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대에서 보고 퍼왔습니다. 원 출처는 모르겠더군요.
하여튼 대단합니다. 약간씩만 브랜드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유쾌하게 보실듯...^^;
 

 


라이카 -
약간 답답한 면이 있는 인자한 할아버지.
보수성향을 띠고 계시다. 동네의 정신적 지주 같으신 분.

미놀타 -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하는 대학생
그래도 맡은 일 하나는 기똥차게 한다.
코니카양과 한살림 차렸는데도 여전히 대학생. 

케녹스 -
부모의 잘못된 교육으로 삐딱선 타는 대학생
아버지가 펜탁스양의 대부임. 롤라이씨가 배다른 형이라는 소문도 있음.

롤라이 -
혼자사는 청년
클래식을 좋아하고 덩치는 크다.
무슨일인지 삼성씨랑 싸우고 집을 나가서 소식이 없다.
젠자, 핫셀, 마미야형이랑 한때 동네 주름 잡았음.

소니 -
까보면(?) 별거 없는데 괜히 멋있어 보이는 누나
근데 미모는 출중하다. 보라색 마스카라 자주 사용함.

시그마 -
동네에서 온갖 무시당하면서도 묵묵히 할 일하는 형.
근데 동네사람들은 급할때는 그를 찾는다. 동네사람들 못됐다.
집이 3층짜리 빌라다.

야시카 -
동네 뒷산에 산다는 전설의 중년.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한때 꽤 잘나갔음.

올림푸스 -
옆동네 살다가 최근 이사와서 재력을 뽐내는 아저씨
터프하게 생겼다. 비도 우산없이 그냥 맞고 다닌다.

카시오 -
동네 여고생
그럭저럭 공부도 하고 놀기도 좀 논다.
평범하다.

콘탁스 -
미혼, 섹시 중년.
야시카 할아버지와 젊은 시절 친구였다 함
가끔 ND수트 빼입고 나서면 짝있는 아낙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음.

짜이스 -
콘탁스씨와 친구
역시 나이스 미들.
안그래 보이는데 의외로 발이 넓다.
한동안 안보이다가 최근 포토키나 반창회에서 목격됐음.

펜탁스 -
동네 여대생
차분한 성격이나 때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임
오래된 물건 절대 안버림. 손재주 좋은편. 
콘탁스씨를 마음에 두고있다함.

코닥 -
마을 이장 할아버지
시야도 넓고 아는것도 많다.
부업으로 그림도 그린다.

후지필름 -
코닥 할아버지 손녀
일러스트레이터
할아버지하고 비슷한 직업을 가짐 나름대로 잘나감
성격 아주 밝다.

파나소닉 -
평범한 동네 청년
라이카 할아버지와 친한 사이

캐논 -
마을 유지
땅도 많고 돈도 많다. 장사를 하시는데 머리는 좋아 보인다.
스포츠나 여행을 무지 좋아한다.
말도 빠르게 한다.

니콘 -
동네 입구 해병전우회 회장님
진짜 터프가이. 머리로 못도 박는다.
예전에 CIA나 FBI같은 기관하고도 자주 일했다고 한다.
공무원하고 친하다.

삼성 -
예전에 동네 살다가 이사 갔었으나 다시 돌아옴.
당시에 롤라이형을 데리고 살다가 돈 못벌어 온다고 내쳤다고 함.
사실 동네에서 좋은 소리는 못듣고있음.
펜탁스 양의 대부, 케녹스의 친부.
동네에서 소니양과 싸우고 옆동네에서 소니양과 모텔에서 나오는거 목격됨.
인간관계 복잡함.
 
==================================================================
크하하~
머리로 못도 박는 니콘과 보라색 마스카라 소니, 까탈스러운 삼성...개인적으로
이녀석들때문에 뒤집어졌어요. 데굴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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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3-1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클레어 2005-03-1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 건데요..^^ 가져가셔요.

파란여우 2005-03-1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내 미쳐...^^
 
 전출처 : 딸기 > 세계의 어린이들

세계의 어린이들은 지금.

