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을 만나다
“큰별이 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런 표현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 4월 25일, 고우영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본 기자는 고우영의 작품을 접한지 얼마되지 않는다. 채 10년이 되려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전국에 만화 대여점 열풍이 휘몰아 칠 무렵, 온갖 만화책을 빌려보다 뽑아든 작품이 ‘고우영 삼국지’였다.
‘검열’이란 이름으로 무차별 칼질과 화이트칠을 당한 판본을 본 주제에(그것도 빌려서) 고우영에 대한 단상을 적어나간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어두웠던 70, 80년대의 한가닥 즐거움으로 그의 작품을 보았던 사람들, 신문 연재분을 차곡차곡 스크랩했다던 열혈 독자들, 그리고 수정.삭제된 단행본에 분노하던 팬들에 비한다면 본기자는 침묵하고 있어야할 군번이다.
그래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비록 나의 청춘과 함께 살아오진 않았지만, 시간을 초월한 만남과 즐거움이 있었노라고...
친구들의 악평 : "그림 못 그리잖아..."
남자고등학교를 다닌 본 기자는 만화 취향이 다소 특이했다.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와 유시진의 ‘쿨핫’ 같은 순정만화를 품고 다니다 “니가 호모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들의 ‘순정만화체 알레르기’에 대해선 어느정도 이해를 하는 편이었다. 조기 교육을 통해 어느정도 단련되지 않으면, 쉽사리 다섯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언젠가, “이 시대 최고의 만화는 무엇이냐”란 논쟁(?)이 붙었다. 여러 만화 제목이 언급되던 중 결국 ‘오! 나의 여신님’과 ‘남벌’의 두 패로 나뉘어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 (물론 친구들의 만화취향도 특이했었다.) 어느쪽에도 동조하지 않던 본 기자는 조용히 말했다.
“고우영 만화도 재밌는데...”
그러나 불과 2초만에 양측으로부터 무차별 폭격을 당해야 했다. 그 중 결정타는 “그림 못 그리잖아”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취향의 문제로 던져버리기엔,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으나, 여기에선 고우영 화백과 한겨레와의 인터뷰 기사로 대신하겠다.
아주 초기부터 그 틀은 확립됐던 것 같아요. 독특한 그림체를 만든 데 특별한 요령은 없고 그저 많이 그려보는 것이 공부였습니다만, 한가지 비결이 있다면 남의 만화, 특히 일본만화는 거의 안 봤다는 거지요. 뭔가를 보다 깊은 인상을 받으면 알게모르게 나중에 자기작품 속에 그것이 배어나오게 마련이니까요.
[...]
주로 그냥 보통펜을 쓰지만, 때론 붓대 자체를 깎아서 거기에 먹을 찍어 그리기도 하지요. 그리고 사실체와 약화체를 수시로 넘나들기 때문에 문하생이나 조수를 두기가 참 어렵습니다. 따라서 물론 공장식 작품생산이란 아예 불가능하지요. 제가 다 해야 하니까요. 지금도 아주 기본적인 작업을 돕는 조수 한명 외에는 저 혼자 작업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제 작품을 작가형 수제품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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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덧붙이자면, 한국 만화체의 고질병인 ‘우리모두’식의 일본 만화 그림체 모방과 공장체제운영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저기에 실려있다.)
'(너덜너덜) 고우영 삼국지'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검열의 칼질과 가위질로 구멍이 송송 뚫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찌 구멍뿐이랴. 우울한 현대사에 빨간칠만 있는 줄 알았으나, 먹칠과 화이트칠도 그 역사가 깊었다.
신문 연재 당시에는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 완결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순간부터, 그 이름도 찬란한 ‘한국간행물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했다.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의 해맑고 순진한 시각으로는 고우영의 작품은 ‘공공의 적’이었다. 70년대 말 단행본으로 찍혀나오자마자, “출판금지”라는 낙인을 깊숙이 박아 넣어줬다.
후에 우석출판사에서 ‘고우영 만화 대전집’이란 이름으로 작품들을 출간하기 시작한다. 허나 출판금지 조치를 피하기 위해, 출판사의 자발적인 삭제, 덧칠, 재편집 과정을 거친 후였으니...
최근 복원된 ‘무삭제 완전판 고우영 삼국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자.
달달 외고 있던 ‘삼국지연의’를 내 생각과 마음의 여과기로 걸러내어 그 위에 역시 내가 만든 향료와 설탕을 뿌려 그것으로 정액을 삼아 아기를 하나 낳았는데, 그것이 ‘고우영 삼국지’라 불리우는 이놈이다.
그러나 아이는 당시 군용 트럭 비슷한 것에 깔려 팔다리 몸통이 갈갈이 찢기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비 되는 내가 애통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보다 더 절통했던 것은 그 불구가 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줄 엄두를 못 내고 24세의 청년이 되기까지 길거리에서 앵벌이를 시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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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듣지마!”, “보지마!”, “다 잡아넣는다!” 라는 악성비료로 인해 대중문화는 피어나기 힘들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절이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금지곡, 금서로 지정되었던 음악들, 도서들은, 그나마 지금에 와서라도 하나의 훈장처럼 그것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고우영의 작품은 (그리고 한국 만화는) 칼질과 화이트칠로 난자당했었지만, 문민정부를 지나고도 여전히 정당한 지분(?)을 얻지도 못한 채 땅속에 묻혀있을 뿐이었다.
