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루카 풀빛 동화의 아이들
구드룬 멥스 지음, 미하엘 쇼버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말 다 알아들었지, 파니?"

(..) 끝에 물음표를 세 개나 찍은 것 같은 그러니까 끝없이 긴 푸딩처럼 길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하게 '파니???'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다. 그 소리는 내 귀에 아주 부드럽게 들리면서 자꾸만 나를 빙긋이 웃게 했다.

엄마가 미체 아줌마한테 전화 좀 하자고 했다. 나는 내 방으로 갔다. 그러나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래야 '파니???' 하는 소리가 내 귀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39-40쪽)

 

이제 파니에게 루카는 학교 친구지만, 남자 친구 '루카-루카'이기도 하다. 물론 둘 사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비밀이다. 학교에서는 보통 때처럼 행동하지만 학교 밖에서는 시간을 정해 통화를 하고 놀이터에서 만나 서로 손을 꼭 잡는다. 이따금 서로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기도 한다. 루카-루카가 파니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아주 빠르게. "빠른 것은 금방 다시 가버렸지만 촉촉한 것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 촉촉한 것은 사라지고 없지만 빠른 것은 여전히 거기 남아 있다.

 

초등학교 4학년 파니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명확한 이유 없이 어느 순간 루카가 루카-루카가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전화기 앞에서 안달하며 벨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고, 질투하고 괴로워하는 파니를 응원하면서도 아니 자존심도 없냐 너무 그러면 안돼, 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자존심을 내팽개쳐서가 아니라, 그런 걸 아예 떠올리지를 않아서 파니의 사랑이 진행된다. 어린이의 사랑이 어른의 사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토록 섬세하게 그린 작품은 흔치 않다. 게다가 어린이의 사랑이라고 해서 귀엽게, 기특하게, 풋풋하게 그리지도 않았다. 파니의 엄마 아빠는 간섭하지도 방관하지도 않으면서 파니의 사랑을 지켜본다. 파니의 사랑에 닥친 위기가 다른 이성 친구가 아닌 것도 좋다. 사랑의 외연이 얼마나 넓은가. 작가는 어린이의 세계를 존중하고 있다.

 

파니의 이별도 이렇게 존중받는다. 파니의 슬픔은 그저 밥을 먹기 싫거나 엄마랑 말하기 싫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아빠가 파니를 위로하기 위해 서커스에 데려갔을 때 남들은 모두 깔깔 웃는 장면에서 파니 홀로 눈물을 흘린다.

 

아빠는 무척 당황하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난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팠다. 온통 다 아팠다. 그러나 그 말을 아빠에게 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내가 울도록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아빠한테는 내 울음이 너무 크고 너무 길었다. 아빠는 자꾸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나가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걸으면서는 잘 울 수 없으니까. (130쪽)

 

아빠는 서툰 방법으로나마 사랑을 담아 파니를 위로한다. 파니는 마침내 배 속의 '돌멩이'가 없어진 것을 안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관계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루카-루카가 아닌 루카와 나란히 앉아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파니가 서커스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에서 눈물을 흘릴 때 나도 같이 울었다. 파니는 아빠 덕분에 울음을 그쳤지만 나는 조금 더 울었다. 좋은 어린이문학이 그려내는 세계는 사람을 안심하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고 그 일을 해내는 너를 이해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것, 이번에는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너는 잘해낸 거고, 앞으로도 이렇게 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말을 쓰면서 나는 또 주책없이 울고 있다. 어린이의 눈물인지 어른의 눈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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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08-0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물이ㅠㅠ; 남들은 모두 웃고 있는 장면에서 홀로 우는 파니가 너무 ㅠㅠ;;; 어린이의 사랑과 이별을 존중하는 이야기 참 좋아요. 저도 읽어볼래요. ㅠㅠ

네꼬 2015-08-11 17:50   좋아요 0 | URL
ㅠㅠ 눈물 난다오. 나중에 파니가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뭉클한지요. ㅠㅠ

다락방 2015-08-0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아요. 남들이 웃는 장면에거 나 혼자 우는 거요. 제가 그걸 해봤어요. 저 이거 읽어볼래요!

네꼬 2015-08-11 17:50   좋아요 0 | URL
이런 사랑 얘기는 다락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모쪼록!

뽈따구 2015-08-1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족들을 찐하게 사랑하는데도, 사랑은 왠지 낯설어서.
리뷰를 세 번이나 읽고서야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PS. 뽈따구는 대학교때 별명인데 닉네임으로는 희소성이 있어서 편하게 쓰고 있어요. ^^

네꼬 2015-09-16 18:12   좋아요 0 | URL
뽈따구님, 제 답글이 늦었지만 (왜 이제야.. ㅠㅠ) 사랑은 언제나 두근두근입니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군요...) 그런데 정말이에요. 이 책 읽으시면 두근두근하실지도!