▲ 멕시코시티, 마닐라, 라고스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유리, 캔, 종이를 찾아 모으고 음식 찌꺼기를 놓고 까마귀와 싸움을 벌인다
▲ 진주를 찾아 자바의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 콩고의 광산에서는 다이아몬드를 찾아 나선다.
▲ 페루의 광산 갱도에서 어린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두더지가 된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폐가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묘지에 묻힌다.
▲ 콜림비아와 탄자니아에서는 커피를 수확하다 살충제에 중독된다.
▲ 과테말라의 목화밭과 온두라스의 바나나 농장에서도 살충제에 중독된다.
▲ 말레이시아에서는 새벽부터 별이 뜨는 밤까지 고무나무 수액을 채취한다.
▲ 미얀마에서는 철로를 놓는다.
▲ 인도 북부에서는 유리 만드는 가마에서, 남부에서는 벽돌 굽는 가마에서 열에 녹을 지경이다.
▲ 방글라데시에서는 하루 종일 끝없이 일해도 임금을 한푼도 못 받거나 거의 못 받으며 300가지가 넘는 일에 종사한다.
▲ 아랍 왕족을 위해서는 낙타 경주를 하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라플라타 강 유역의 농장에서는 말을 타고 소와 양을 모는 목동이 된다.
▲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 스리랑카의 콜롬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브라질의 레시페에서는 주인의 식탁을 차리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으며 산다
▲ 콜림비아의 보고타 시장에서는 과일을 팔고, 상파울루의 버스 안에서는 껌을 판다.
▲ 페루의 리마, 에콰도르의 키토,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길모퉁이에서는 자동차 앞 유리창을 청소한다.
▲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와 멕시코의 과나후아토의 거리에서는 신발을 닦는다.
▲ 태국에서는 옷 바느질을 하고, 베트남에서는 축구화에 바늘땀을 넣는다.
▲ 파키스탄에서는 축구공을 꿰매고, 온두라스와 아이티에서는 야구공을 꿰맨다.
▲ 스리랑카의 농장에서는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차나 담배를 따고, 이집트에서는 프랑스 향수 제조소로 보낼 재스민을 딴다.
이란, 네팔, 인도의 어린이들은 동이 트기 전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카펫을 짠다. 부모가 돈을 받고 빌려준 아이들이다. 누군가 구출하러 가면 아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우리의 새 주인이신가요?"
▲ 부모가 100달러에 팔아넘긴 수단의 어린이들은 섹스 산업에서 일하거나 안 하는 일 없이 다 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중에서.

몇해전 외신에서 읽은 이야기. 아프리카에 베냉이라는 나라가 있다. 빈국 중에서도 최빈국이다. 노예제도는 링컨과 함께 끝났다고?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베냉의 어린이들(가난한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 200여명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노예선'이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국제해양경찰이 정보를 입수해 배를 기습했다. 아이들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만이 알고 있다.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였나, 제목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그 책에, 동남아의 낚시꾼들 얘기가 나온다.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는, 아이를 줄에 묶어 배에서 늘어뜨려 바다에 집어넣는단다. 아이들이 미끼가 되고 갈고리가 되어 해산물을 채취한다. 아이들 몸이 물 위로 떠오를까봐 돌멩이를 같이 묶어서 집어넣는단다.

재작년 영국에선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흑인소녀의 시신이 토막난채 템즈강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경찰은 종교집단이 어린 소녀(베냉 같은 곳에서 노예로 팔려왔을 것이 뻔한)를 종교의식의 제물로 삼은 뒤 시체를 버린 것으로 추정했다.

진주에도 양식진주가 있고, 천연진주가 있다. 잘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후자가 더 비쌀 것이다. 진주 목걸이 한 알 한 알이 아이들의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주 좋아하지 말자. 다이아몬드도 좋아하지 말자. 그넘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아프리카에선 '소년병'들이 살육전의 도구가 되고 목적이 되어 죽어간다. 
나이키 축구화도 좋아하지 말자. 세계적으로 '아동노동 착취' 악명 높은 기업이 나이키다. 미국에선 나이키의 아동착취 문제로 소송까지 붙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제3세계 진출해서 세계경영 하고 있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자. 어느 나라에서 어린아이들 부려먹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정력 딸리기로 소문난 울나라 남자들, 동남아 '영계 매춘' 아직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에이즈나 팍팍 걸려버렸음 좋겠다.

