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나는 떳떳한 편에 있었고, 그것만으로 양심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믿는 감정,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만족감, 스스로를 존경할 수 있는 기쁨 등은 인간을 분발하게 하거나 전진하게 하는 강한 원동력들입니다. 반대로 만약 그런 것들을 빼앗아버린다면, 인간은 침이나 질질 흘리는 강아지 새끼나 다름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다만 그러한 까닭만으로 범죄가 저질러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전에 나는 어느 실업가를 알았는데, 그의 아내는 나무랄 데 없는 여자라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건만, 그는 아내를 속이고 있었어요. 그 사나이는 자기가 옳지 못하며, 미덕의 면허장을 받을 수도 없고 제 손으로 만들어 가질 수도 없어서 말 그대로 속이 탔습니다. 아내가 완전함을 보일수록 속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내를 속이길 그만두었을까요? 천만에······ 아내를 죽여버렸답니다. 그러한 일로 나는 그를 변호하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서로 양심의 거리낌을 가라앉히려고 이따금 그러한 즐거움을 에고이즘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체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행복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과부와 고아에게 반응하는 내 천성의 일부를 즐기고 있었지요. 반응은 지극히 정확해서 내 천성의 일부가 백방으로 발휘되고 마침내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나는 소경들이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길 좋아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망설이는 지팡이가 눈에 띄기만 하면 아무리 멀더라도 황급히 달려갔는데, 때로는 이미 자비로운 손을 내밀고 있는 다른 사람보다 일 초라도 먼저 다가가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의 친절에서 소경을 빼앗아가지고는 부드럽고 든든한 손길로 횡단보도로 안내하여, 교통 장애물을 피해 안전지대로 인도해주곤 했지요. 그리고 서로 감격해서 헤어지는 것이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통행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담뱃불을 빌려주고, 짐을 너무 무겁게 실은 수레에 힘을 보태주고, 펑크 난 자동차를 밀어주고, 여자 구세군에게서 신문을 사거나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훔쳐 온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파에게서는 꽃을 사는 일 따위를 나는 언제나 좋아했습니다. 나는 또 — 아, 이건 더욱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인데 — 동냥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나의 한 친구는 거지가 자기 집으로 가까이 오는 걸 볼 때 언뜻 느껴지는 첫 감정은 불쾌감이라고 고백했지만, 나는 더 심한 편이었어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거든요. 이 이야기는 그만해둡시다.


예를 들면 재판소 복도에서 정의감이나 동정심만으로, 다시 말해 무료로 변호해준 피고의 아내에게 붙잡혀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노라는 말을 들을 때, 그건 매우 당연한 일이며 누구든 그만한 일을 했으리라고 대답하고 앞으로 고생을 이겨나가도록 조력할 것을 약속하고 나서, 지나친 감격의 토로를 제지하면서 알맞은 감명을 지닐 수 있도록 가련한 여자의 손에 입을 맞춰주고 끊어버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범속한 야망보다 더욱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요, 미덕이 스스로 배양되는 절정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창 나이에 완전한 건강체요, 재능이 풍부하고, 신체 활동에나 지능 활동에 모두 능란하고,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자기 자신에 지극히 만족하면서도 원만한 사교를 통해서가 아니면 그걸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남자,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해도 자화자찬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겠지요.


나는 동정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동정은 더 쉽게 얻을 수 있고, 게다가 아무런 구속도 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어쩌고 하지만, 내심으로는 곧 “그럼 이제 다른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합시다” 하고 말하거든요. 의장 투의 감정이지요. 재난 뒤에는 헐값으로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우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정을 얻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도 드는데, 일단 갖게 되면 떨쳐버릴 수 없는 노릇이라 마주 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더구나 친구란 — 응당 그래야 할 것처럼 — 당신이 자살할 결심을 하지나 않았는지, 또는 그저 말벗이 필요하지 않은지,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알아보려고 밤마다 전화를 거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오히려 친구라는 작자들이 전화를 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이 혼자가 아니고 인생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그런 날 밤일 것입니다. 자살 역시 차라리 친구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 겁니다. 당신으로서 양심상 취할 바 태도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그들의 생각으로서 말입니다. 하느님, 제발 친구 녀석들에게서 과대평가를 받는 일이 없게 하여주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 말하자면 친척들이나 일가 동족들(굉장한 표현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또 그네들대로 골치가 아프지요. 그들은 제각기 할 말이 있는데, 차라리 그 말들은 탄환이에요. 그들의 전화는 소총을 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게다가 겨냥도 정확하거든요. 아아! 시시한 놈들!


죽음만이 우리 감정을 깨우쳐준다는 사실을 주목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별한 친구를 우리는 얼마나 사랑합니까? 안 그래요? 입에 흙이 가득 차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된 스승들을 우리는 얼마나 찬탄합니까? 그때는 찬사가, 그들이 아마도 일생 동안 우리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던 찬사가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고 관대한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고 어여쁜 애인과 만나고 하는 사이에 틈을 타서, 말하자면 여가가 있을 때 찬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무를 짊어지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우리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속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갓 죽은 고인, 마음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고인뿐으로서, 결국 그건 우리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그런 겁니다. 두 가지 면이 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당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갑자기 사람이 죽는 일이 있거들랑 이웃 사람들을 관찰해보십시오. 모두 그저 그럭저럭 살아가며 깊이 잠든 무렵 갑자기 문지기가 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두가 당장 부랴부랴 눈을 뜨고 펄쩍 뛰면서, 영문을 알아보고 가여워하지요. 초상이 났으니 이제는 구경거리가 생긴 겁니다. 그들은 비극에 굶주리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게 그들의 자그마한 감격, 그들의 아페리티프니 〔 식욕을 증진하기 위해 식사 전에 마시는 술 〕  까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만 한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대부분의 결단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만 합니다. 사랑 없는 예속이라도, 또는 죽음이라도. 그러니 장례식도 대환영이지요.


