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황루시 / 풀빛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2004. 3. 11

황루시 지음, <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풀빛
2000년 9월 초판 1쇄 발행

표지에 “무속 문화 이해의 길잡이”라는 말이 부제처럼 붙어 있습니다.

저는 무속, 무당, 굿 같은 것하고는 영 상관없이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서 굿을 한 번쯤 벌였을 법도 한데,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랐다면 서낭당이나 정월의 마을굿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나고 자란 수원은 (지금의 수원이나 당시의 서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도시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도시였거든요.
어쩌면 나름대로 새마을운동의 기수(?)였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일례를 들면 고스톱이 있습니다.
또래 친구들을 보면 보통 고스톱을 집에서 어른들 노는 것을 보고 배웠던데,
전 화투라면 할머니가 아버지 몰래 재수떼기 하는 것 정도밖에 본 게 없어
지금도 고스톱을 칠 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질색하셨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어린 시절
무속은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청소년기에 교회를 다녔으니
(보수 기독교계의 배타성을 아시지요?),
무당이나 굿은 절대 가까이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여겼지요.

하지만 2001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로군요),
약속 시간을 기다리느라 들어간 서점에서 이 책을 사 들고 나온 것은,
나이 들면서 막연히 키운 궁금증 때문일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세상을, 우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을지,
신과 소통한다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는 과연 어떠할지...
일제 통치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뒤죽박죽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면
무속은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고
자연 만물의 신성을 믿는 심성이 (일본뿐 아니라)
우리 문화에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국신화 탐사”라는 강좌를 듣기 시작한 올 1월에나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이 책을 찾아 책장을 넘겼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옛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우주를, 자신이란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어떻게 세계관과 가치관을 구축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비밀을 암시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나라의 신화에 관한 책을 슬금슬금 모으고 있는데,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워낙 게을러 무슨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책을 읽는다니까요.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신화는 대부분
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로 전승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무가에 신화가 나오느냐면,
굿은 여러 신을 모시고 제물을 바치며
여기 모인 사람들을 굽어 살피소서 비는 자리인데
(혹은 슬픈 넋을 무사히 저승으로 데려가서
편안히 쉬게 하소서 하고 비는 자리인데),
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그 신의 내력을 죽 읊습니다.
그래서 무당은 이 땅과 하늘, 사람이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창세신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제석본풀이 - 당금애기 등),
저승으로 넋을 데려가시는 신이 어떤 신인지(바리공주 등),
우리 마을을 지키는 신(서낭님), 우리 집을 지키는 신(성주신)의 내력 등등,
굿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신화를 구연합니다.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면 그 신의 내력을 다 읊을 필요가 없을 텐데,
역시 굿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굿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지금 모시는 신은 이러이러한 신이니
믿고 맡겨라 하는 뜻에서 무가를 부르는 셈이니까요.

요즘에는 여러 가지 신화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나옵니다만, 우리 자랄 적에는 한국에 신화가
단군 신화, 박혁거세, 김알지 이야기 정도밖에 없는 줄 알았지요.
교과서에 있는 건국 신화가 신화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겁니다.
우리 이전 세대는 굿판 구경을 하면서,
또 할머니 무릎에서 신화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리 이후 세대는 그림책, 동화책으로 다 읽을 수 있는데,
억울하게도 우리 세대는 이것도 저것도 얻지 못한 거예요.

무속을 공부하며 관동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이 책의 지은이 황루시(이름이 한자로 縷詩랍니다. 시적이죠?) 선생은
처음에 탈놀음과 같은 우리나라 전통극을 공부하다가
진오기굿(진혼굿이라고 할 수 있다)을 한 번 보고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연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굿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굿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제 의견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강의 중에 들은 바로는 외국의 인류학자가 와서
처음 굿을 볼 때도(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굿을 보면 그 연극적인 짜임새 때문에 맥락을 다 이해한다고 합니다.
신화를 구연하면서 무당은 그 신화의 화자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요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는 것과 같겠지요),
굿판에서 장고나 제금을 치며 추임새도 넣고 하는 남자
(이들을 ‘양중’이라 한답니다)는 경우에 따라 1인 촌극도 벌인답니다.