나 역시 무죄가 아니다. 우리 딸 한 달 유치원비 35만원. 비싸다. 종일반이라서 더 비싸다. 아직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구몬 수학에 영어 피아노 발레 가르치면 한달에 수억 들어갈 것이다. 내 아이만 잘 키우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거꾸로 된 세상', 남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다. 남의 나라 얘기 할 것 없이 돌아보면 내 주위에도 못 입고 못 먹는 아이들이 허다할 것이다. 내 아이 잘 키워서 거꾸로 된 세상에 떨어뜨려놓으면 뭐하나, 세상부터 바로 되어야지.
못나고 못된 엄마는 오늘도 생각한다. 아이야, 나는 저 책을 읽으면서 너를 생각했단다. 지금쯤 빨간 가방 메고 유치원에 갔을 너를, 그리고 너.만. 생각해왔던 나를. 엄마가 너와 함께 '네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한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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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처전문가'

나도 '상처전문가' 하나를 알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늙지 않았지만 그도 상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멋진 '상처전문가'는 다쳐도 언제나 고쳐줄 거 같은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상처전문가'를 알아보는 방법은 책에 나와있지 않다. 그리고, 그럴싸한 명함이나 직함에도 나와있지 않다. 그저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듯, 그냥 알게 된다.

2. 왜 나이 많은 이들은 모든 행동들이 느려질까?

기력이 없어서? 후훗~ 맞는 말이긴 하다. 인간의 기력이란 것이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단련시켰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은 30을 넘게 되면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그렇지만, 느려진만큼 많은 것을 볼 줄 알게 된다.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 경험으로 필요없는 동선과 활동을 줄이게 되고 더욱 정교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게되니 빨리빨리의 강박이 필요없지.. '경기에선 질 때도 있다.' 라던지 '싸울때는 스스로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라던지 하는 필요한 말을 가장 필요할 때 던질 수 있는 것도 그런 강박이 사라진 나이가 되었을 때만이 할 수 있다.

3. 사랑?

역시 어렵다. 살아가는 것만큼 다양한 사랑의 모습.. 오만하게 예전에 사랑은 '안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사랑의 한 성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말했던 것은 내가 바라는 사랑의 모습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는 것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이기적인 인간이 이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인가?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 속에 계속 이물질이 끼어있듯 존재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사랑의 시효를 결정하는 것이겠지만..

사족: 1)원래 인공호흡기를 달게 되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성대 사이로 인공호흡기의 호스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으~ 하는 신음소리만 낼 수 있을 뿐.. (요놈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속에서 걸리적 거리더군..-_-)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라도 감동만 줄 수 있다면야...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2)내일부터는 진.짜. 달리기를 할꺼다. ( 권투에서도 기본기, 기초가 필요하듯 차근차근 체력을 올려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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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사회의 종언을 위하여

   세르게 라투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작년에 지도적인 기상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환경문제를 진보적으로 푸는 데는 경제성장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청정기술에 투자하기 위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은 해결책이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익의 입장만이 아니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좌익도 공유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도 성장을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보다 공평한 부의 분배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파브리스 니콜리노는 환경전문 기자인데, 그는 최근에 자신이 근무하던 파리의 주간지《폴리티스》(반세계화 운동 편에 서있는 언론)에서 지금 프랑스 정치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어있는 연금개혁에 관해 내부논쟁 끝에 사임을 하였다. 그 논쟁의 경과를 보면 좌익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드러난다. 한 독자가 말했듯이, 그 분쟁은 니콜리노가 “거의 모든 프랑스 정치계급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통교리, 즉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보다 많은 성장, 보다 높은 생산성, 보다 큰 구매력과 소비라고 하는 생각을 감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수십년에 걸친 광란적인 낭비 끝에 지금 세계는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기후가 갈수록 불안정해짐에 따라, 우리는 석유 때문에 전쟁을 하고 있다. 물 전쟁이 뒤따를 것임에 틀림없고, 그와 동시에 예견되는 생물유전자상의 재앙을 통해서 필수적인 식물과 동물 종들이 소멸하고, 전염병들이 만연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확장하는 성장사회는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축소된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급적 조용하게, 그리고 공생공락(共生共樂)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제규모를 줄일 것인가를 긴급히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성장사회는 성장경제에 의해 지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장경제에 강박적으로 붙들려 있다. 그것은 ‘성장을 위한 성장’을, 삶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삶의 본질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생물권의 한계를 넘어서 가고자 하기 때문에 지속불가능하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환경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각 개인의 소비량이 지구표면을 얼마만큼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계산해볼 때, 자연자원에 대한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와 그 자원의 재생 능력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생활방식이라는 게 드러난다. 미국 사람은 평균적으로 일인당 9.6헥타르, 캐나다 사람은 7.2헥타르, 그리고 유럽 사람은 4.5헥타르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지금 평등한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평등이 유지되면서, 지속가능한 세계가 되자면 그때의 소비수준은 일인당 1.4헥타르 미만이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인구증가를 고려하지 않을 때 그러할 것이다. 

