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그대들 가슴 아직 따스하다면
[경향신문 2005-04-21 19:30]    
〈김명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국어교육과〉

  인도의 여성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라는 글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부딪히면 갑자기 난쟁이가 되고만다”고 일갈했다. 그녀는 세계사회포럼의 영웅 룰라가 브라질 대통령이 되고 나더니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침에 따라 연금혜택을 줄이고 노동당의 급진파들을 숙청하느라 분주하고, 남아프리카의 영웅 넬슨 만델라도 집권 2년이 채 안 되어서 광범한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수백만명의 집과 일자리, 전기와 수도를 빼앗은 것을 그 단적인 예로 들었다.

  -진보주의자들의 계속된 전향-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예는 우리에게도 있다. 반독재 투쟁의 쌍벽을 이루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과 반골의 화신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다. 세계화라는 구두선을 제일 처음 부르짖은 것이 김영삼씨였고, IMF 위기에 화들짝 놀라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부림을 한 것이 김대중씨였으며,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공갈에 무릎 꿇고 불행한 이라크에 굴욕적으로 군대를 파견한 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평생을 바쳐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굵직한 영웅들이 그럴 바에야 고만고만한 전직 진보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고 얼치기 세계화주의자로 거듭나는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닌지 모른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에서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노동인권의 보호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에 부족하므로 비정규직 보호라는 취지에 맞게 법안을 수정하라”는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노동운동가로 일하다가 지금은 집권당의 정책조정위원장이 된 한 인사가 “황당무계하다. 국민경제 전체나 국가경영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의견이다”라고 즉각 반론을 폈다. 다음날 진보적인 경제학자라고 알려져 온 현직 노동부장관은 한술 더 떠서 인권위의 견해를 “노동시장 선진화로 가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돌부리”라고 몰아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잘 모르면 용감해진다”는 식의 오만한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안이 비정규직의 인권을 더 많이 보호하고 차별을 더 많이 해소하는 안이 아닌 것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집권당 정조위원장이나 노동부 장관이나 정부 안이 비정규직의 인권을 더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인권위 견해에 반대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을 뿐더러 결국 내세운 것은 노동시장 선진화(유연화)요, (외국자본이) 기업(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잘 몰라서 용감하게’ 말하는데 왜 우리가 외국자본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 왜 8백만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가난과 불안과 열패감으로 일그러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의 현재의 삶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앞당기려는 미래가 과연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고 싶다.

  -세계화의 하수인 되려는가-

  그들도 언필칭 진보적이었다고 한다. 그들도 민주화를 위해 나름대로 투쟁했다고 한다. 그들뿐이겠는가? 정부 고위관료, 국회의원 등 이른바 지도층 속에서 이젠 전직 민주투사 아닌 사람 골라내기가 힘들 지경이다. 그들은 왜 그 아까운 젊음을 바쳐 투쟁했을까.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알량한 감투 하나 차지하려고 그랬을까? 절차적 민주주의만 완성되면 그 모든 피눈물 나는 싸움 끝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가 고작 외국자본 투자하기 좋은 나라였을까? 그리하여 전 세계를 다국적 자본의 사냥터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우리도 거기 편승하여 더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의 민중들을 수탈하고, 더 많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세계적 규모의 계급적 불평등과 지구 차원의 환경재앙을 완성하는 것이었을까?

일국적 규모의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그대들이 이젠 전세계적 규모의 개발독재 하수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자가당착이고 배신이며 젊은 날 자신들이 꾸었던 아름다운 꿈에 공공연히 침을 뱉는 일이다. 그대들 가슴에 아직 따스한 피가 흐르고 있다면,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파멸적 환각에서 이제 그만 빠져나오기 바란다.

 

 오늘 이 칼럼을 읽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라는 실체도 알지 못하면서 기어오르고 있는 가파른 사다리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그리고, 가파른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내 옆에서 굴러 떨어지는 많은 이들을 그대로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체 게바라'의 '먼 저편'이란  글이 생각났다.

 

먼 저편

 
-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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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4-2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 게바라-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파란여우-먼 산으로부터 점점 가까이 소쩍새 우는 소리가 나를 부른다.
이 페이퍼 프린터 합니다. 땡큐~~~^^*

클레어 2005-04-2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쩍새 소리 못들어본지 오래됐어요. 파란여우님은 가까이서 소쩍새 소리를 들으실 수 있군요. 부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