물론 “고우영의 작품을 어두운 시절의 산증인’으로 대접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것일지 몰라도, 2001년 딴지일보의 무삭제 연재 기획에 힘입어, 고우영의 그 ‘아이들’은 온전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모자란 부분은 작가의 기억으로라도 더듬어 다시 만들어낸 ‘무삭제 완전판’- 서점에서 맘만 먹으면 살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치욕의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우영의 작품을 사고 싶은 이유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림 못 그리잖아”라는 평으로 일축해버리던 그때 그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다른게 아니였다.
“재밌다”라는 한마디 뿐.
“일본 그림체에 익숙해져 몰라볼 뿐이다. 사실 이게 대단한 그림이다. 물 흐르는 듯한 펜선, 수묵화적인 기법들...” 다 필요없다. ‘발로 그린 그림체’로 보일지라도, 일단 펼쳐 본다면, 다섯페이지만 넘겨봤다면, 고우영의 세계를 즐겼을텐데.
“재밌다” 라는 성의없어 보이는 이 한마디의 평가. 하지만 이 이상 할말이 없다는 게 최고의 극찬이지 않겠는가.
‘고우영 삼국지’를 비롯한 ‘수호전’, ‘일지매’, ‘초한지’ 등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반드시 얘기되어야 할 것은 작가의 독창적인 인물 해석이다. 사실 저명한 작가들이 한.중 고전들을 펴냈지만, 작가 개인의 이름을 걸기에 충분한 사람은 고우영이 유일하다.
어느 작가가 과감하게 유비를 약삭빠른 인물이라고 딴지걸고 나섰던가. (초한지에 등장하는 유방은 한층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낸다.) 소설 속에선 속을 알 수 없는 제갈량을 손에 잡힐 수 있는 캐릭터로 묘사한 작가가 있었던가.
삼국지란 소설이 워낙 방대한 역사소설이다 보니, 주로 사건 위주로 진행된다. 아무리 개성넘치는 소설가가 쓴다할지라도, 등장인물들은 삼국지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유비는 ‘기원전 2-3세기의 인물로 우유부단하나 인덕이 있으며, 젊은 시절 방황하나 제갈량의 도움으로 터전을 잡고 촉을 세운 인물이다.’ 이상으로는 나갈 수 없다.
허나 고우영은 각 등장인물들을 삼국지에서 따로 떼놓더라도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 냈다. 삼국지 내 사건과 사건들 사이에는 각 캐릭터들의 일상, (말)버릇, 행동들로 꼼꼼히 메꿔져 있다. 물론 이것은 고우영만의 재치와 유머로 복원(?)된 것들이다.
<장비의 세세한 부분까지 코믹하게 창조해낸다.>
<바보의 대명사라는 유선>
각 인물들의 성격을 고려, '있음직한 일'들을 창조해낸다.
<유비에게 시집간 딸이 떠난 후, 오태태의 심정... 이렇지 않았을까?>
고우영 화백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난 이후 바로 그의 작품을 사러 나갔다. 갑자기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던 것일까. 어느정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지갑 깊숙이 숨겨놓았던 신용카드를 뽑아들 수 있었던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였다.
“재밌다” - 오직 이것 뿐이었다.
<홍대 앞 모 만화 총판 -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우영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지난 김진태 작가와의 인터뷰 도중에도 고우영 화백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오고 갔다. 많이 건강해졌단 얘기에 그런가 보다며 넘겨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런 비보가 전해질 줄이야.
대장암 수술 중에도 고 화백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 특유의 유머가 담긴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암’이라는 병마와 대항해서도 창작을 향한 즐거움만을 보여줬던 고우영. ‘결코 은퇴는 없다’고 웃으며 얘기하던 고우영.
이 세상 즐거운 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 화백. 그립습니다.
<고화백이 생전에 팬클럽 게시판에 남긴 글>
최초로 여기 들어왔슴돠. 저 만화그리는 고우영 노땅임돠. 저도 모르는 중에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저를 오징어 삼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군요. 특히 환타께 감사드림돠.
암 이라는 놈과 한 판 붙고있는데 이길자신이 점점 생김돠.
여러분들이 링 사이드에서 열렬한 응원을 해주시는 덕분인줄 잘 알고 있슴돠. 별로 잘나지도 못한 인간을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이 그저 고맙고 또한 부끄럽슴돠.
10라운드 가기 전에 상대를 KO시킬 참임돠.(KO라고 썼더니 나의 성씨가 되어버렸슴돠?)
환타를 필두로 여러분 모두에게 또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 자주 끼어들 것을 약속드림돠. . . . 간만에 집에 드렸슴돠. 환타 이하 여러분 안녕하셨슴까?
저는 열심히 암 이란 놈과 맞짱 뜨고 있는데 조금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슴돠. 1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CT라는 검색 촬영을 했는데 이번 달부터는 2개월로 그 사이가 벌어졌슴돠. 요즈음은 임꺽정을 손질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1972년에 그리고 썼던 놈이라 스스로 보기에도 닭살이 짝짝 돋슴돠...만 어쩌겠어요? 옛날 모양 그대로 살려야지요. 수 없이 삭제당했던 페이지들을 다시 살려내는 일을 위안삼아 작업을 하고 있슴돠. 이런, 저런 사정이 호전되면 환타를 필두로 하여 한 번 뭉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또 놀러 올께요.
<수술 경과 보고? 웃음과 함께 슬픔이...>
<고우영 화백 팬 사이트 '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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