  성장과 환경이라는 모순적인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자기들이 하나의 마술적 공식―‘생태효율성’―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한다. 생태효율성은 지금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논리의 중심개념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자연자원 소비의 강도를 줄여나가서 그 결과 지구의 최대수용능력과 양립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한다는 생각이다.

  생태효율성이라는 면에서 그동안 여러 진보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 극단적인 성장에 수반되어왔고, 그 때문에 환경에 대한 충격은 실제로 더 악화되어왔다. 효율성에 있어서 개선된 개개 품목이 환경에 대해 미치는 충격의 감소분은 더 많은 상품이 시장에 나옴으로써 상쇄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리바운드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가 상대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거나 어떻든 덜 물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낡은 경제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고 있다. 모든 지표는 우리의 자원소비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장차 과학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고, 자연은 끊임없이 인공적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려면 정통 자유시장 논리에 대한 완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경제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사회의 계획된 종언은 반드시 음울한 것일 필요가 없다. 이반 일리치는 언젠가, 우리가 현재와 같은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것의 부정적인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마치 맛있는 요리의 즐거움이냐 그 위험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요리 자체가 내재적으로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그것 없이 지낼 때 우리는 좀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과는 다르게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장사회에서는 불평등과 불의가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이다. 성장사회가 낳는 안락한 삶은 흔히 환상에 불과하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사회는 즐겁지도, 쾌적하지도 않다. 그것은 스스로의 부에 병들어 있는 반사회이다. ‘북(北)’ 쪽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소비재와 서비스에 보다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러한 물건과 서비스에 포함된 비용을 잊고 있다. 오염된 공기와 물 그리고 환경의 열악화로 인해서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대적 삶을 위한 비용(의료, 교통)은 증가되는데, 거기에는 점점 희소해져가는 자원(물, 에너지, 열려진 공간)의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허만 데일리는 진정한 진보를 알려주는 척도를 고안한 바 있다. 그 척도는 한 나라의 국민총생산을 오염과 환경 열악화로 인한 손실에 따라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척도에 의해 계산할 때 미국에서는 GDP가 계속해서 증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진보는커녕 정체와 쇠퇴가 기록되어왔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잘 나가는 경제, 선진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출구도 없이 벼랑을 향하여 빠르게 돌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축소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탈개발 사회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고,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대안적 세계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것을 미덕으로 만들면서, 경제의 축소가 ‘북’쪽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을 줄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축소’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저 분별없는 성장을 위한 성장이라는 교의(敎義)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축소는 마이너스 성장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것은 모순적인 말이다. 그것은 뒤로 진보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어로 비성장(decroissance)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영어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영어에서 위축(shrinkage), 감소(decrease), 축소(reduction)와 같은 말은 프랑스어 비성장(decroissance)과는 달리 부정적인 내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유시장 경제학이 지금 세계를 얼마나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성장률의 둔화에 의해서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큰 혼란으로 빠져드는지를 보아왔다. 그것은 실업을 초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적 조건의 유지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적 프로그램들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성장률이 실제로 마이너스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에 기반한 사회에서 일이 없는 것처럼, 성장사회에서 성장이 없는 것보다 더 가혹한 사태가 없을 것이다. 주류 좌익 그룹은 자신의 가장 뿌리깊은 믿음에 대한 근원적인 재검토 없이는 이러한 사고에 계속 갇혀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모축소는 비성장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데, 비성장 사회라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정의해보도록 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아무런 만족감도 주지 않는 활동들이 주는 환경적 충격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데서부터 정책이 출발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영역이 규모축소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사람과 상품이 지구 전역을 가로질러 저토록 많이 움직일 필요가 있는지 재검토하고, 우리의 경제를 다시금 지역 중심적인 것이 되게 함으로써 장거리 운송이 초래하는 오염과 기타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침범하고 부식시키는 저토록 많은 광고가 과연 필요한지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또 일회용 물품들이 대량생산 기계를 살찌우는 용도 외에 정말로 일회용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경제규모의 축소는 반드시 좋은 삶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1848년에 칼 맑스가 사회혁명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가 될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다고 믿었다. 면직물과 생산품들의 놀라운 과잉생산은 적어도 서구세계의 모든 인구가 먹고, 입고, 주거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의 물질적 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플라스틱도, 컴퓨터도, 생명공학도, 살충제도, 화학비료도, 핵에너지도 없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유례없는 사회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의 인간욕구는 소박하였고, 인간행복은, 혹은 적어도 행복의 물질적 기초는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규모가 축소된 사회를 상상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제’를 넘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경제가 이론에서든 실제에서든 우리의 삶 전체, 특히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든 일자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작업시간을 대폭 축소하는 일일 것이다. 1981년에 벌써, ‘축소’를 제안한 최초의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자크 엘루는 어느 누구도 하루 두 시간 이상 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출발점은 1992년 리우에서 열린 유엔지구정상회의에서 마련된 소비와 생활방식에 대한 협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협약은 6개항의 ‘R’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재평가(reevaluation), 재조정(restructuring), 재분배(redistribution), 축소(reduction), 재사용(reuse), 그리고 재활용(recycling). 이러한 목표는 협력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선순환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리스트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재교육(reeduation), 방향재조정(reconversion), 재정의(redefinition), 리모델링(remodelling), 재고(rethinking), 그리고 재지역화(relocating).

