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향은 취향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편협한 정의 그대로 고르지가 못하다. 늘 한 쪽에 치우쳐 있고, 특히 독서에 관한 한 누구의 조언 따위 가볍게 무시하기 일쑤이고 내가 원할 때만 읽는다는 (가장 실천하기 쉬운) 원칙만을 고수해왔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독서 인생에도 여전히 진입하지 못한 쟝르가 있으니, 이는 추리 혹은 미스테리 소설 영역과 사극과 같은 느낌을 주는 역사 소설, 혹은 무협지 포맷을 가진 소설 류다. 진입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면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외면했다는 오해를 살까 싶어 미리 말해두건대, 읽어보기는 했다. 했는데 남들이 그 분야에서 최고라고 침을 튀기는 책을 읽어도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어 포기한 것이다.

나는 포기했는데도,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추리소설이나 무협지에 대한 열광은 맹목적일 정도로 느껴질 때가 많더라)은 여전하고 다른 건 몰라도 좋다는 책에 대해선 늘 호기심을 누르기 어려운 허영기 많은 성정이라 이번에도 또 시도를 해봤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소위 독자로서의 평가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개 어떤 책을 읽으면 좋다 나쁘다, 라는 감정이 우선 오고 다음에는 누군가에게 권할 만한지 아닌지도 생각하고 최종적으로 '이 책은 나에게 ㅇㅇ했어!' 라는 식으로 평가를 하게 되는데, 푸른 불꽃을 읽으니 이런 생각들만 드는 것이다.

- 왜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도 다음에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긴장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남들은 궁금해서 단숨에 읽는다는데)
- 왜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살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도구와 방법을 정하는 과정에 대한 세밀 묘사가 지겨울까(남들은 그런 세밀 묘사에서 감탄을 할 지도 모르는데)
- 왜 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몰입해서 따라가지 못할까 (이건 작가의 역량 탓인가 아니면 내가 추리소설을 읽어본 경험이 지극히 적어서인가)
- 왜 나는 마지막에 주인공이 경찰에 잡히는 걸 보고 추리소설이란 결국 사회 질서를 교란하지 않는다는 모종의 합의 눈금을 지키지 않는 한 발표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문학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품을 뿐,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이거야말로 내가 추리소설이라곤 기껏해야 두어 권 읽은 게 다여서 뭘 모르고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추리소설이나 CSI같은 형사물을 즐기려면, 내가 그 스토리에 푹 빠져서 그 입장이 되어서 비범하게 머리를 굴리고 예측을 하고 헛점을 찾아내야 재미를 느낄 터인데, 나는 머리가 나빠서 그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이다! -_ㅠ (그렇다, 주인공이 살인 계획을 세울 때 이미 나도 형사처럼 헛점을 조금은 찾았어야 그 다음이 재미있어지는 걸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나는 왜 추리소설을 재미나게 읽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 추리소설의 재미라면 자신 있다는 애독가 여러분, 저 좀 도와주세요. 지금 맛도 제대로 못 본 상태에서 종결하고 싶지 않은데, 저런 저의 의문점을 다 확 누르고 그저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들어줄, 그런 소설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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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1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치니님. 그렇다면 이런 책은 어떨까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28256

저는 이 다음 시리즈인 [망량의 상자]를 가장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건 두권짜리이고 이 책 다음 시리즈라(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그다지 관계는 없지만), 게다가 이 책이 지금 반값이니까, 이 책이라면 푹 빠지지 않을까 싶어지는데요. 제가 빌려드리고 싶지만 제 책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ㅠㅠ

[푸른 불꽃]은 저는 추리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청소년의 성장기쯤으로 봤어요. 아니 성장기랑은 좀 다른..그러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거였는데 그 아이는 그럴 수 밖에 없었잖아요. 게다가 마지막 선택까지. 아 전 정말 이 책 서늘했어요. 가슴이 아파서 ㅠㅠ


치니 2011-01-17 13:16   좋아요 0 | URL
호오, 알겠어요. 척 봐도 제 취향 (또, 또 ㅋㅋ)에는 이 책이 나을 듯한 느낌이 오는데요.

저 역시 [푸른 불꽃]을 성장소설로도 이해했는데요, 그렇다면 오히려 부족한 점이 마구 부각되는 거에요. 성장소설에 대한 제 기대치가 너무 높은 걸 수도 있고, 작가가 어쩌면 그 부분에 대한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을 거 같기도 하고. 뭣보다 주인공의 심리가 완벽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분노에 대한 설명이 덜 되었달까, 환경이 그렇다는 건 알겠지만 주인공이 점점 분노의 수위가 높아지는 부분에 대한 묘사가 더 나왔어야 하지 않나 싶고...살인 말고도 해결방법은 있는데, 굳이 죽이는 걸로만 해결하려 드는게...크, 이래서는 역시 좋은 추리소설 독자가 못 되겠네요.

하이드 2011-01-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 안 맞는거겠지요. ^^
저도 추리소설 많이 읽는 편이지만, 막 범인 찾고, 추리하고 그런거 안 해요.

