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 Bleak Nigh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유명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말은 (원서로) 이렇다고 한다.

"Don’t ever tell anybody anything. If you do, you start missing everybody."

우리말로 된 번역본에서는 뒷 부분이 "말을 하면 쓸쓸해지니까"였을 거다. 한동안 누군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 구절을 적어두었기에 나도 외운 것. 말을 하면 쓸쓸해지니까...볼 때마다, 보는 즉시 쓸쓸해지고, 자꾸 보면 더욱 쓸쓸해지는, 참으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던 기억도 난다.

영화 <파수꾼>의 세 아이도 말을 해서 모두 쓸쓸해졌다.
말해보라는 친구의 말에 우물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짐작하고 오해하고 그 행간의 틈까지 쌓여가는 사이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는 거잖아!'라고 절규하듯 갑갑함을 내뱉고 나서 상대가 그나마 그 '말'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순간, 기태는 모두를 잃었다 - start missing everybody.

아니나 다를까, 윤성현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원래부터 <호밀밭의 파수꾼>을 무척 좋아해서 제목을 파수꾼으로 지었고, 영화의 전체 분위기도 그 책과 흡사해졌다고 한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아 - 하지만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책이라면, 수많은 텍스트로 작가가 혼자서 마음껏 '말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영화다. 혼자만의 작업이 아닌 영화에서, 그것도 아주 열악했을 것이 뻔한 독립영화 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그 분위기를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했지? 그저 놀라웠다. 보면서도 놀랐고 본 후에도 놀람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평론가 정성일이 '나쁜 영화를 보면 나빠지고 좋은 영화를 보면 좋은 사람이 된다' 고 했던 말이, 이제는 체험으로 이해가 간다 -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아주 약간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으니까.

놀라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이제껏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도, 책도, 그 외 다른 매체들도 넘지 못했던 - 어쩌면 넘지 않았던 - 한계를 가뿐히 넘겼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 - 개뿔, 아이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도 어른이 만든 모든 책과 영화는, 아이들을 미래에 어른이 될 존재로만 인식해 왔다. 그래서 '성장영화'라는 딱지표가 늘 붙어있고,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연기하는 사람도, 아이들의 통증을 굳이 '성장통'이라는 수식어 안으로 밀어넣기 바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 중에 - 적어도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 - 아이들의 현재를 함께 사는 영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이것이 한계라는 건 누구나 알았겠지만, 넘기 힘들다는 데 무의식적으로 동의해왔다.
아이들의 현재를 미래와 상관짓지 않고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영화 <파수꾼>은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죽음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다. 기태라는 아이의 미래는 죽음 그 후, 존재는 십대였던 그 시기에서 삶을 멈췄으니, 적어도 한 아이의 미래는 '없다'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이상 아이들을 미래로 향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현재를 사는 아이들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2시간 동안 누린다. 그래서 그 2시간 동안, 남자 고교생의 성장을 그린 뻔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 - 그리고 인간 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를 보며, 갑자기 삶 그 자체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평소에는 저 멀리 치워두었다고 생각한 심오한 고민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히 바라건대, 새털처럼 가벼운 나날들 중에 꼴랑 2시간과 8천원의 비용만 치루고 선뜻 '심오한 고민'에 풍덩 빠져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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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1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민음사판에는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실 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난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 걸 후회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p.279)

드디어 벼르던 영화를 보셨군요, 치니님. 저도 볼게요. 꼴랑 2시간과 8천원, 저도 치루겠습니다!!

치니 2011-03-10 17:08   좋아요 0 | URL
네, 그러고보니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도 기억나요! (이제는 쓸쓸해지기 시작하니까, 가 있기나 했는지, 내가 기억 속에 지어낸 건지 헛갈림. ㅋ)

다락방 님이 좋아할까요, 네, 좋아할 거에요. 다락방 님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사랑하니까.
저랑 같이 본 친구는 좀 울었어요. 저는 울 수 조차 없었어요. 하아 -

로드무비 2011-03-1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저도 이런 리뷰 쓰고 싶었어요.
영화에 이어, 리뷰 읽고 흥분하기도 오랜만.^^

치니 2011-03-10 17:12   좋아요 0 | URL
아 - 그러게요, 오랜만에 우리 영화를 보고 이런 흥분을 느껴요. 극장 상영으로는 데뷔작이라죠,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됩니다.

nada 2011-03-1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한 리뷰예요.
아직 보기 전이지만, 열광하게 될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듭니다.
꼭 보겠어요!

H군 얼굴 너무 앳되고 귀여워요.ㅎㅎ 요즘 사진 아니죠?

치니 2011-03-11 12:33   좋아요 0 | URL
네, 꽃양배추 님이 꼭 보시면 좋겠어요. 대사는 대체로 '아 뭐' '기냥' 이런 식으로 씹는 대사지만, 꽃양배추 님은 그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으실 거니까. 그리고 저처럼 놀라실 지도 몰라요, 남자 고등학생들의 섬세함에 대하여.

요즘 사진이에요. ㅋ 머리를 짧게 치니 또 어려져 버림.