황루시 선생은 70년대 중반부터 굿판을 찾아다니고 무당들과 사귀면서,
무속의 문화적, 민속적 의미 외에 무당들 개인의 인생과 고통까지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1. 도봉산 호랑이’에서 대학 시절 도봉산에서 만났던
맑고 착한 아주머니 이야기로 서두를 떼고,

‘2. 내가 만난 무당들’ 편에서는 현존하는 동해안 지방, 제주도,
서울 지역, 평안도 만신(우리나라 무속은 서울 경기 지역과
동해안 지역, 이북, 서해안 지역, 제주도로 그 권역을 나누어
볼 수 있다 합니다. 지역권에 따라 전승되는 무가의 내용과
굿의 형식이 다르다구요. 물론 무당 개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구요)과 그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고는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무당이란 존재의
사회적 의미와 그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3. 굿의 현장’ 편에서는 죽음을 이해하는 넋굿(죽은 이의 한을
위로하고 편안히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굿),
소외된 자의 잔치 조상굿(평소 제사 때 소외되는, 제주는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넋까지 강림해 한을 풀고 간다고 합니다.
아들 없이 돌아간 작은할아버지, 객지에서 병사했다는 외가 쪽 오촌아저씨,
혼인 전에 죽은 작은집 딸, 전쟁 중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잊고 지낸 큰집 조카 등등),
공동체를 다지는 마을굿(가장 대규모로 잘 전승되는 것이
4-5월의 강릉 단오제라 합니다. 요즘에도 영동 지방을 아우르는
대규모 축제로 이루어진다구요)의 현장을 묘사하고,
그 의미를 짚습니다.

마지막으로 ‘4. 무속의 리얼리즘’에서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일상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공존했던 무속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흔한 시선 - 왜곡되고 편향된 - 을 지적하고,
무속의 실제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신과 함께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써 주변 사람들을 널리 배불리 먹이는
자리, 죽은 이나 산 이나 할 이야기 다 하고 울음으로써 한을 푸는 자리가
바로 굿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굿이 어떤 것이다 하고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굿을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별스런 존재로 여겼던 ‘무당’을 조금 친근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찌르면 아프고, 욕하면 상처받으며,
‘사제자’라는 힘겨운 운명의 굴레를 힘들여 지고 가는 이들.
흔히 무당이나 점바치를 비웃을 때
“남의 일은 다 안다 하면서 제 죽을 날은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란 존재가 원래, 남의 아픔은 건져 올리면서
자기 아픔은 돌보지 못하는 존재랍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허락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당네 집에 굿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무당이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세습무당은 보고 자란 문화 때문인지
굿판에서 산 부모의 한 때문인지 정말 그것밖에는 할 수 없어서,
신이 내린 무당은 버티고 버텨봤지만
신을 거부할수록 불행만 닥쳐오고 가족이 죽어나가서.
그래서 무당들은 다른 사람을 욕할 때
“니네 집안에 무당이나 나라” 한답니다.
아프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손진태 선생이란 분이 1930년에 조사한 김쌍돌이본 창세 무가에서도
신이 저주하는 장면에서
"가문마다 기생 나고,
가문마다 과부 나고,
가문마다 무당 나고,
가문마다 역적 나고,
...
삼천 중에 일천 거사 나너니라" 합니다.

'거사'는 스님을 이야기하는데,
무당이든 스님이든 사제자를 불행한 운명으로 인식했던가 봐요.

무가나 굿에서 쓰는 말을 보면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제 어휘력도 부족하고,생활이 민속 문화에서 멀어지고,
또 전래 입말보다 문어체 번역어투가 익숙해져버린 탓도 있지요.
요즘엔 학교에서 사투리도 따로 배운다던데,
아~ 우리 세대는 정말 못 배운 게 많습니다...


****

엊그제 케이블TV에서 작년에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를 보았습니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 굿판에서 죽은 이와 산 가족이 만날 땐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 200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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