디테일하게 흠을 잡으려면, 그건 '추리'소설이나 '소설'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는 흠 없는 이야기보다 강력한 장점이 있는 티 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해요. JCO 보다는 존 어빙이나 카슨 매컬러스. 이런 느낌이랄까요.

카스피님 서재에 가면 대문에 '장르 소설의 90%는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 역시 쓰레기다.' 라는 말이 있지요. 한 두 권 읽어 보고 '추리소설'은 .. 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이상하게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 다 좋더라구요.(이건 꽤 이상해요. 제가 책 많이 읽어도 이렇게 다 좋은 작가는 기시 유스케가 유일하거든요.) 그 중에서 <유리 망치> 시리즈랑 <푸른 불꽃>이 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죠(아, <푸른 불꽃>은 도서추리소설이기도 해요. 성장소설로 볼 수도 있겠구요, 사회파 소설이기도 하고) <크림슨의 미궁>과 <도깨비불의 집>도 별로라는 사람들이 많을꺼에요. <13번째 인격>, 데뷔작인데, 이것도 데뷔작스러워요.

가장 많이 알려졌을 <검은 집> 보다 저는 <천사의 속삭임>을 무지 좋아하구요, <신세계에서>도 대단해요! .. 라고 말하고 보니, 역시 사이코패스나 악령 같은 배경지식이나 이야기들 많이 읽어야 더 좋아할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하네요.

결론은. 안 읽히면 읽지 마세요. 추천해달라는 페이퍼이긴 한데, 별로 추리소설 안 좋아하려고 마음 먹은 페이퍼 같아서 딱히 추천할 책이 떠오르지는 않네요.

열광적이고 맹목적인 추리소설 독자.. 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아직 멀었어요. 헤헤

치니 2011-01-17 14:48   좋아요 0 | URL
네, 처음 제 게으른 원칙 대로라면 그저 취향이 안 맞나부다 하고 말면 그만인데, 요즘 그런 식으로 포기하는 것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또 뭐랄까, 정말 좋은 예술 작품이라면 그게 어떤 쟝르이던 (추리소설이건 아니건) 취향과는 별개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건데, 나만 그걸 모르나 약간 안달이 나기도 했나봐요.
흐음, 그럼 <천사의 속삭임>이나 <신세계에서>를 함 읽어봐야겠군요. 아무튼 요새 한가해서 그런지 뭐든 시도하는 중이야요.

네오 2011-01-1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추리소설과 무협소설의 광팬으로서 무지 안타깝네요~~말로는 설명할수 없고 굉장히 좋은 소설이 줄을 서고 기다리는데요~ 기시유스케는 하이드님 말씀대로 다 좋은데여~ 머 굳이 취향이 안 맞나는데 그걸 하염없이 붙잡고 있는것도 조금은 낭비라는 생각도여, 아닌가요? 재능을 다른데의 소비하면 더 좋은 방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치니 2011-01-17 17:47   좋아요 0 | URL
^-^ 네오님, 광팬이셨구나. 굉장히 좋은 그 소설,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

... 2011-01-1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왜 추리/미스테리를 좋아할까,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저도 추리한다고 머리굴리고 범인 미리 예측하고 하는 것을 무지 싫어하거든요. 곰곰 생각해 보니, 저는 누군가가 죽은 후 (추리/미스테리물에서는 대개 살인이라는 불행한 경우이지만) 사망한 사람에 대해 알려지는 이야기들을 짚어가는 것에 매력을 느끼더라구요. 한 사회속에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 가족,친지,친구들 사이에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 산 자와 죽은 자의 간극에는 무엇이 있을까, 같은 것들이요. 한 생명이 머물렀나 떠난 그 자리에 켜켜이 숨어있는 이야기들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약한 호러, SF, 밀실, 본격추리같은 말이 들어가는 추리/미스테리들은 피하기도 하지요.

저는 치니님께 미야베 미유키를 권해드리고 싶은데요, 화차나 이유같은 사회파소설도 좋고 얼간이 같은 따뜻한 이야기도 좋구요.

치니 2011-01-17 17:49   좋아요 0 | URL
오, 브론테 님, 감사합니다. 맞아요, 분명 그냥 추리한다고 머리 쓰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니 다들 그렇게 열광하실 테지요.

미야베 미유키 역시 입소문 많이 들어서 이름은 외울 지경. ^-^; 알겠습니다, 화차가 좋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요. 우선 그것부터 한번 시도.

웽스북스 2011-01-17 22:15   좋아요 0 | URL
저도 모방범 얘기하고 싶었는데 ㅋㅋㅋ

다락방 2011-01-18 09:20   좋아요 0 | URL
모방범을 저도 얘기할까 하다가 말긴 했는데, 모방범은 특히 그 부분이 좋았어요. 할아버지가 범죄자한테

"너한테는 그런걸 알려줄 어른이 없었던거야." 라고 했던 부분이요. 그런 부분을 읽으면 치니님도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치니 2011-01-18 11:14   좋아요 0 | URL
알겠어요, 그럼 모방범으로 우선 시작 결정! :)

다락방 2011-01-18 12:47   좋아요 0 | URL
모방범이 좋긴 한데, 흐음, 제 생각엔 우부메의 여름이 더 나을것 같은데....아....음..................( '')

에디 2011-01-1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들처럼 미미여사의 작품이 좋을것 같아요. 좀 더 막나가는걸.... 원하신다면 기리노 나쓰오(아웃)도 괜찮아요. 느끼한 터프가이를 싫어하지 않으시면 레이먼드 챈들러도...