당고 2011-03-1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오- 저도 보고 싶어요-
<호빌밭의 파수꾼>도 영화 <파수꾼>도.
<호밀밭의 파수꾼>은 너무 어릴 때 읽어서 감흥이 없었어요. 잘 생각이 안 난다는;

치니 2011-03-11 12: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 영화 보고나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극 우울로 빠질까봐 초큼 두렵기도 하공.

Arch 2011-03-1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 안 읽었어요. 언제 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본 다음에 치니님 리뷰를 읽으려구요. 3월 말부터 아트 시네마에서 독립영화 상영하던데. 보고 싶어요. GV하면 옥희의 영화에서 나온 장면이 떠올라요. 흐~

치니 2011-03-11 12:35   좋아요 0 | URL
네네, 아치 님, 저도 늘 그래요. 그래서 스포 조심이라고 써놨기도 했고요.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영화는 아주 사소한 관련 글도 미리 읽기 싫어요.

옥희의 영화에서 그 장면 - 흐흐. 거 참. 실제로 그런 일 있으면 나는 완전 저열한 호기심에 들떠 신이 났었을 거에요.

굿바이 2011-03-1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영화를 안봤으니, 내용은 영화보고 읽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글을 흘깃흘깃 훔쳐봅니다 :)

그런데, 치니님, 요즘 저는 꼴랑 2시간도 마음이 자유롭지 않은 날들입니다. 어째야쓰까요~
문득, 살아온 날들과 살아야 할 날들이 폭격받은 지붕처럼 폭삭 꺼지는 느낌입니다.
이런 민망한 고백을 여기에 쓰네요. 참말로 어째야쓰까요~

치니 2011-03-11 12:37   좋아요 0 | URL
저번에 굿바이 님 만추 글 쓰셨을 때 저도 그랬답니다. ㅎ 나중에 읽기로 했지만 흘금흘금.

아 - 그렇군요, 그렇군요. 꼴랑 2시간이라고 쓴 제가 잘못이야요. 꼴랑,이라뇨. 단 2분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도 살다보면 있는 법인데.
하지만, 혹시, 영화를 보고나면, 그 폭삭 꺼지는 느낌이 제법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히융...안타깝기만 하고.

2011-03-18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8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illyours 2011-03-1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에 볼거예요!!

치니 2011-03-18 18:56   좋아요 0 | URL
오, 감상 꼭 남겨 주셔요 ~ 궁금.

stillyours 2011-03-2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어제 봤어요. 잠을 못 이루었답니다.
내 옆에는 이 영화를 여섯 본 사람이 앉아 있었어요.

치니 2011-03-24 13:58   좋아요 0 | URL
아아, 네, 잠을 못 이루었다는 말씀, 왜인지 알 것 같아요.
뭐 대박 감은 아니니 관객이 적다는 건 짐작되는 상황이지만, 이 감독이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동력 정도는 마련되었음 싶네요.

stillyours 2011-03-2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치니님. 오타였어요ㅋ
여섯 번 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는 거였어요!
여튼 나도 곧 한번 더 보려고요.

치니 2011-03-24 15:32   좋아요 0 | URL
우어어, 여섯 번이나! 흑, 뭉클합니다.
오래 전 프랑스에서 영화 '그랑블루'를 수십 번 보러 다니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이는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더이상 상영 안한다고 그랑블루 보러 다른 상영되는 도시로 여행을 따라 다니더라고요. 그 열정이 그들의 영화 문화를 살리는구나, 대단히 감동 받았는데, moon 님 옆 좌석 그분 얘기가 무척 고무적이어요. 기쁩니다.

니나 2012-03-1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순간도 친구인적이 없어...
그말들을 때마다 아우 가슴이 얼마나 메어오던지...
스포 조심, 이긴 하지만 영화 처음부터 기태의 죽음이 나오니까...
뭐, 뒤늦게 보기도 한데다가... 아, 슬프네요. 힝.

치니 2012-03-15 23:44   좋아요 0 | URL
슬프죠, 진짜, 근데 생각해보면, 인생이 다, 그런 거 같기도 해요. 힝.

근데 아까 카톡에서 말 못한 거 하나 또. ㅋ 이제훈이 유아인이랑 같이 담주부터 티비 드라마 패션왕에 나온대요. 근데 여주인공은 신세경과 유리, 왠지 걱정돼요. 망가지면 안돼에 ~ ㅋㅋ

니나 2012-03-21 18:29   좋아요 0 | URL
앗, 이거 이제 읽었네요. 이제훈 나오는지 알았으면 봤을텐데
엄니 보시는데 방에 있었;; 담주부터 볼테닷!
헬스장 2층 도서관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데려왔어요.
다시 보고 싶어서 ㅎㅎ

치니 2012-03-21 20:21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한 십 분 본 게 다이긴 한데, 패션왕은 안타깝게도 망한 듯. ㅋㅋ
그래도 이제훈은 멋져요. <건축학 개론>에서도 빛나고(그 덕분에 엄태웅 망함 ㅋ). 이 배우가 늙어서도 빛남을 유지할지, 자못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