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마음이라 여겼다. 2006년의 3월, 평택의 평화로운 들판이 계속되기를 염원하던 마음이 2달이 채 못되서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냉정하고 못된 것은 정 때기도 잘하는구나..'라고 여겼었다. 소중한 것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심정은 낯선 이방인의 시선보다 더욱 부질없는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곪아간다. 무지함은 맹목적인 추종을 낳고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정신의 분열을 낳는다.
내 자리를 다시 돌아본다. 내 자리는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다. 도시 한 가운데에서 얼빠진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나약한 모습을 들추어 내는 자학의 시간들...
도시 속에서 오늘 간수치가 높은 아저씨랑 만나게 되었다. 눈에는 벌써 황달이 끼어 있고 당뇨에다 피곤함이 떠나지 않는 왜소한 모습의 한 아저씨..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소개장을 써주겠다고 했더니 아저씨 하는 말씀이 자기가 집안을 책임지는데 입원하면 안된단다. 그래서 내가 소개장을 써줘도 입원은 안할 거라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울컥 화가 솟았다. 그러나, 아저씨에게 그러면 할 수 있는 검사랑 치료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알았다..고맙다..라고 하는 말은 귓등으로 들으며 '잘 될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휴식실에서 노란 링겔을 꼽고 누워 있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의 간수치와 싸워서 승리할 날을 계산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다시 아파트 관리원으로 건강하게 돌아갈 날짜도 계산을 했다.
임상병리실장님이 내게 와서 이야기를 했다.
"알파피토프로테인 양성이 나왔습니다." 간암을 알리는 표지자다. 고개를 흔들었다. "알파피토프로테인은 간암뿐 아니라 간경화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며 불안으로 떨리는 임상병리실장님의 시선을 피했다.
간수치가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24시간 교대근무를 하고 있다는 아저씨에게 난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임상병리실장님에게 했던 말을 다시 읖조렸다. "간경화 때도 수치가 양성이 나올 수 있어. 간암이 아닐 수도 있어..."라고...
내일은 아저씨가 근무때문에 나에게 오지 못할 것이고 모레 올 것이다. 그 때는 초음파를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여태껏 했던 계산을 모두 초음파 결과를 보면서 다시 하기로 했다.
즐겨가는 사이트에는 여전히 아픈 이야기들이 가득하고 나는 분열된 정신으로 있기 어려워 맥주를 마신다. 맥주를 마시며 '아픈 가슴을 소독할 수 있나? '라고 자문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술기운으로도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은 밤이다. 내일..아니 벌써 오늘이 되어버린 냉정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저 버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