치니 2011-01-18 17:52   좋아요 0 | URL
아직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장담할 순 없지만, 막 나가는 거랑 느끼한 터프가이는 별로 좋아지질 않을 듯해요, 지금 심정으론. ^-^; 미미여사가 안전빵인 듯.

다락방 2011-01-1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에디님 댓글 보고 생각난건데, 필립 말로를 좋아하시게 될까요, 치니님이? 필립 말로는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속의 탐정입니다. 아우, 저 필립 말로 완전 미치게 사랑하는데요. ㅠㅠ 필립 말로는 완전 제스타일 ♡

치니 2011-01-18 17:53   좋아요 0 | URL
으음? 그럼 필립 말로=느끼한 터프가이? 다락방님=느끼한 터프가이 좋아함? 이렇게 되는 거에요? ㅎㅎ
히야 - 역시 예상대로 이 쪽 세계 무궁무진하군요.

다락방 2011-01-18 18:14   좋아요 0 | URL
필립 말로는 제가 보기에 느끼한 터프가이라기 보다는 흐음, 뭐랄까, 비굴한듯 비굴하지 않은 쉬크가이 쯤인데요. ㅎㅎㅎㅎㅎ

치니 2011-01-18 18:18   좋아요 0 | URL
비굴한 듯 비굴하지 않은 쉬크 가이 - 캬 ~ 그럼 저도 좋아할 거 같은데요? ㅎㅎㅎ 알았어요, 레이먼드 챈들러도 메모.

Kir 2011-01-1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와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은 저도 낑겨서 추천하고 갈게요. 미미 여사 소설 중에서는 화차, 모방범, 이유, 이 세 작품이 가장 취향을 타지 않고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전 화차를 가장 좋아합니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다락방님이 추천하신 우부메의 여름이랑 망량의 상자가 좋았고요. 망량의 상자는 언제든지 생각만 해도 오싹해져요;
기리노 나쓰오 소설은 기분이 한없는 바닥으로 추락해서 헤어나오기 힘들지만 그로테스크는 한번 읽어보셨으면 해요. 그 책을 읽고서 치니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거든요...

치니 2011-01-18 17:56   좋아요 0 | URL
아, 사실 제가 이런 욕심을 낸 데는 언젠가 Kircheis 님의 서재의 글을 읽고 '이건 뭘까, 어떤 재미일까'라는 생각을 한 연유도 있어요. 그래서 은근 기다렸습니다, 어떤 걸 추천해주실지. ^-^;
웬만한 독자들에게는 고루 인정을 받고 있으니, 역시 미미여사가 짱이군요. 교고쿠 나쓰히코는 제목이 아무래도 더 끌리는 '우부메의 여름'이 땡기고요.
'그로테스크'도 메모. 단, 기분이 꽤 괜찮을 때 읽어야겠군요. ^-^;

2011-01-18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8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11-01-18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치니님 취향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지만..
추리소설 쪽은 기질적으로 안 맞으시는 듯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그냥저냥 재미있고 뭐가 매력인지도 알겠는데, 굳이 찾아서 읽거나 막 열광하게 되진 않아요.
미야베 미유키도 재밌네, 이러고 끝.
제 경우엔, 추리소설보단 SF가 그나마 나았던 것 같아요.
추리소설이란 게 대부분 범죄소설이잖아요.
전 이 문학의 태생부터가 마뜩치 않더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범죄소설보다 '범죄소설의 사회사'를 권해 드리고 싶네요.
<즐거운 살인>이란 책인데 혹시 읽어보셨을려나요.
이 책도 100% 명쾌한 건 아닌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던 기억이 나요.
근데 알라딘엔 품절.흑.
도서관에 한 번 찾아보세요.

치니 2011-01-18 18:03   좋아요 0 | URL
아뇨, 잘 아시는 거 같아요, 꽃양배추님. ^-^; 기질적으로는 아무래도 그래요.
말씀하신대로 그냥저냥 읽으라면 재미있게 나름 읽을 수 있겠지만 막 열광할 거 같지 않은 느낌.
그래서 뭐랄까 브론테님 댓글의 말씀처럼, 어떤 사건 이면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공감하게 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에요.
SF라고 규정하기에 약간 어렵겠지만 해리포터 시리즈는 4권까지는 재미나게 읽었으니 저도 추리소설보단 공상과학 쪽이 그나마 맞는 걸지도. ^-^;
권해주신 <즐거운 살인>은 확 관심이 땡기는데, 흠, 도서관에서 찾아볼게요.
이야, 역시 알라딘에서는 책에 관해선 무궁무진한 정보가 이렇게나 줄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