  문제는 이기심을 포함하여 현재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 노동윤리와 경쟁심리 등이 성장 시스템으로부터 나왔고, 또 그것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더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윤리적 선택은 이 추세에 영향을 미치고, 이 시스템의 심리적 기초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변화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결집된 힘에 의한 근원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안이 하나의 허황한 유토피아적인 아이디어로 무시될 것인가? 폭력적인 혁명 없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심리적 혁명이 난폭한 사회적 소요 없이 성취될 수 있는가?

  환경 훼손을 극적으로 줄인다는 것은 물질적 재화상의 금전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비물질적 제품을 통해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 제품은 부분적으로 시장적 요소를 유지할 수 있다. 시장과 이윤이 여전히 인센티브로 작용하겠지만, 이미 시스템은 더이상 시장과 이윤의 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위한 진보적인 조치들과 단계들을 우리는 지금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로 인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순순하게 따라올 것인지, 혹은 심지어 현재의 시스템의 희생자들―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스템에 의해 중독된―이 시스템의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지 어떨지 말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금년 여름 유럽을 휩쓴 열파(熱波)는 어떤 논리보다도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는 데 더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3년 12월호)



축소경제는 제3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오늘날 미디어는 너무나 깊이 광고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면―물질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무조건 팔아먹을 만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것 팔아먹기 전략에서 열쇠말은 ‘개념’이다.

  그래서, 비성장(decroissance)에 대한 토론이 확산됨에 따라 미디어는 당연히 그 개념이 무엇인가, 라고 묻기 시작하였다. 미디어를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비성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경제학의 성장이론에 대응할 만한 축소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성장은 단지 성장이론에 대한 래디칼한 비판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용어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탈개발/발전 정치를 위한 대안적인 프로젝트를 제안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정통경제학의 틀에서 모두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비성장은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의 열쇠말이다. 사회는 그동안 진보주의적 성장경제학에 의해 지배된 사고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러한 경제학의 전제(專制)적 지배는 이 틀 바깥에서의 창조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왔다. ‘축소’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라는 아이디어는 대안적 삶에 관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 아이디어를 제창하는 사람들을 현존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경제가 축소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고 그들이 저개발 사회들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무지나 자기기만의 소산이다.