만약에 기둥서방들이나 도둑놈들이 반드시 어디에서나 유죄 선고를 받는다면, 얌전 빼는 축은 모두 언제나 자기들에겐 죄가 없다고 믿어버릴 게 아닙니까?


정말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복종이라는 건, 특히 고분고분한 복종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인정할 수야 없지요. 그러니 노예를 두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차라리 노예를 자유인이라고 불러두는 편이 나을 것 아닙니까? 우선 원리적으로 그렇고, 또 노예에게 절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노예에게도 그만한 보상쯤은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면 노예들은 계속 웃음을 띨 테고, 우리도 양심의 만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고통으로 발광하든가,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나는 항상 놀라울 만한 망각의 능력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을, 무엇보다도 먼저 내 결심을 잊어버렸어요. 결국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요. 전쟁이며 자살, 사랑과 빈곤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긴 했습니다만, 그건 예의상이요 표면상으로 그랬을 뿐입니다. 때로는 내 일상생활에 관계없는 일에 열렬한 관심을 갖는 체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실상은 내 자유가 구속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정말 그 일에 참여하진 않았습니다. 뭐랄까요? 그저 스치며 지나갈 뿐이었어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스치면서 흘러가기만 했던 겁니다.


여성 혐오를 나는 언제나 저속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아는 여자를 거의 나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평가하면서도 나는 여자들을 위했다기보다 이용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어찌 된 셈인지 알 수 없지요.

물론 진정한 사랑이란 예외적인 것이라 한 세기에 두서넛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 밖의 경우에는 허영, 아니면 권태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달라”고 외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말라”고 외치지만, 어떤 종류의 사람들, 가장 악질이고 가장 불쌍한 인종은 “나를 사랑하지 말고 나에게 충실하라”고 외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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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대체로 고상한 말을 쓰려는 약점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 그걸 자책하지 않는 바도 아닙니다. 고급 양말을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발이 더럽지는 않다는 건 나도 압니다. 하지만 고상한 말은 포플린 천처럼 피부병을 감추는 일이 허다하거든요. 어쨌든 말투가 서툴다고 해서 반드시 청정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에 대해선 한마디면 족할 겁니다. ‘당시의 인간은 간음을 하고 신문을 탐독했다.’ 이렇게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나면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을 겁니다.


브라질의 강에 사는 조그만 어족(魚族) 이야기는 물론 들어보셨겠지요? 멋모르고 그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에게 떼로 달려들어 쏙쏙 쪼아서 삽시간에 해골만 새하얗게 남겨놓는다는 물고기 이야기 말입니다. 저들의 사회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청결하게 살기를 원하느냐, 모든 사람처럼?” 하고 물으면, 물론 “네” 하고 대답하지요.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좋아. 너를 깨끗하게 처치해주마. 자, 직업이다, 가족이다, 정기 휴가다.” 그러고는 조그만 이빨들이 살을 물어뜯어 나중엔 뼈만 남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말해선 공정하지 못하군요. 저들의 사회라고 말할 게 아니지요. 그건 결국 우리 사회의 조직이니까요. 누가 먼저 남을 청산하느냐?


어떤 말투에 놀란다는 것은 사실 이중으로 당신의 교양을 증명하거든요. 첫째로 당신은 그런 말투를 알아듣는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것이 당신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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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뚜껑을 열어 보여 줄 때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보여 줬을 때 생겨나는 타인의 마음을 목격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속도 그것에 따라 변하고 말지도 모른다.

<흑백>, 미야베 미유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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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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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컸을까. 막상 반전을 거듭하는 걸 보니 재미보다는 뻔하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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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침묵은 어떤 발언보다 더 효율적인 법.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지 않으려 손수 그릇을 치웠고, 길고양이까지 챙기려 했고, 이를 위해 가급적 흠결이 없는 제품을 구매했던 나의 연쇄적인 노력들은 염분을 제거하지 않은 참치 하나로 나쁜 짓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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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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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통장 잔고를 위해 그들이 열심히 지켜온 갖가지 선택지들이 병렬로 연결되고, ‘25마트 상품’이라는 저질 제품으로 수렴하는 순간 최종적으로는 ‘무책임한 선택’만 남는다.

선량한 구렁이가 눈가를 어찌나 핥아댔는지 5년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악인이 되지 않는 방식만 선택하는 건 마음 안에 용수철을 꾹 눌러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일과 같았다.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튀지 않게끔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고상한 불행은 천박한 행복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관계라면 구린 것도 아닌 척 넘어가기 십상이다. 마땅히 모순적인 일을 해도 ‘너는 예외다’라며 눈감아 주는 것은 비겁보다는 어떠한 관용이었다. 나와 친밀한 사람에게는 참된 정의가 무엇이냐, 도덕이 무엇이냐 사력을 다해 왈가왈부하는 일보다야 밥 한술 더 물려주는 것이 나를 제법 아량 넓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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