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청소년들 20여명이 모여있는 곳으로 인권교육을 하러 갔다. 지금이 2050년이라고 가정하고 올해 문을 여는 '청소년 인권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으면 하는 모형을 몸짓으로 만들어보라고 했다. 2050년쯤에는 우리 사회에서 꼭 사라졌으면 하는 청소년 인권문제를 꼽아보라는 주문이었다. 서너 명씩 모둠을 이룬 청소년들은 체벌이나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벌어지는 교문지도의 풍경, 교사의 언어폭력 등의 인권침해 장면을 몸짓으로 표현했다.
그러던 중 한 모둠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한 청소년이 한 손으로 상대방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때리려고 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주위에 선 두 청소년은 그 장면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지켜보던 아이들이 외친다. "학교폭력이다", "일진회다". 그런데 실제 그 모둠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교사에 의한 두발 단속이었다. 왜 지켜보던 우리가 그런 착각을 하게 되었을까 되물어 보았더니, 청소년들의 답이 명쾌하다. "학교폭력이나 선생님들이 하는 두발단속이나 다를 게 없잖아요?" 다시 청소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 문제만 '학교폭력'이라고 부를까요?"
단면만 비춘 '학교폭력', 또 다른 진실은?
최근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단연 '학교폭력'이다. 일진회가 조폭 뺨친다, 학교폭력 갈 데까지 갔다, 일진회는 폭력을 놀이로 여긴다 등 선정적인 보도가 연일 꼬리를 물고 있다. 그야말로 학교는 갈 곳이 못되는 흉폭한 공간이, '요즘 아이들'은 도매급으로 몹쓸 인간이 되어버렸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떠들썩한 진단과 과잉 대책들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어느새 흙빛이 된다. 정작 '학교폭력'의 본질과 원인을 들여다보려는 진중한 노력은 어디 있나. 아이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또다시 아이들을 대상화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방안들을 내놓는 저 폭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학교폭력'이라는 개념부터 재정의되지 않는다면 폭력을 근절하기는커녕, 청소년들로부터 사회의 '위선'에 대한 조롱을 피할 수 없다고 믿는다. 지금 온 사회를 용광로처럼 들끓게 하는 '학교폭력'은 다만 학생들 사이의 폭력을 가리킬 뿐이다. 반면 학교당국과 그 대리 집행자인 교사에 의해 매일같이 행사되는 이 보편적 폭력은 한번도 전사회적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두발단속에 걸려 머리를 잘리고, 학교를 바꿔보려 발버둥치던 학생들이 학생부실로 끌려가 자퇴 아니면 반성문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은 생활지도와 교육이라는 외피를 쓰고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던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과 함께 학교에 의한 폭력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 이 영화가 보여준 학교의 현실은 유신 말기에만 국한된 것일까. [출처] www.nkino.com
게다가 연일 요란법석 쏟아져나오는 강경대책들의 밑바탕에는 청소년들의 삶과 미래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아니라 실추된 통제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벌겋게 달아오른 양미간을 실룩거리는 교육당국과 치안당국의 얄팍한 자존심만 들어차 있다. 앞다투어 선정적인 기사를 써대는 언론은 타락의 온상으로 떠오른 일일 락카페에 모인 청소년들의 얼굴을 여과없이 게재하는가 하면,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버젓이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대책들을 주문한다. 청소년들이 이러한 위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현상에서 현상으로
이런 상황에서 정작 잊혀지고 있는 것은 학교폭력의 진정한 원인이다. 학교폭력의 원인으로 당국과 언론이 꼽는 것은 물질만능주의, 향락주의, 유해문화, 가해자의 가정환경, 가해자의 정서 장애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원인으로부터 비롯된 현상들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은 아니다. 폭력 가담 청소년 개인의 잘못은 추궁해도 무엇이, 어떤 사회구조가 그/녀를 그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외면한다.
학생들 사이에 늘어나는 폭력은 정확하게 우리 사회와 학교의 정당성이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폭력은 안된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와 학교의 위선에 대한 조롱이자 배운 대로 실천하는 '모범적' 태도이기도 하다. '힘센 놈에게 당했으면 부질없이 대항하려 하지 말고 나보다 더 약한 놈에게 풀어라!'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정당성의 위기를 불러왔는지, 우리 사회가 어떤 관계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학교폭력' 대책의 폭력성
더욱이 학교경찰제도나 교내 폐쇄회로 카메라 설치, 영상물 심의 강화 등 '학교폭력' 대책이라고 거론되고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안들이야말로 많은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는 학생들을 모두 예비 범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학내 권위주의적 군사문화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감시와 검열은 통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음지로 폭력을 '이동'시킬 뿐, 외부의 권력자에 의존하여 얻은 '일시적 평화'는 살얼음판처럼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들 방안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더 위험한 이유는 청소년들 자신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폭력에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
'불면 봐주겠다'는 식의 엄포, '노는 아이들 그룹=일진회=조폭'이라는 등식, 교사의 학생 고발 유도, 가해자 색출·구속·처벌 강화 등의 대책 역시 또 다른 인권침해를 낳게 될 것이다. 유엔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아동권리협약)은 비행과 범죄의 엄격한 구분을 요구하고 있으며, 청소년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는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만 고려할 것과 비사법적인 절차로 범죄(혐의)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국제인권기준이 청소년 사법에서 '비범죄화'를 주요 원칙으로 제시한 까닭은 무엇일가. 청소년에게 '구금'은 자유와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빼앗을 뿐 아니라, 미래의 희망까지 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사로부터 고발당하고 학교로부터 추방당한 청소년, 범죄자라는 '초기 낙인'을 부여받은 청소년을 더 깊은 절망과 증오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소년범 수용소를 무대로 한 다큐멘터리 <십자가를 진 아이들>의 한 장면. 영화는 사회 붕괴의 최대 희생자들인 어린 '범죄자'들의 슬픔과 분노를 다룬다. [출처] http://www.oneworld.cz/oneworld/2000
가해자를 찾아내는 학내 조사과정이나 사법절차에서도 또 하나의 불평등이 잉태된다. 가난과 학대, 무관심과 절망으로부터 주변부적 삶을 강제당하는 청소년은 그만큼 폭력과 범죄의 유혹에 취약하다. 문제가 드러났을 경우에도 부잣집 아이들이 재력이나 잘난 변호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동안, 가난하고 보호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피해자의 부모를 설득할 재력도 공정한 수사나 재판을 가능케 하는 변호인의 도움도 기대하기 힘든 법이다. 그런데도 '처벌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폭력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청소년의 권한 강화가 해결의 열쇠
물론 학생 폭력 문제는 있다. 그리고 심각하다. 단 한 명의 청소년에 의해 단 한 번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또 청소년이라고 해서 자신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을 타자화하고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는, 감시와 처벌에 기댄 방식으로는 피해의 예방도 가해자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왜 청소년들 사이에 위계문화가 싹트고 폭력 이외의 문제해결 방식을 알지 못하는지, 여럿이 힘을 합하면 폭력을 막고 중지시킬 수 있는데도 왜 개별화된 방관자로서 남아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을 외면하고서는 부질없는 헛발질만 반복될 뿐이다.
대책은 청소년의 권한을 강화하고 인권문화를 꽃피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 학교에 CCTV를 설치하는 그 예산으로 청소년의 자치활동과 또래중재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경찰을 교육시키고 학교에 상주시키는 그 에너지를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하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교육에 쏟아야 한다.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이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치유와 교육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체계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배경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