  축소경제의 제창자들은 ‘북’이나 ‘남’이나 어느 곳에서든 통합적이고, 자기충족적이며,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비성장(degrowth)이라는 말보다도 무성장(non-growth)이라는 말을 쓰면 더욱 정확하고, 아마도 더 충격적으로 될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무신론(a-theism)’에서처럼 ‘무성장주의(a-growthism)’에 관해 말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경제적 정통교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체계, 즉 종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개발/발전(development)이라는 문제를 치열하게 능동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다. ‘개발/발전’이라는 용어는 너무나 많이 재정의되어왔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마술적인 개념에 대해 여전히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다. 성장을 궁극적인 선(善)으로 여기고 있는 ‘경제주의’라는 교의는 참으로 목숨이 질긴 것 같다. 심지어 반세계화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도 역설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그들은 성장의 해악을 잘 인식하면서도 계속해서 성장을 통해서 ‘남’쪽 국가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북’쪽에 관해서는 그들은 잘해보아야 기껏 성장의 ‘둔화’를 제창할 수 있을 뿐이다. 점점더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은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성장이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속불가능하고 또 유해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성장을 별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개발의 기회가 박탈되어온 ‘남’쪽 세계에서는, 비록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 동안에는 성장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성장도 축소도 적합하지 않는 딜레마적 상황이다. 그리하여 논쟁 끝에 성장의 둔화라는 타협안이 제시되지만, 이 타협은 비성장의 의미에 대한 논쟁 쌍방의 오해를 근거로 한다. 우리의 경제를 좀더 느리게 성장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끊임없는 성장에서 해방된 사회(즉,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고, 충분히 통합되고 자기충족적인)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결코 주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그것은 급속하고 불평등적이며, 환경적으로 재앙을 일으키는 팽창경제가 주는 한가지 부인하기 어려운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비성장 사회의 창조가 ‘북’과 ‘남’ 어느 곳에서든 왜 반드시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아이디어의 역사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자기충족적이고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에 대한 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개발/발전에 대한 오랜 비판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40년도 넘게 한 국제적 논평가 그룹은 ‘남’쪽 국가들에 있어서의 경제개발을 분석해왔고, 그것이 끼친 해악을 규탄해왔다. 이들 논평가들은 단지 최근의 자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발/발전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참여주의적이며, 자립적이고, 민중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부메디엔느의 알제리아와 니에레르의 탄자니아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개발은 종종 인도주의적 비정부기관들에 의해 수행되거나 그 기관들의 지원을 받아왔다는 점도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몇몇 산발적인 성공담을 제외하고는 개발/발전은 압도적인 실패담이었다.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시작된 개발은 오직 부패와 혼란과 구조조정 계획을 낳았을 뿐이고, 그 결과 전통적인 가난은 비참으로 대체되었다.

  ‘남’쪽 사회들이 성장경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려면 비성장은 ‘북’쪽에 대해서만큼 ‘남’쪽에 대해서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남’쪽 사회는 개발이 아니라 이탈, 즉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이상화된 형태의 비공식 경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쪽이 어떤 형태건 경제적 축소를 채택하지 않는 한 ‘남’쪽에 있어서의 변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북’쪽 사회의 애완용 동물 먹이를 수출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우리가 먹는 고기가 파괴된 아마존 우림에서 기른 콩을 사료로 사육된 동물의 것에서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과잉 소비는 ‘남’쪽 세계에 있어서의 진정한 자기충족성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이 비성장 사회를 창조해내고자 시도하려면 그 사회는 재고하고, 재지역화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쪽 국가들은 ‘북’쪽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뚜렷한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역사―식민주의, 개발, 세계화에 의해 중단된―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회들의 문화적 역사는 그 사회에 내재적으로 반(反)경제주의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가치들이 그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져왔던 물건들, 전통적인 공예와 기술들과 함께 부활되어야 한다. ‘남’쪽 사회에서 성장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성장을 강조하는 것은 오직 더한층의 서구화를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개발에 대한 제안들은 흔히 진정한 선의로부터 나온다. 즉, 학교와 병원을 세워주고, 물 공급체계를 만들어 주고, 식량 자급을 실현하도록 돕겠다는 선의 말이다. 그러나 그 제안들은 모두 개발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와 결부된 인종 중심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남’쪽 정부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혹은 미디어에 현혹된 대중들의 여론을 조사해보라. 그들은 서구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자들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교나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어컨과 휴대전화와 냉장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동차(폭스바겐과 GM은 지금 중국에서 연간 300만대를 생산할 계획을 하고 있고, 퓨조 역시 거기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를 원한다. 이들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또한 원자력발전소, 전투기, 그리고 탱크를 그 리스트에 추가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알랭 그라스가 인용하고 있는 과테말라 지도자의 다음과 같은 분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제발 혼자 내버려두고, 개발 운운하는 이야기는 당장 중지하라!” 인도의 반다나 시바로부터 세네갈의 에마뉴엘 엔디온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중운동 지도자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개발 주창자들은 식량의 자기충족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에 대해 건방진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회복―자체가 자기충족성은 한때 실현되고 있었으나 그동안 잃어버려진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개발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치기 시작하던 1960년대까지 자기충족적이었다. 제국주의와 성장경제, 그리고 세계화가 그 자기충족성을 파괴하고, 아프리카 사회를 보다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과거에 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물은 산업폐기물이 물을 오염시키기 전까지 마실 만한 물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정말로 좋은 교육과 건강을 성취하고 유지하는 올바른 방법일까? 위대한 논쟁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이반 일리치(1926-2002)는 학교와 병원의 효력에 대해―심지어 ‘북’에 있어서도―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란의 경제학자 마지드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우리가 원조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빈곤을 생산하는 구조를 강화할 뿐이다. 실질적인 자산을 잃어버리고, 세계화된 생산 시스템 바깥에서 자기들에게 더 적합한 대안적인 삶의 길을 찾는 희생자들에게 그 원조금이 도달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옛날의 방식으로 단순히 되돌아갈 수 있는 전망은 없다. 마찬가지로 축소나 비성장에 관한 하나의 보편적인 모델이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발이 오직 빈곤과 배제를 의미할 뿐인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전통과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근대가 약하게 뒤섞인 어떤 것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그들이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성취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일단 인간의 창조성과 재간이 경제주의와 개발 광기의 속박에서 풀려나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직면한 과제에 훌륭히 맞설 수 있으리라고 우리가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각 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전을 갖고 있다.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이븐 칼둔(1332-1406)이 사용한 ‘베움란’(번창 혹은 꽃핌), 간디의 ‘스와데시-사르보다야’(자급 혹은 행복), 서부 아프리카 투쿨레르의 언어로 ‘밤타레’(나눔에 의한 행복), 혹은 이티오피아 보라나 사람들의 어휘로 ‘피드나/가비나’(배불리 먹고 근심걱정 없는 사람의 빛나는 모습) 등이 될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개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파괴를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는 새롭고 독창적인 대안들은 성공적인 탈개발 사회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북’이든 ‘남’이든 집단적이고 포괄적인 해독(解毒) 프로그램 없이는 그들의 성장에 대한 중독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교의는 질병이나 마약과 같다.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은 처녀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두개의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에이즈처럼 작동했고, 다른 하나는 마약 상인처럼 행동했다. 성장경제학은 에이즈처럼 사회적 질환에 대한 사회의 면역체계를 파괴한다. 또한, 성장은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의 끊임없는 공급을 필요로 한 나머지, 그것은 마약 상인처럼 고의적으로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욕구와 의존심리를 만들어낸다. 공급 체인에 있어서 이 상인들이 주로 초국적기업들이며, 이들이 우리의 중독상태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의 극복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갈수록 증가하는 소비는 지속가능한 게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4년 11월호)

