면 빨래를 하고 싶어 하시는 조여사를 위해, '힘차게 빨래하는 조여사' 쯤으로 설정하면 작품의 격이 떨어질까요?

저는 조여사가 한 밤 자고 가라고 한 것을 마다하고 와서 당신의 그림을 보러갔습니다. 당신이 그 때 조선을 보면서 염려했던 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유의 성정을 많이 잃었습니다. 하지만 조여사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우직하고, 예의가 바르고, 부끄러움을 알고, 유머도 있지요.

엘리자베스, 조여사가 관심 없어 해도 당신이 그린 그림 얘기를 해 주겠습니다. 당신도 만약, 내 엄마 조여사를 알아볼 수 있다면, 꼭, 당신 작품의 모델이 되게 해 주세요.

▲ 엘리자베스 키스 <과부>
ⓒ2006 이충렬


덧붙이는 글
아빠 친구들이 엄마에게 존경을 담아서 부를 때 '조여사'라고 부릅니다. 호칭의 진정성을 알고부터 우리 자매들도 가끔 엄마를 조여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뉴스게릴라들의 뉴스연대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임화의 시를 읽는다. 그리고, 시집 뒤에 붙어 있는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을 본다. 시를 읽는다.

임화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김훈 때문이었지 싶다. 카프 동인으로 활약을 하고 월북을 했던 이 시인을 제도권 교과서나 시집 등에선 상대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나에게는 '모르는 시인'일 뿐이었다. 그러다 김훈의 '임화를 추억하며..'였던가? 라는 짧은 단상을 접한 후 그의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는데 며칠 전 헌책방 순례를 하다가 임화의 '다시 네거리에서'를 마주하게 되었다.

인연일까? 모르던 사람의 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이것을 매혹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강가로 가자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 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를 만나 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 해가 골창이 난 지 십여일,/함석 홈통이 병사 앞 좁은 마당에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답답워라, 고성 같은 자씨, 기념관만이 비워져서 묵묵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던 그 때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富)보다 사랑한다./[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람(濫)을!//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뒤에 숨었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 일지를 못할 것인가?/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지 않으면/정말 강물은 책속에 진리와 같이 영원히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 버릴지 누가 알 것일가?/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청년의 순수가 사라져 버리고 세상살이 처세술에 능한 (또는 그렇게 길들여져 버린) 어른들 속에서 제자리 찾기에 허둥거리는 때에 역사를 밀어올리고 범람시키는 힘, 청년이란 말에 어울리는 임화가 너무 그리운 밤! 임화의 시들이 더욱 비수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6-10-1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르는 강물을 돈보다 더 사랑했다니 그 점은 저와 많이 다르군요^^
어쨌거나 청년!이 좋아요 전^^

클레어 2006-10-1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청년이 좋아요..
 







향 한아름을 사서 (홍콩달러 6달러) 공양을 하다. 도교 사원에는 향내음과 기도소리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만모우 사원. 1847년 창건한 홍콩 최고(最古)의 도교 사원으로 학문의 신 문창제와 무예의 신 관우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만모우 사원은 창건될 당시 법원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당시 법률 젣에 따르면 피고와 원고가 먼저 사원에서 서약을 사고, 서약의 내용을 노란 종이에 적여야 했다. 그리고 닭을 제물로 바쳐 그 피를 종이에 흘린 뒤 불에 태우면서 신에게 정직을 고할 것을 맹세했다. 만약 그 맹세를 져버리면 큰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홍콩 100배 즐기기 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딸기 2006-10-17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들이 전반적으로 어두워여...

클레어 2006-10-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밝게 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포샵질에 잼병인지라...^^;;
 



이것은 단순한 이층 버스가 아니라 옛날 전차처럼 철로 위를 달리는 트램이다.  타보고는 싶었지만 에어컨 시설도 없는데다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알아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 사진만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난 후, 우리는 터벅터벅 걸어서 허리우드 거리에 도착했다.



"절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하겠다" 동생의 한마디에 깨갱하고 여행내내 녀석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다행히 허리우드 거리(스타들의 손도장이 있는 해안도로변)를 거닐다 생각에 잠겨 있는 녀석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은  열려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완차이의 호텔에서 나와 처음 맞닥드린 이정표.. 어디로 가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