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 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 분서>> 이지 지음 , 홍승직 옮김. 홍익 출판사 1998. 141면. -
명말청초 양명좌파의 대가 이탁오의 말이라고 한다. 푸하님께 빌린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라는 책 속에서 찾아낸 귀절이다.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지식꼬뮌을 만들어 가파른 학문적 종횡단을 일삼으며 '노마디즘'을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연대기인데, 잠 오지 않는 밤, 친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꽤나 흠뻑 빠져서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최근의 이사로 서로의 집까지 10분 거리가 되어버려 밤마실마져도 쉬워지는 상황이 되자, 녀석과 나는 커피 한잔을 핑계로 자주 서로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오늘도 녀석은 "커피한잔 마시러 가도 돼?'"라고 유혹의 말을 건네었고, 나또한 "물론!!" 하고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녀석은 12시가 넘는 시간 내 집에 나타나 수다와 함께 진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갔다.
가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녀석과 내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란 생각을 하게 된다. '수유+너머'의 고미숙씨가 '고마녀'라 불리며 악역을 도맡고 운영에도 무대뽀 정신으로 밀어붙이기를 할 때 이진경씨는 반대 입장에서 그녀랑 바락바락 싸우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중심추가 되었듯, 녀석과 나의 관계또한 각각 다른 환경, 다른 정신 세계, 다른 처세술, 다른 학문을 추구하면서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뭉쳐져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견제해주는 역활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관계임을 다시 재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 친구..요즘에는 체중관리를 핑계로 내가 들이대는 술잔도 마다하니 나의 꼴이 참담하기 이를 때 없다. 혼자 홀짝거리는 술잔이 쓸쓸하다고 아양을 떨어도 단호하게 "내일 말이지..."로 시작되는 녀석의 신학기 박사과정동안 해야할 실험들의 번잡함과 "나잇살" 운운하는 데에는 나또한 찔끔할 수 밖에 없는 탓이다.
1시간 30분동안의 수다 후, 녀석을 돌려 보내고 '두고봐!! 내일은 일찍 일어나 운동해서 S라인 구축하겠다!!' 라고 선언을 해도 시간은 덧없이 흘러 이 시간이 되어버렸으니 공염불이 따로 없다. -_-
습관을 바꿔야 S라인 구축과 함께 녀석의 입심을 이길 수 있으려나? 어쨋든 녀석의 자극으로 내일(!!!)부터는 좀 달라질 거 같다.(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