 


  세르게 라투세(Serge Latouche) ― 프랑스 경제학자. 남(南) 파리 대학 명예교수. 최근 저서에《무한정의:세계화된 경제 속에서의 윤리의 도전》(파리, 2003년),《개발을 넘어서:경제의 탈식민화에서 대안사회의 건설로》(파리, 2004년)가 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프랑스 시사교양지《르몽드 디플로마티크》최근호들에 연속적으로 실렸던 두편의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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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3-1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색평론 봄 호가 나왔다. 경제를 생각할 때, 항상 성장과 분배라는 화두를 떠올렸었는데 이 글 속에 나오는 '비성장'이란 용어를 보고 놀랐으며, '축소'라는 개념도 생소해서 다시금 이 글을 보게 되었다. '파이(생산성)'를 키워야 한다는 면이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큰 과제가 아니었던가? 논란거리가 많은 글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이'를 먹기 위해 우리가 소모해야 환경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파이'가 제 3 세계와 같은 후진 자본주의 국가에까지 미칠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할 수 있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1989년 1월
평점 :
절판


2004년 12월 31일. 나는 아주 재미있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시인에 존경 표하려, 집단 누드 퍼포먼스 팝뉴스 [세계]  2004.12.31 (금) 오후 1:32

'하하~ 시인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집단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했다구?? 그 시인, 정말 행복하겠군.' 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뒤에도 자신을 위해 존경한다며 과감히 옷을 벗어주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흐믓한 미소와 함께 아쉬운 입맛을 다셔야 했을 그 시인... 그는 바로 칠레가 낳은 걸출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그건 건드리더군. //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풀리고 /열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는 참 재미있는 시인이다. 시인이면서 외교관이기도 했고 정치가이기도 했던 그의 화려한 경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시 자체가 주는 엄청난 이미지들의 물결과 거대한 에너지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증이 절로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 그게 나에겐 어떤 의미였던가? 다시 반추해본다. 학생 때는 시 자체를 읽고 소화시키기 보다는 그 속에 시인들이 숨겨놓은 의미를 찾아내어야 하는 고역스러운 것이었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번갈아가며 밑줄에 연필칠까지 하면서 찾아 써놓은 의미가 시험출제자의 의견과 맞는가? 가 중요할 뿐이었다. 거기다 어떤 선생님은 기나긴 시를 외우라고 하기까지 했는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시를 외우다가 틀려서 창피당하는 것이 두려워 외워야했던 시....그건 나에게 시가 아니라 고문의 도구였었다. (고문의 종류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도 고문이라 나는 생각한다.-_-)

그러던 시가  다시 내 가슴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은 첫사랑에 실패한 후였고, '실연 후에는 모든 유행가의 이별노래가 자신의 이야기같더라..'라는 이야기처럼 이별시, 쓸쓸한 시, 고독을 읊은 시, 사랑의 고통을 이야기 하는 시들은 모두 나의 이야기로 가슴에 박혔다.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 시는 나의 고통을 글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 인간의 고통을 풀어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마음속에 맺힌 말들을 언어로 표현해 내놓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소위 이와 같은 감정표현방법을 의학용어로 'ventilation(환기 또는 풀이)'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화병' 을 살펴보면 무식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시어머니등 윗사람들이 무서워서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억누름으로써  ventilation(환기 또는 풀이)이  되지 못해 생긴 병이다.)

그렇게 시가 다가왔다. 나의 숨겨진 마음 속의 말들이 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났던 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의 서재를 방문한 분들은 뜬금없는 '지안의 개인사의 나열'에 질려서 '우~ 이젠 그만해라!'라고 돌 던질 준비를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참아주시라. 이제부터 이야기 하려고 하니깐..-_-;;;

 

파블로 네루다는  '속이 비치는 깜짝상자'를 생각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가 시를 창작하는 모습, 과정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그의 시 "詩"를 보면 그가 바라보는 '세상(또는 대상)'은 그의 속으로 들어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꿈틀거리는 에너지로 변화한다. 시인조차도 그게 뭔지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나, 그가 언어로서 그 알 수 없는 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언어로 쓰여져 있을 망정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 미각적인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와 -마치 깜짝상자에서 거대한 삐에로 인형의 머리가 튀어나오는 것 같이- 느낌이 생생한 새로운 우주와 세상이 태어나는 것 같으며 자신또한 그 속에 동화되어 '심장'마져도 풀려버리는 것 같다고 파블로 네루다는 고백하고 있다. 그의 시집인 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있는 시들은 모두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도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 이 시집의 분류를 쫓아 가다보면 시인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시집의 큰 장점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젋은 시절 그가 썼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는 '이별, 사랑 ,여인'등이 주로 등장하고, 버마,타일랜드, 일본, 중국 등의 극동주재영사 및 남미(멕시코, 스페인, 아르헨티나)영사를 거치며 썼던 '지상에서 살기 I,II'라는 작품에서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떠도는 외로움,고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후 그가 스페인 영사로 있는 동안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났을 때 영사의 월권으로 '칠레는 인민전선 편'임을 선언하고 난 후 썼던 '지상에서 살기III'에서는 드디어 네루다의 정치의식이 반영된 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익 곤잘레스 비델라라는 독재자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을 때의 작품 '온갖 노래'에서는 남미의 자연과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던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말년에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라는 산티아고 근처의 작은 섬에서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를 썼는데 그 속에는 일상 속 작은 것들 속에 숨겨진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다.

 

1973년 칠레에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칠레 대통령 아옌테가 암살당한다.그리고, 그도 그를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해 9월 23일 산티아고의 작은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다 또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던 네루다.

이 시집 한권으로 그의 모든 시와 그가 만들어낸 세상의 이미지들과 우주의 모습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지만(그의 시가 35편 밖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그 때문에 별 하나를 깎을 수 밖에 없었다-_-) 파블로 네루다와 로버트 블라이의 대담과 이 시를 번역하신 정현종 시인의 해설을 통해 네루다의 삶과 그의 시의 뿌리에 해당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아는데는 충분한 시집이란 생각을 한다.

 

네루다.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누드 퍼포먼스로 표현했던 남미의 여인네들의 정열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주었을 때, 다른 이들은 더 멋진 것을 나에게 건네주었다.'라는 그의 믿음처럼 세상에다 멋진 시를 남긴 그를 기리기 위한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존경'이란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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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2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레어 2005-03-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옙~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시 때문에 지나치게 길어진 리뷰땜시 저도 고민을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